지구를 사랑한다는 주장과 다르게 지구를 탐험하는 여행을 작가는 싫어한다고 당돌하게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여행을 싫어하는 작가가 특별한 계기로(반 강제적으로) 방문하게 된 몇 곳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도시에 지인이 머물러 있어, 책은 작가의 사람과 그 사람의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추억들로 채워진다. 삽화처럼 들어간 사진들은 현대 미술을 애호한다는 작가의 취향을 반영한 듯 조금은 감각적이면서도 열려있는 의도 탓에 (작가는 후기에서 자신의 사진 촬영기술을 폄하하였으나) 헤아릴 길 없는 작가의 여행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에피소드는 사진으로 남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진이 아닌 분명하게 시각적으로 각인된 기억 탓으로 오해할 만큼 작가의 추억과 이야기는 과거보다 더 선명했고, 그 속에 담긴 작가의 따뜻한 마음씨가 더해져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진다. 삶을 긍정하고 주변을 살펴보는 작가의 자세는 나에게 그 어떤 여행기 보다 편안하고 쉬이 동행할 수 있는 휴식을 선사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연한 것은 자연스레 잊힌다. 당연하지 않을 때 마주하는 것들은 특별하고 한 번쯤 다시 눈여겨보게 되지만, 늘 마주하고 있어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들은 애써서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길 필요가 없어진다. 애석하게도 인간은 자신 가까이에 자연스럽게 있는 소중한 누군가의 존재를 잊도록 설정된 것처럼 그렇게 주변을 지워버린다. 이처럼 누군가의 노동을 우리는 많은 방식으로 묵인하며 그들의 노고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받들어지고 신성하게 여겨온 특별한 노동은 학습된 의미로 가치를 빛낼 뿐인데, 철저하게 규격화된 관념의 시스템 속에서 처단되고 분류된 직업은 별 볼 일 없는 노동과 인간 스스로가 우상화시킨 업무로 나누며 소외된 특정 집단을 가치 없음으로 처분하였다. 필수 불가결한 존재들이 당연시되고 가치 없음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쌓아온 사회구성의 존재를 의심할 정도로 의아한 결과이지만, 대중은 오랜 시간 길들여지고 익숙한 학습 탓으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의문을 제기하는 대상이 오히려 의심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니 이 책과 같이 사회에 불순한 반기를 든다면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하거나, 신기한 관심으로 그들의 행태를 들여다볼지 모르겠다. 책에서 소개된 각각의 노동자들이 겪어온 그리고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환경을 내가 감히 겨우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보통은 ‘역지사지‘라는 네 음절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강조해 보기도 하지만 인간은 서로의 상황에 동일하게 처해 있지 않는다면, 결코 서로의 환경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이나마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려 많은 사고와 학습으로 묵인되고 가려진 누군가의 의미를 의식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최소한의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여행을 주제로 작가가 경험한 일상을 엮었다. 사실 여행은 책의 컨셉에 지나지 않고, 작가, 그리고 작가 주변인들의 근황과 인간관계가 주 인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프롤로그에서 작가가 던진 충분한 휴식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증이 생겼다면, 책을 덮는 순간 목적지를 잃어버린 네비게이션 처럼 기대는 당혹감을 동반할 것이다. 에세이는 작가의 유쾌하고 호탕한 글 재주로 시종일관 빠른 흐름으로 전개된다. 내용이 어려운 주제를 다룬것도 아니기에 나는 SNS에 게시된 인플루언서의 계정을 흘겨보듯이 작가와 작가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무용한 잡답을 지켜본다. 관심이 경제가 되는 사회에서 관찰예능의 CCTV처럼 유명인을 감시하는것이 어색하지 않은 뉴노멀이 되었지만, 나는 에세이로까지 그 영역이 확장된 지금 상황이 당연하게 느껴지지않아 헛헛한 웃음만 나왔다. 적어도 독자는 챕터 중간중간 위트를 이끄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며, 어이없는 과장된 전개에 박장대소를 내보였어야 했다. 아무튼 오락거리로써 독서를 즐겨야하는 자세가 나한테는 매우 부족했다. 친구의 고민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와중, 각자의 입속에 구강 유산균을 넣어주며 다음 주 방송에 활용하는 제품을 테스트한다는 친구의 에피소드에 감탄하는 작가의 반응을 보며 나는 이 책의 본질을 엿본듯 했다. 친구가 상황을 업무로 치환하듯, 작가는 특별한 일상과 에피소드를 자신의 에세이로 보란듯이 남기며 이렇게 한 권으로 책을 남기지 않았던가.
먹고사는 삶으로 사람은 인생의 반을 채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은 아마 인간에게 먹는 일련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게 만듦으로써 일상을 채워나가길 원한것일까. 엄마로서 그런 일상을 보내는 작가의 글에 하루의 소소한 식사가 담긴다. 무엇을 먹고 사는 행위에 오늘을 산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다시 바라본다.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해준 밥을 꼭꼭 씹어내듯 작가의 문장을 나는 되새김질하듯 눈으로 받아들인다. 그 속에 따스하게 담긴 사랑과 애정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오늘의 영양분을 듬뿍얻고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기운을 얻는것이다.
원제인 “안락사에 이른 일본인”을 오해하게 할만큼 “조력자살”이라는 타이틀의 범위가 조금은 어긋나보였다. 작가 자신이 한 챕터를 할애하여, 조력자살이라는 용어의 뜻을 suicide 에서 death 로 순화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할 정도로 언어의미에 큰 조심성을 드러내는데 비하여 역자의 의도는 작가의 의중에 세심함을 더하지 못하였다. 책을 읽으며 나에게는 안락사의 개념 자체가 사람들에게 화두되지 못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만큼 작가가 경험한 현실이 더 무겁고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 현실에서 늘 잘 살아갈 생각만할 뿐이었지, 잘 죽어야 하는 고민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모두에게 언급해서는 안되는 터부가 되었음을 느낀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가. 자살이 주는 불쾌한 사건을 개인적인 사생활로 치부할 뿐 우리는 정면으로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려 시도하였던가? 그들이 선택사항에서 배제된 항목으로 안락사를 택하지 못함은 분명 의도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삶에 대한 배신감을 던진다. 삶을 마주하는 것과 동일하게 죽음을 마중하지 않으면 과연 인간으로써 어떤 의미로 시간을 보낼수있을까. 이 책을통해 나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녀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간 죽음을 경험했다. 쉬이 느낄수 없는 삶의 무게에대해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것을 생각할지, 그리고 타인의 존재와 남겨진 삶과 이어진 관계에 대해 나는 어떤자세를 취해야할지 고민과 질문이 뒤섞인 마음이 가득했다. 잘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잘 죽음을 맞이하는것 무엇보다 내게는 크게 다가온 삶의 의미로 되새길 필요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