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별로인 한 권이다. 저자는 텔레마케터라는 직업에 그들의 원래 ‘문화’이거나, ‘감정노동’이라는 고정된 생소한 용어를 도입하여 그 문제를 환기하려 했으나 생소한 것은 매한가지였고, 오히려 그들의 문제를 더욱 모호하게 표현하여 심지어 책을 덮는 순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고 황당했다.적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이 책을 들고 있다는 독자들은 어느 정도 ‘콜센터’라는 공간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조리함과 노동구조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가운데 있을 터. 구태여 저자가 고객으로 대변되는 대중을 적으로 몰아넣거나 사회를 흑백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조로 나누어 감정적인 서술만 늘어놓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실제 근로자들의 귀한 인터뷰들이 너무 아무 의미 없이 장황하게 나열되어 읽는 내내 하소연만 반복되어 무엇을 위한 글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의 언어에서도 다듬고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두드러져 정돈될 필요가 있을 텐데, 작가 최소한의 편집조차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실제 근로자들의 귀한 인터뷰들이 너무 아무 의미 없이 장황하게 나열되어 읽는 내내 하소연만 반복되어 무엇을 위한 글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의 언어에서도 다듬고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두드러져 정돈될 필요가 있을 텐데, 작가 최소한의 편집조차 들어가지 않고 인터뷰이 조차 그 감정에 휘말려 편향적으로 접근해서 객관적인 의미를 도출하기가 매우 어려워 글을 읽는 내내 답답함을 느꼈다. 본인이 어렵게 접근했고 그걸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 저렇게 힘들었다, 2절 3절 계속 되뇌듯이 여러 챕터에 걸쳐서 반복해 언급하는데, 이게 그럼 누가 고생해서 얻은 결과이며 정말 그렇게 노력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까지밖에 정리가 안 되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인류학자로서’라는 수식어로 여러 차례 대변하며 스스로가 학자임을 강조하나 인류학자임에도 그런 자질이 충분히 있다면 스스로가 언급하고 칭하지 않아도 될 것을 그렇게 말하기엔 조금도 글이 대단하지 않았다. 출판사의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편집이 아까울 정도로 글들은 그 그릇에 담기기에 너무나도 현저하게 부족한 글이 아닌가 했다. 논문으로 제판되어서 가지런히 대학 도서관에 꽂혀 있어야 할 한 권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 출간된 건 아닌지 심히 의심된다.
미래는 불분명하기에 항상 걱정되고 지금에 빗대어 불안정해 보이기에 늘 내일이라는 시간은 막연하게 생각된다. 이 책은 가족 얘기를 하고 있는듯하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작은 구성안에 들어있는 “나”에 대해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에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조금은 다른 선택지를 내보인다. 가공되어 티브이 속에 드러난 스테레오타입의 가족들은 정말인지 티브이 속에만 공존하는 기이한 형태처럼 보였다. 대중매체는 오히려 강압적으로 현실의 가족에게 당신들 또한 거울처럼 그렇게 존재해야 함을 각인시키는 맹목적인 신념을 전파하고, 이에 의구심을 갖기에 대중은 너무 순진했다. 반면에 ‘아니다’를 연속하는 저자의 끊임없는 질문은 새삼 당혹스럽다. 지금까지 그랬으니 당연한 그 이유에 대한 인과를 문제로 삼는 건 왠지 세상에 버릇없이 행동하는 잔소리 같다. 근데 철이 들었다고 뻔하게 가장하던 어른이가 반기를 들었다. 이건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부모는 왜 아이에게 늘 요구하고 그대로 행동하게 해야 할까? 그들 또한 자신이 살아온 편협한 선택으로 한정된 선택지만을 꼭 쥐고 있을 뿐인데, 보호자로서 적절한 조언을 제시할 예언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자격에 대한 의문이다. 어찌 되었든 가족이라는 특수한 환경 안에 서로 싫든 좋든 닮을 수 밖에 없고, 그게 싫어 일부러 회피하든 따라가든 잔여물처럼 눌어붙어버린 역사의 시간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방임과 책임이라는 두 가지의 단어로 축약될 법한 저자의 교육 방법은 매우 실험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으레 그러했듯 익숙하지 않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뿐이지 위트로 넘치는 작가의 가족은 여전히 불분명한 미래에 대해 불확실함으로 무장하며 응수하고 있다. 맺음글의 한 챕터를 장녀에게 대담히 넘겨줄 정도로 작가의 교육법은 정말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몇몇 매체에서 다뤄지기 시작하더니 말도 안 될 것 같은 소수의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기본소득은 팬데믹과 더불어 그 입장을 조금씩 갖춰나가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노동의 형태와 앞으로의 근로는 다를 것이며 그 가운데에 로봇과 AI로 대변되는 자동화와 효율적인 시스템의 부상이 있다. 그것이 기본소득과 무슨 상관성을 갖는지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으나, 우리 주변에 소소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매장에서의 키오스크는 충분히 그 미래가 머지않음을 분명하게 했다. 간단한 주문조차 인간을 대면하지도 않고 몇 번의 터치로 가능해졌으며, 으레 과정과 순서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업무들이 온라인과 앱으로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과도기를 벗어나 누구나 당연한 듯이 그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가운데 많은 기존의 일자리는 같은 방식으로 소멸하게 될 것이고 그 폭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극심할 수도 오히려 최악으로 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직접 대면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 주변에는 이미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었다.저자는 이번에 대선에도 출마하면서 관심을 두게 했다. 2017년에 쓴 글이기는 해서 다소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가 제창하는 공약의 뒷받침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기본소득’이 모든 것의 답이며 그 이유에 관한 많은 사례와 이유를 저자는 책에 끌어넣었지만 나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너무 급진적이라 분명 좋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인 밀어붙임으로는 열린 관점으로도 받아들이기가 다소 어색했다. 아직 성공적인 복지로 손꼽히는 국가들에서도 ‘기본소득’은 실험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이상적인 시스템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는 확실하게 대중에게 설득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다수는 ‘기본소득’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있으며, 특히 한국이라는 특수한 집단에는 더더욱 거리낌이 심해 보인다. 모든 게 좋을 것이라는 말로만으로는 환상과 이상에 가까워 현실에서는 나와는 거리감이 너무 먼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떠할지 조금만 더 차근히 순차적으로 접근하면 이해와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있지만, 시도와 제안으로 그 과정의 어려움은 조금씩 해결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세상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우리는 분명 그 과정에 힘을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라는 목적이 무엇보다 강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의미로 많은 관점을 내포한다. 내 관심사, 내가 바라보는 관점과 성향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직업은 그렇게 또 다른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의 한 줄기가 된다. 2022년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한 번쯤 되뇌었을 법한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회를 마주하고, 우리를 구성한 다수는 무엇으로 현재를 바라보는가. 이 책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시간에 앞서 판사라는 직업 위에 작가가 바라본 현미경에 비친 현재를 엿보게 돕는다. 사실 대중들에게 뉴스로나 접해봄 직한 사건·사고들은 매우 낯설고 어색하다. 그러한 궁금증과 호기심 때문인지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간간이 화두 되는 극적인 뉴스로 사람들은 화제를 모으거나 쉽게 공감을 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누군가에 의해 가공되고 완성된 서사일 뿐, 그 뒤에 존재하고 있는 당사자의 현실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스스로 나서서 파헤쳐볼 여유도 없기에 그렇게 모른 척 해두고 나와는 상관없다 치부한 그들의 이야기가 어떠했을지 대중은 사실상 궁금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다.이에 반기를 들듯, 작가는 소소하게 그렇게 가려져 왔던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내어 보여준다. 그 안에 담긴 사람이 주체가 된 우리 혹은 누군가의 서사를. 따뜻한 마음으로 건네는 문장에서 작가의 애틋함과 한 인간을 바라보는 감정이 우러나와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렇듯 직업이 부여한 새로운 관점이 나와는 다른 지금을 새로 보게 한다. 물론 내가 직접 경험하고 익힌 것이 아닐지라도, 이렇게나마 작가가 엮어둔 글이 모여 만들어진 좋은 책 한 권으로 대신해 본다. 지금을 사는 것은 주변을 바라보고 나를 익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쉬이 그 관심을 줄이는 게 어렵지 않을 것임을 나는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타인을 보고 가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포인트가 있다. 상대를 생각해 배려한답시고 후하게 베풀어준 선의가 타인에게는 당연한 권리처럼 취급되었을 때 나는 낙담하고 분노한다. 이렇듯 선의가 권리로 변모한 자연스러운 사고가 현대인들에게 스스럼없이 자리를 잡은 건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가장 최근의 경향처럼 보였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이기적인 사고를 개인주의라는 아름다운 해석으로 가공하여 자신을 가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또한, 나는 왜 환경을 아끼자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뜬금없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지구를 위해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물을 아끼고 대중교통조차 이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화장지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1년여간의 무모한 시도는 이상하게 다른 관점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시사점을 던진다. 왜 작가가 이런 황당하게 짝이 없는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다시 서두를 읽으면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만) 엉뚱한 이유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나는 딱히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없다. 다만, 풍성하고 윤택하게 살아온 당연한 삶의 환경에 크게 의심하지 않는 대중들이 오히려 낯설었을 뿐이었다. 음식은 남을 만큼 주문하고 부족하지 않게 남겨둬야 품위가 있어 보였고, 매년 신제품 발표회로 출시되는 기기들에 관한 관심은 놓치지 말아야 할 당연한 관심사처럼 보였다. 주기적인 소비와 반복되는 광고에 길들어져서 구매를 위한 인생이 마치 나의 목적처럼 대두함에 조금의 의구심도 갖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에 호응하듯 어차피 짧게 살다가 죽을 거 남 눈치를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기업들은 외친다. 지금 당장 소비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을 때 행복할 것이라고 뻔뻔하게 소비자의 마음을 구슬리려 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제창한다. 그 가운데 사람들에게 자리를 잡은 새벽 배송은 직접 손으로 물건을 살펴보며 장을 보는 일상의 행복을 은근슬쩍 빼앗고, 버튼 하나로 배달되는 매일의 식사에서 요리하는 과정의 기쁨을 잊게 했다. 먹고 사는 노동의 아름다움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담기는 콘텐츠로 미화될 뿐이고, 개인에게는 지루하게 겪어야 할 직접적인 태만의 대상처럼 취급되었다. 이미 우리는 ‘누구나 쉽고 편하게’라는 신조 아래 남의 권리를 빼앗고 노동을 취하며 폐해를 묵인하는 중 인간의 됨됨이조차 쉽고 편하게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딱히 지구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내 앞에 물건 하나, 음식 한 개조차 누군가의 손을 거치고 어떤 에너지를 소비하며 이 자리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겸허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잠시 왔다가 죽음으로 사그라지는 개인이 어떤 자세로 머물다 가야 하는지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자연스레 빌려 쓰는 지구의 자원에 대한 배려심은 당연하게 자리를 잡지 않을까. 구태여 환경보호라는 타이틀을 앞세워서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제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공유하고 있음을 이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각자의 삶에 대한 의무가 있듯 당연한 존재에 대한 책임이 모두에게 달려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기를 바라며 오늘도 조금이나마 덜 쓰고 아끼며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구의 선의는 권리가 아님을 끊임없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