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는건 지금의 흐름에 맞춰 누군과와는 다르게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는 증표처럼 보여져, 나는 무언가 의미없는 끄적임이라도 남겨두어야 할 것처럼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나도 모르게 글을 쓰는 화자처럼 끄적이지 않고서는 못배길 정도로 나는 작가가 던진 감정에 이미 충분히 설득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해리포터의 마법주문도 나오지 않는데, 하수구로 빠져드는 물결마냥 나는 글줄을 무서운 속도로 읽어내려갔다. 한 챕터만 읽으려 서점에서 손에 집어든 한 권은 아예 주저앉아 완독을 제창하는 감성에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 주변의 친구가 주절거렸을 법한 그런 분명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한 권안에 널려서 얽히고 생각을 만들며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책장을 덮으면 단지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를법한 애매한 경계가 픽션이라는 장르에 태연하게 기대어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시덥지않은 일상위에 툭툭 던져진 작가의 위트는 감칠맛을 더한 조미료 마냥 빠져나올 수 없는 풍미로 가득차있다. 잘난 작가의 연애담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그런 사랑조차 경험하지 못한 스스로에 무슨 추도라도 해야할지 애석하기 그지없기도 한데, 이렇게 나마 그들의 감정에 조금이라도 들어갈 수있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다. 작가는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이 있었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작가가 보여줄 앞으로의 작품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연스레 생각했다. 그게 독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가죽의자가 늘어진 서점의 안락한 분위기에 이끌려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쥔 소설이 재밌었다.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이 정의인지도 모를 장황한 형제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자유롭게 빠져들어간다. 행복과 최악을 넘나드는 시간들의 집합체가 인생이 결국 아닐런가? 작가는 넌지시 이런 질문하고자 하는듯 했다.
소설이 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보는 작가이름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책을 옮겨담았던 이유는 문학상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기댄 나의 맹목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상작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결코 마케팅의 한낱 수단이 아니었다.사회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기준점에서 옳고 그름이 나누어지고, 이를 따르는 대중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규칙이 만들어진다. 다만 그 누군가를 차지할 불완전한 존재는 비이상적인 신념으로 대중을 좌지우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에, 사회는 늘 누군가의 기준과 기준이 대립되어 소멸하고 갱신되며 업데이트 되는 소프트웨어 마냥 이상을 꿈꾸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힌 개인의 감정과 사회의 기준에 빗댄 판단의 불명확함은 소설처럼 명료하지도 판사의 분명한 선고와 같이 뚜렷하지도 못하다. 실재는 유지되고 있는 현실에 조금이나마 유연하게 대응하려는 찰나의 노력일뿐, 불완전함의 상태를 마주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몸짓에 불과하다. 소설 속 가상의 사건은 표면적으로 드러났기에 사건이며 이슈가 되었을 뿐이지, 그 이면에 특정한 이름으로 확보해내지 못한 상처와 아픔들이 떠도는 사회에 나는 이미 내재화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결국 나는 상황에 깊이 스며들어 어찌하지 못하고, 경계의 구분없이 상황을 안고사는 그대로의 삶을 반추할 수 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나는 차근히 마련된 작가의 단서를 모아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할지언정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모호한 씁쓸함이 머릿속을 남돌아, 지나친 나의 상처들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지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추구하고자 하는 사고는 입력된것인가 자생한 것인가. 목소리를 내고있는지 단순히 기록되고 있었던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오히려 진실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고민하고 있는 자아를 안고있는 분들께 권하면, 더없는 흔들림과 생각의 여지를 제공할 한 권이 아닐런지.
젊은 작가상 수상집의 한 단편으로 수록된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주목받는 작가인 만큼 소설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단편소설의 제목이 참 길다. 절대 기억할 수 없게 나열된 수식어와 단어의 조합이 어쩔수 없이 차라리 작가이름을 기억하려하게 하는 고도의 수법인양, 나는 작품을 다시 찾기위해 분명하고 똑똑하게 작가이름을 되새길 수 밖에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엿보이는 작가의 위트에 나는 냉소가 잦았다. 실제인듯 허구인듯 경계를 의심하게하는 아슬아슬한 픽션은 재주있는 동물의 재롱에 눈여기게 되는 것처럼 나를 작가의 글에 계속해서 눈길이 가게 만들었다. 작가가 어떤 다른 얘기들로 독자들을 매료하고 문단의 주목을 끄는지 궁금했기에, 자연스레 나는 최근 발표한 첫 소설집으로 손이 갔다. 예상과는 반대로 소설집에 담긴 작품들에서는 그로테스크한 무거움이 엄습했다. 연애얘기로 흔히 들어본적한 혹은 익숙해지기 바라는 이상적인 경계에 조금도 도달하지 않는 작가의 행보에 당혹감이 일어 나는 못들은 척 범죄뉴스를 틀어놓은 티비마냥 그의 글줄을 부분적으로 무시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만났던 사람들의 유형에 대해 어느정도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티끌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습관이 한 사람을 분류하는 단서가 되어, 으레 나는 기억속의 누군가와 그 대상을 겹쳐 폴더 속으로 저장하였다. 그러고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안에 담긴 안내서를 향해 사람을 대하고,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 타인을 기대하는 삶을 나는 살고 있다고 느낀다. 작가의 소설에 대해 해설자는 그가 대중과 마이너리티의 경계 가운데 타협하여 균형있게 공존하려는 장을 열었다 평가했다. (해설자의 평을 자세히는 읽지 않았다) 도통 내 기억속에는 없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날뛰고 있어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 그 공존의 노력에서 엿보이는 독자의 자연스런 감상인걸까? 누군가의 글을 읽고 스스로가 한 번 생각하고, 고민하며 그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행위는 내가 소설을 읽으며 가장 즐겨 마다하지 않는 기쁨이다. 적어도 작가는 나의 기대에 대한 질문은 던져주었다. 본인 스스로 이 단편들은 독자들을 향한 가벼운 농담이었다는 겸손한 발언에 나는 아무래도 앞으로의 작품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살인이 없어서 아쉬웠다면, 그 불안정한 감정을 채워내듯 독자는 죽음에 대한 타인의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에피타이져와 디저트가 훌륭하다 못해 그 의도가 완벽하려는 노력으로 돋보여 나는 순간적으로 픽션이라는 장르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입체적인 것은 여주인공 한 명일 뿐, 그녀를 뒷받침하는 주변인물들이 너무 조각처럼 납작하게 널려있다. 들쑥날쑥한 인간들의 조합과 긴장된 호흡이 서로 얽혀있어 순간을 책 넘김으로 치환시켰던 내 기억속의 작가는 어디로 갔을까?서점의 주간소설 베스트로 디피되어있는 열한권의 책들 중에 네 권이 히가시노의 소설이다. 대중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다만, 기대만큼 아쉬움이 남은 나의 독서시간은 답변이 되지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