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 '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 이라는 글을 가져온 것 입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과 시내트러 독트린 

1968년 8월 20일 한밤중에 소련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햇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목표로 내걸고 민주선거와 복수정당제도, 노동자의 기업자주관리제도 등을 도입하려 한 체코 정부의 정치경제개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소련군은 체코 공산당 서기장 알렉산더 두브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자들을 모조뢰 체포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는 프라하 시민들을 탱크로 짓밟았다. 이리하여 이른바 '프리하의 봄'은 겨우 몇 달도 안되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스탈린체제를 조금씩 고쳐 나가던 흐루시초프를 구데타로 밀어내고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같은 해 10월 소련체제 본뜨기를 그만두고 독자노선을 걸으려 한 체코 자주화운동을 무력으로 말살한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개별 사회주의 나라의 이익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계 전체의 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세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나라의 주권은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제한주권론' 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다 소련 정무는 1980년대까지 이러한 견해를 버리지 않고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을 지배했다. 그런데 1985년 3월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 국민들을 위해 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책에서 사회주의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사회주의 나라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원칙적으로 개별 국가의 완전한 자주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우방국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각 나라 집권당이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가 당면한 문제에 책임 있게 대처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당연한 원칙이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변혁과 근본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혁의 범위와 형태, 속도와 방법은 각국의 지도자와 국민이 결정할 문제다. 각국이 고유한 특징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1989년 10월에 열린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장관 외의에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나라 외무장관들은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주권을 행사한다는 원칙을 존중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공식 폐기하였다. 서방 언론은 재빠르게도 '시내트러 독트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프랭크 시내트러의 노래 '마이 웨이'에 빗댄 것이다. 

 "외교는 내치의 대외적 표현"이라는 말마따나 고르바초프가 선택한 '시내트러 독트린'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낳은 자연스로운 외교노선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순수한 러시아말로 '고쳐 세운다'는 뜻이다. 이 두 단어는 고르바초프가 추친한 개혁 정책을 집약한 말이다. 

 물론 페레스트로이카는 젊은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집권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그 혼자만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것은 소련 권력층이 "더 이상 어제처럼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들도 "더 이상 어제 같은 내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생겨났다. 그러나 혁명가와 연구자들이 애용하는 말 그대로 이처럼 "지배자들이 개혁을 하려고 나서는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소련은 해체되었고 동유럽 사회주의체제도 모두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낯선 혁명, 무너진 사회주의 

 고르바초프가 내놓은 '새로운 사고'는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에 거대한 폭풍우를 목고 왔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쌓이소 쌓인 모순이 폭발하여 세계 역사에서 처음보는,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보기 어려운 '낯선 혁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소련의 손에서 놓여 난 동유럽 나라들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1980년 바웬사가 이끄는 독립노조 '연대'의 총파업으로 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몰렸다 폴란드에서 제일 먼저 복수정당제도를 도입했다. 1989년 6월 4일 무려 42년 만에 처음 치른 자유총선거에서 '연대'노조 후보들은 전국에서 공산당 후보를 눌렀다. 1956년 동유럽에서 제일 먼저 반소 자주화 시위를 벌였던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헝가리공산당은 1989년 10월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명시한 새 강령을 채택하면서 당을 해체하고 사회당으로 변신했다. 불가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잇달아 공산당 일당독재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 혁명은 그 이전에 일어난 혁명과는 달랐다. 

 공산당 정부들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거나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 그러니 시위군중도 무리글 들 필요가 없었다. 큰 도시 중심가에 모인 수십만 군중은 일제히 열쇠를 흔들어 '혁명교향악'을 연주했고 밤에는 너나없이 촛불을 켜들어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엇다. 국민들은 개혁과 민주주의를 원했고 옛날과 같이 통치할 수 없다고 느낀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굴복했다. 

 유일한 예외는 가장 완고한 사회주의 국가로 이름난 루마니아였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 국민은 독재자 차우세스쿠에 반대하는 전국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차우세스쿠는 "사회주의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사병이나 다름없는 보안군과 헬기를 동원하여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고 국민과 보안군 부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일찍이 나치 군대와 싸워 영웅으로 추앙했던 차우세스쿠는 아내와 함께 '구국위원회' 군대에 잡혀 비참하게 총살되고 말았다. 

 집권층 스스로 개혁을 시작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과는 달리 에리히 호네커가 이끌던 동독공산당은 이웃나라의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체제 위에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 그러자 동독 국민들은 사회를 변혁하려 하기보다는 서독으로 탈출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탈출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7월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 시민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이 이상한 혁명은 모습을 드러냈다. 헝가릴 정부는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어기면서 무려 2만 5천 명이나 되는 동독 사람이 국경을 넘도록 허용했다. 체코 프라하와 폴란드 바르샤바 서독 대사관에서도 탈출 물결이 밀어닥쳤다. 

 이렇게 되자 개혁을 원하는 동독 지식인들이 1989년 10월 노이에스 포럼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등록신청을 냈다. 정부는 이 단체의 등록을 받아 주지 않았다. 동독 정부는 스스로 개혁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벌이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고르바초프가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동베를린으로 날아왔다. 고르바초프는 호네커에게 동독 정부는 모스크바의 생각과 관계없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면서 "너무 늦게 오는 사람은 역사가 벌을 내린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이 충고를 듣지 않았다. 

 정부 수립 기념행사가 열린 10월 7일 동베를린과 라이프치히 등 동독 대도시는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로 뒤덮였다. 동독 국민들의 요구는 "자유선거와 여행자유 보장"으로 집약되었다. 시위가 날마다 계속되자 10월 18일 마침내 18년 동안이나 통치해 온 호네커가 사임하고 그의 오른팔 노릇울하던 에곤 크렌츠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런 눈속임으로는 시위를 끝낼 수 없었다.크렌츠틑 개혁을 약속했지만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11월 4일 동베를린에 모인 50만 시위대는 이제 여행자유 정도에 그치지 않고 공산단 일당독재폐지와 정권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산당 지도부는 내각과 당 정치국을 전면 개편했다. 개혁주의자 한스 모르도프가 총리 자리를 받았다. 그러나 '탈출혁명'은 가라앉지 않았다. 젊은 기술자들이 너무 많이 빠져 나간 탓으로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의사와 간호원이 모자라 병원조차 제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1970년대부터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사람들을 서독에 넘겨주고 그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든 비용'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받았다. 그런데 한 해에 무려 20만며 명이 탈출하는 상황에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 통하는 국경과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은 베를린장벽을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1989년 11월 7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1961년에 동독 쪽에서 쌓은 높이 4미터, 길이 45킬로미터나 되는 견고한 장벽, 반세기에 걸친 동서냉전과 대결의 상징, 이것을 몰래 넘다 사살된 동독시민 78명의 한과, 체포된 3천여 명의 눈물로 얼룩진 베를린방벽은 이렇게 무너졌다. 총을 든 국경경비대가 멀거니 지켜 보는 가운데 사람들은 벽을 부너뜨렸다.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춤을 추고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1990년 3월 18일 동독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한 사회민주당을 누르고 급속한 통일을 공략한 콜 수상이 집권한 기독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서독의 물질적 풍요를 본 동독 유권자들이 하루 빠리 통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불과 반년이 지난 1990년 10월 3일 0시 독일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는 사라졌다. 그보다 며칠 앞서 동독 인민회의 의장은 동베를린에 잇던 외국대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작별인사를 했고 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분할 점령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정부도 독일 통일을 인정했다. 동서독으로 갈라선 지 41년 만에 면적 36만여 평방 킬로미터, 인구 7천 9백만을 가진 통일독일이 등장한 것이다. 동독의 '탈출혁명'은 이렇게 하여 독일의 재통일로 그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고포정치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만인의 자발적인 결사체"를 꿈꾸었다. 칼 마르크스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제도를 바꾸면 인간의 의식과 가치관도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을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감과 책임감에 따라 일하고 살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이후 혁명가들이 만든 사회는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폐지되었지만 인간에 대한 억압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연대감과 책임감만으로 모든 사람을 오랫동안 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상은 아름답고 원대하엿지만 그들이 택한 방법으로는 결코 그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동독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젊은 시절 나치체제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까지 치른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잃은 후 러시아로 달아났다가 통일독일로 송환되어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 재판이 정치재판이요 포로재판이라고 항의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이 파산한 권력자를 딸이 살고 있는 칠레로 망명하도록 허용했다. 호네커는 칠레에서 "사회주의를 배신한 고르바초프"를 비난하고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아온" 자기의 일생을 회고하는 글을 쓰다가 1994년 2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끝없는 도전과 희생, 극적인 승리와 한때의 영광,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온 치욕스런 종말로 이어지는 동유럽 사회주의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동독은 동유럽의 '모범 사회주의국가'였다. 스탈린체제를 충실하게 본떠 별 말썽 없이 유지해 왔다는 뜻이다. 원래 동유럽에서는 제일 발전한 산업국가엿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치 전범과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숙청했으며, 반나치투쟁에 참여한 열혈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비록 소련군대의 보호를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출발이 나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나라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나날이 변하는 마당에서까지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탈린체제의 첫째가는 특징은 철저한 일당독재와 무자비한 정치테러엿다. 스탈린은 1930년대에 농촌을 사회주의 집단농장으로 바꾸면서 수백만 명의 부유한 자영농을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고 가 운하와 철도를 만드는 일에 동원했다. 1934년 12월에 일어난 키로프 암살사건을 빌미 삼아 벌이 대숙청에 희생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볼셰비키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무장봉기를 지도한 혁명영웅이다. 스탈린은 이 사건을 트로츠키 추종자의 소행으로 보고 무자비한 숙척의 칼을 빼들엇다. 

 처음에는 공산단 고위간부와 고참 혁명가, 외교관, 고위 군장교, 작가들을 겨냥했던 대숙청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통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공산당 중앙위원이자 원로 혁명가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투하체프스키 총사령관, 정치국원 르이코프와 부하린 등이 줄줄이 처형되었고, 노동조합 지도자 톰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가들이 숙청이 두려워 자살했다. 죄명은 한결같이 국제 파시스트 앞잡이, 트로츠키주의자, 반당분자, 독일 스파이 등이었으며, 일단 올가미에 걸린 사람은 정식 재판도 없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비밀경찰은 언제나 새벽에 희생자의 집에 들이닥쳤고 한번 끌려가면 가족조차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소련 국민들은 서로를 밀고자로 의심하면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했다. 

 스탈린은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다음 "태양처럼 빛나는 지도자"가 되었다. 노동조합과 농민단체 등 모든 사회조직은 공산당의 손발로 전락했고, 언론과 문학 예술은 공산당 정책과 스탈린주의를 선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물론 시민혁명으로 이룩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학문. 사상의 자유도 봉쇄되었다. 

 스탈린의 정치테러는 나라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치군대와 맞서 소련군의 도움 없이 조국 유고를 해방한 선방공 출신 혁명가 요십 브로즈 티토가 '소련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독자노선을 택하자, 스탈린은 유고공산당을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아 국제공산주의운동 조직에서 축출하고,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 가운데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쓸어냈다. 폴란드공산당 제1서기 고물카, 헝가리 내무장관 루슬로 라이크, 불가리아 부수상 코스토프, 루마니아공산당 정치국원 파트라스카누, 체코공산당 제 1서기 루돌프 스란스키와 외무장관 클레멘티스, 알바니아 부수상 코치 조제 등이 그 대표적 희생자들이었다. 사형을 면한 사람은 오직 고물카뿐이었다. 

 스탈린의 횡포는 미국의 반공우익세력에게 훌륭한 명분을 주었다. 그들은 소련을 "철의 장막에 가려진 야만국가"로 규정하고 "소련의 세계 적화 음모를 막기 위한" 군비증강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또 국내의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을 "크레믈린의 검은 손이 조종하는 체제 파괴활동"으로 몰아 탄압하고, 세계 곳곳에 광신적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을 일삼는 파쇼국가를 만들어 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후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운동의 초점은 스탈린 개인숭배의 폐해를 바로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체제는 인간 스탈린보다 훨씬 오래, 즉 고르바초프가 등장할 때까지 여전히 살아 남아 위력을 떨쳤다. 독가시넝쿨에 풍성한 과일이 열릴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방식으로 만든 사회가 인류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독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동독슈타지, 즉 국가안전부는 온 국민을 감시 대상으로 삼아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동독 시민들이 슈타지본부를 습격, 탈취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기밀 문서는 통일된 후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되었다. 동독 시민들은 속마음을 트고 지낸 친구와 친척,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까지 슈타지 협력자로 있으면서 자기의 언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을 보고 엄청난 심리적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눈부신 성공, 날개 없는 추락 

 사회주의사상과 운동은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엄청난 생산력 발전을 이룩한 자본주의체제가 극심한 불평등을 불러들이지만 않았다면 사회주의사상이 나왔을 리가 없다.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러시아는 1917년에는 유럽에서 제일 뒤떨어진 낡은 봉건제국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러시아는 나치군대와의 현대전에 능히 맞설 만큼 발전한 산업국가가 되어있었다. 1957년에는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우주로 쏘아 보내, 자만심에 빠졌던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사회주의 나라들은 비록 그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 하더라도 모듡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집과 식량과 교육과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매매춘과 조직폭력 등 뿌리깊은 사회악이 자취를 감추었고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정도의 빈부격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눈부신 성공'의 뒤안길에는 언젠가는 사회주의체제의 뿌리를 뒤흔들게 될 위험 요소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인민 또는 사회가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것은 추상적인 표현일 뿐 결국 누군가가 공장과 기계와 원료를 처분하고 운영하고 생산품을 관리하고 거기서 생기는 소득을 분배하는 일과 관련된 결정을 내리고 집행해야 한다. 개인 소유이건 국가 소유이건 생산수단 처분과 생산물 분배에 관한 결정권이 소유권의 핵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나라 노동자 농민은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정부가 정한 값에 농산물을 공출해야 했고 노동자들은 국가에서 결정한 임금을 받으면서 위에서 내려온 생산목표량을 채워야했다. 요컨대 노동자 농민은 자기가 만든 생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자본가가 아니라 국가에서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혁명가들의 바람과는 달리 사회적 연대감과 사회주의 혁명의식이 모든 사람을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게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공포정치에 숨죽인 국민들은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당과 관리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민들은 직장에서는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실제로 이익이 되는 일에 매달렸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소련 경제의 침제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1978년 소련 농민들은 전체 경작면적의 3%도 안 되는 자기 집 텃밭에서 나라 전체 생산량의 각각 61%, 29%, 34%나 되는 감자와 채소와 쇠고기를 생산했다. 농민들이 그것을 시장에 자유롭게 내다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 지도자들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작업량에 따라 보너스를 주는 인센티브제도를 실시했지만 효과는 잠시뿐이었다. 

 문제는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제도에도 있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서는 어떤 재화를 얼마만큼 생산할지를 공산당 간부와 경제관료들이 결정했기 때문에 소비자의 욕구가 생산에 반영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기업 경영자들은 상부에서 정해준 생산목표만 채우기 위해 귀중한 인력과 자본을 마구 낭비했고 새로운 과학기술을 응용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따. 그래서 에너지와 철강과 곡물의 최대생산국인 소련에서 늘 원료와 에너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최첨단 항공우주기술을 자랑하였지만 가전제품의 품질은 형편이 없었따. 한마디로 생산자가 소비자를 지배하는 비효율적 체제였던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자마자 한 일이 알콜중독 퇴치사업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서 감동적으로 묘사한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청년 공산주의자들이의 눈물겨운 헌신과 자기희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인민들은 틈만 나면 술을 마셔댐으로써 괴로움을 잊어버리려 했다. 알콜중독은 이런 체제가 불러들인 사회병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은 1970년대까지 부지런히 자본주의 선진국을 추격했다. 그런데 그 거리가 미처 좁혀지기 전에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면서 동서 양진영 사이의 경제 수준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져 버렸다. 자본주의 선진국의 주력산업은 철강, 석탄, 기계제작, 금속, 화학공업에서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유전공학, 정보통신산업으로 옮아갔고 이러한 신산업과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은 스스로 이러한 신산업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고 자본주의 열강의 새로운 산업기술과 신소재 수출금지에 묶여 밖에서 도입할 수도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이 이등국가로 전락하였다"고 개탄하면서 서방세계와 평화공존을 추진하고 시장경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려 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동독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서독으로 넘어가 '탈출혁명'을 일으킨 것도 바로 자본주의 선진국 국민들이 누리던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공산당이 추진한 점진적 개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철벽처럼 보였던 그 체제는 한 귀퉁이가 헐리기 시장하자 무섭게 껌껌한 혼돈을 향해 곤두박질했다. 마치 날개 꺾인 새가 추락하는 것처럼. 

 1991년 8월 19일, 낡은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제거하려 들었다. 이 쿠데타는 '3일천하'로 끝났다. 고르바초프가 시골 별장에 묶여 지낸 사흘 동안 타고난 선동가 보리스 옐친이 사태를 장악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임명한 군과 정부와 공산당의 간부들이 쿠데탈를 공모한 사실을 약적으로 잡아 그를 밀어냈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공화국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아무도 이 '날개 없는 추락을' 막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를  선으로 사회주의를 악으로 규정한 보리스 옐친은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고 계획경ㅈ데를 단숨에 폐기하였다.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돈을 마구 찍어 대는 바람에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올랐고, 생산수준은 해마다 뒷걸음을 되풀이했다. 연방 안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각 공화국 경제는 연방 해체와 함께 해체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후 다시 나타난 매매춘은 이제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잡아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도시 호텔 주변에는 외국인을 유혹하는 창녀들이 득시글거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러시아 졸부들이 유럽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노름을 하고, 러시아 정부가 전쟁선포를 해야 할 정도로 세력이 큰 마피아 조직이 도처에 똬리를 틀었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세계지도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자본주의의 가장 천박한 증상이 판을 치는 혼돈스런 공화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국가의 통일과 사회적 분열 

 독일 통일을 두고 사람들은 '역사가 준 선물'이라고 한다. 더 노골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준 선물'이라고까지 한다. 독일 사람들이 통일운동이라 할 만한 일을 하지 않고도 통일을 이루었으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것을 '사고'라고까지 한다. 갑작스런 통일이 가져온 부작용이 한두 가지가 아닌 만큼 그도 그럴 듯하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독일 통일은 역사가 내린 선물도 아니며,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사고 또한 아니다. 그것은 반세기에 걸친 동서체제 경쟁의 필연적 귀결이며 20세기 인류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보여 주는 성적표다. 사회주의 나라들에게 첨단기술과 신소재 수출을 금지한 자본주의 열강의 정책을 탓해 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자본조의 열강의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 자체의 비효율과 국민의 창의성을 억압한 통치방식 때문에 제풀에 무너졌다. 그들이 택한 방신으로는 '사회주의 이상국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반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역사가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반면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거센 도전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옛 서독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를 자처한 동독 지도자들보다 실질적으로 더 사회주의 이상에 가까운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패전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우파인 기독민주당과 자유민주당 연립정권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초를 놓았다. 독일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낳은 19세기 자본주의의 결함을 인정했다. 단지 경제가 성장하고 실질소득이 높아진다고 해서 좋은 체제일 수는 없다. 생존능력이 있는 경제제도라면 그 이외에도 국민이 가진 사회정의의 관념을 결정적으로 침해해서는 안되며 성장과 더불어 생활안정을 보장하며 사회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독일 보수파의 견해였다. 

 서독은 동독을 흡수 통일한 만한 자격을 두루 갖춘 사회였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실업보험, 의료보험, 노후보험, 산재보험 등 각종 사회보장정책을 치밀하게 만들어 시행했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교육기관을 연방과 주정부에서 맡아 운영하며 대학에 이르기까지 등록금을 받지 않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 경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서류를 갖추어 내면 정부에서 부족한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 그래도 능력이 부족하거나 장애가 있으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큼 도와준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정치활동과 파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보장하고 대기업의 경우에는 감사위원회에 근로자 대표를 넣어 경경 내용을 알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다.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 사상 ·학문의 자유 등 시민적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정당정치와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도 별로 흠잡을 데 없이 가꾸어 놓았다.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을 핵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지키면서도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각종 정책을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물론 준비 없이 맞이한 통일에 부작용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이 뒤떨어져 경쟁력이 없는 동독기업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신탁관리청은 지난 몇 해 동안 무려 1만 개가 넘는 동독 국영기업을 정리하여 국내 외 투자가에게 팔아 넘겼고 여기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분단 이전에 동독에 집과 땅을 가지고 있었던 서독 사람들이 그 땅을 찾으려고 소송을 걸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10만 명, 250만 건이나 되었다. 독일 정부가 땅과 집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자 거기 살던 동독 시민들은 졸지에 거리로 나앉을 위험에 빠졌다. 해고를 모면한 동독 노동자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독에서 온 동료가 받는 임금의 3분의 2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슈타지와 협력했다는 이유로 동독 대학교수 4천 명이나 쫓겨났고, 같은 혐읠 쫓겨난 공무원과 군인들도 줄을 이었다. 동독 국영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거의 모두 실업자가 되었다. 시민운동이 전혀 없었던 탓으로 옛 동독 산업지역과 소련군 주둔지의 땅이 너무 심하게 오염되어 어떤 땅은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동 · 서독의 생활수준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동독 시민에게 주는 실업보험과 노후보험 지급금액을 배 이상 올려야 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 연방재정이 빠듯해지자 정부는 실업수당, 의료보험금, 양융보조금, 주택보조금, 재해보상금 등 복지예산을 크게 깎아 버렸다. 서독 납세자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는데도 복지는 오히려 줄어든다고 불평했다. 여기에다 1990년대 벽두부터 유럽을 휩쓴 불황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서독에서만 실업자가 250만을 넘어섰고 독일 전체로는 400만에 육박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터져 난민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여 먹여 살리느라고 연방재정은 더욱 빠듯해졌다. 그러자 대량 실업과 복지 감충이 외국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네오나치들이 독일과 터키 정부가 맺은 협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는 터키인을 폭행하고 밤중에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게 어려워지자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사람을 "돈만 밝히는 거만한 서독놈" 베씨라 욕하고,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을 "일은 안 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동독놈" 오씨라고 비웃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독일이 국가의 통일과 동시에 사회적 분열을 얻었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며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 말처럼 천천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언제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한 판에 손익계산을 하느라 주판을 굴릴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열린 사회로 가는 길 

 사회주의혁명과 냉전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현대사는 독일과 더불어 그 막을 내렸다. 중국과 베트남은 여전히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상 우리가 과거에 알았던 그러한 사회주의는 아니다. 쿠바는 30년 넘게 끌어온 미국의 잔인한 무역금지조치에 목이 졸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북한은 이른바 핵카드를 지렛대 삼아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 반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마저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만든 사회주의 국가는 무너졌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생활의 불안정에 대한 항의와 비팡으로서 사회주의가 가진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겨제와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해 보려는 민주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독일 사회민주당은 통일 이전이나 마찬가지로 정권을 놓고 보수 기민당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한때 통일이 되면 금방 서독 사람처럼 잘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졌던 동독 시민들 사이에서는 옛 동독공산당을 계승한 민주사회당이 20% 가까운 지지를 얻고 있다.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서도 옛 공산등을 계승한 정당들이 최근 선거에서 잇달아 승리하였따. 

 러시아와 소련에서 떨어져 나간 독립공화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정당들은 하나같이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복지정책을 결합한 독일이나 북유럽식 경제체제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흔히들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한다. 문명 사회가 21세기에 어디로 나아갈지를 예측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제도와 정치체제에 관한 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시점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한 경제체제다. 혼합경제, 복지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등 그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시장기능을 무시하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물론이요,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 사회정의와 생활안정을 보장하지 않은 채 약육강식과 같은 자본주의 경쟁체제 역시 살아 남을 우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생이 달라지고,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바로 그 출발점부터 '출발기회의 불균등'에 편입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고, 자기 책임이 아닌 가난이나 장애 때문에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돈 많은 사람과 힘 없는 사람에게 법을 다르게 적용하는 그런 사회는 오래 살아 남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면 올바른 의견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힘 있는 집단의 압력 때문에 그릇된 법과 제도를 고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몰락과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의 모습이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은 비효율적인 경제체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안팎에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과 비판을 봉쇄하는 '닫힌 사회'였기 때문이다. 닫힌 사회는 그 사회의 밑둥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들기 전까지는 그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 이치에서 독일 사람들이 머지않아 통일 후유증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독일은 대부분의 정치세력과 사회집단이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과 참을성 있게 대화하고 소수집단의 목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느 열린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비용 타령을 하면서 통일을 걱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체제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 섞인' 흡수 통일 논리가 판치는 이 마당에 무척 한가한 소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 공산집단의 적화야욕 망상"도 아니요 "천문학적 통일 비용"도 아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관계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귀를 막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사회 분위기와 정치풍토와 법제도야말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며, 이런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북한은 닮은 꼴이다. 납북한이 제각기 안으로 열리지 않는다면 하나로 합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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