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내]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기대에 부흥할 만한 재미는 그닥 느끼지 못했다. 사실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 절판된 시공사 판 [높은 성의 사나이] 가격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적게는(?) 17500원, 22500원, 많게는 40000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는데도 현재까지 가격에는 변동이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얼마나 독자들이 오매불망 찾고 있는, 보고 싶어 하는 소설이길래 원가 8500원짜리 책이 이렇게도 뻥튀기 되어서 판매되는 것인가.



 
우리의 볼라뇨 역시 [괄호 치고]에서 이 소설에 대해 짤막하지만 한 마디 보태 내 기대에 불을 지폈다. "딕은 [높은 성의 사내]에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으로, 리얼리티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역사란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준다."(197쪽) 추천이라기보다는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페이지에선 이런 찬사를 보냈다. 딕은 "[높은 성의 사내]로 현대 미국 소설에 혁명을 일으켰다."(198쪽)





어쩌면 기대가 컸다기보다는, 필립 딕의 소설을 보며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이 너무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높은 성의 사내]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바라는 것이라곤, 머릿속이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유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취해버리기에 [높은 성의 사내]는 별다른 굴곡 없이 너무나도 멀쩡한(?) 소설이었다.





[주역]을 읽고 이 소설을 봤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을까.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은 [주역]에 많이 의존하면서 생활한다.

"주역은 점괘를 구하는 사람이 품은 더 근본적인 물음을 인식하고, 겉으로 드러난 질문에 답해주는 한편 알게 모르게 속에 숨은 의문에도 답을 줄 때가 많다"(40쪽), "3천 행이 넘는 주역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내용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전체 점괘는 길하다 할 수 있었다. / 어떤 쪽을 따라야 할까?"(90쪽)와 같이 주역을 수식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불안한 점괘가 섞여서 나오긴 했지만(...) 끝까지 창조적으로 일하는 거야. 최대한 열심히, 역동적으로 살아야지. (...) 점괘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어. 운명은 결국 어떻게든 우리를 쓰러뜨릴 테지만, 그때까지도 내겐 할 일이 있어."(92쪽)

실제 책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보더라도 작가가 [주역]에 많이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립 K. 딕은 1961년(...) 같은 해 [주역]을 처음으로 접한 뒤로 20여 년간 주역의 점괘를 참고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작가의 실제 생활은 이 책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심지어 이 책의 줄거리 일부는 [주역]으로 얻은 점괘를 참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445쪽) 흥미로운 일이다. 

(근데 "작가 연보"에선 [주역]을 [역경]이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게 맞는 거지?)


등장인물들은 [주역]과 더불어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소설도 읽는다. 물론 가공의 책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호손 아벤젠. [높은 성의 사내]에서 바로 그 사내이다. [메뚜기...]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1945년 이후 실제로 진행된 현대사와 비슷한 세상을 가상으로 다"룬다. 말하자면 "가상 소설 속 가상 소설인 셈"이다. "히틀러는 전범으로 체포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미국이 앞장서서 세계를 이상향으로 이끌고 있는 세상"(446쪽)이다.

줄리아나라는 인물은 작가인 호손 아벤젠을 찾아가 이렇게 묻는다.

"그럼 왜 그 책을 쓰셨죠?"(432쪽)

그러자 아벤젠이 이렇게 답한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 당신은 당신 비밀이 있고 나도 나름대로의 비밀이 있죠. 내 책을 읽었다면 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본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433쪽)

이들의 긴 대화는 결국 [주역]에 이르게 된다. 줄리아나가 이렇게 외친다.

"주역에게 묻습니다. 왜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책을 썼습니까? 우리는 뭘 배워야 합니까?"(439쪽)

줄리아나는 동전을 던지고, 그 결과를 종이에 적는다.

"상괘는 손巽이고 하괘는 태兌군."
"표를 보지 않고도 어떤 괘인지 아세요?"
"그렇소." 아벤젠이 말했다.
"중부中孚괘. '내면이 진실'이죠. 저도 책을 보지 않아도 알아요. 그리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죠." 줄리아나가 말했다.
(...)
"그러면 내 책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래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439-440쪽)

어쩌면 이것이, 필립 K. 딕이 [높은 성의 사내]라는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그냥... 발췌.


56쪽
줄리아나는 생각했다. 디젤이 특실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지? 바다를 건너는 배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지 몰라. 하지만 이곳에는 바다가 없지. 그래도 늘 방법은 있게 마련이야.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ㅡ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 할 텐데...


71쪽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과업이죠.

ㅡ 그렇다면 과연 소설의 과업은...? (그런 게 있으려나...)


74-75쪽
하지만 '미쳤다'는 건 무슨 뜻일까? 바이네스는 생각했다. 법적 정의 말이다. 무슨 뜻이지? 느껴지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도대체 뭐지? (...)
그는 그들이 저지르는 짓, 그들의 존재 자체가 미친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 그들이 다른 이들에 대해 무지한 것.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저지르는 짓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들이 야기했고 야기하는 파괴행위가 미친 짓이다. (...)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라 명예 자체를 중시한다. 관념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선善은 존재하나 좋은 사람은 없다. 공간과 시간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이곳'을 관통해 거대하고 깊은 어둠 속 불변의 존재들을 본다. (...) 미친놈들은 화강암, 먼지, 무생물이 되려는 열망에 부응한다. 그들은 '자연' 자체를 거들고 싶어 한다. (...)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가 되려 한다. 스스로 신의 권능을 가졌다고, 신과 같다고 믿는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지닌 근본적인 광기다. (...) 자만도 아니고 긍지도 아니다. 자아가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다."(74-76쪽)

ㅡ 광기, 미침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계속된다.


118쪽
소설이니까 대부분 꾸며낸 이야기죠. 재미있게 쓰지 않으면 아무도 안 읽을 테니까 말이에요. 흥미 위주로 쓴 부분도 있어요.

ㅡ 딕은 소설에서 '재미'라는 요소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닥 재미가 없었...


236쪽
일본이 지배하는 미국, 이라는 배경인 만큼 일본 문화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하이쿠, 와카도 등장한다. "봄비가 떨어지는데, 아이들은 갖고 놀던 공이 비에 젖은 채 지붕 위에 놓여 있네"(80쪽), "뻐꾸기 울음을 듣고는 / 그쪽을 바라보았다 / 소리가 나는 쪽에서 / 나는 무엇을 보았나? / 동 트는 하늘 위에는 창백한 달뿐"




ㅡ 처음엔 이 하이쿠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출처가 어딘지 궁금했다. 그래서 각주를 따로 달아주지 않은 역자와 편집자에게 투덜거렸는데 나중에 봤더니 책 서두 "감사의 말" 속에 작가가 직접 적어두었다.

"요산 부손이 지은 7880쪽의 하이쿠는 해롤드 G. 핸더슨이 번역한 것으로 도날드 킨이 편집하고 엮은 [일본 문학 선집 제1권](그로브 프레스 사, 1955, 뉴욕)에 실렸다.
  235236쪽에 등장하는 와카는 치요의 작품으로 다이세츠 T. 스즈키가 지은 [禪 그리고 일본 문화](판테온 북스 볼링겐 시리즈64, 1959, 뉴욕)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다."(4쪽)


"해봐. 직접 디자인하는 거야. 아니면 디자인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봐도 좋고. 멋대로 해보는 거야. 애들 놀이처럼."(88쪽)

ㅡ 딕은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




ㅡ 소설에선 여러 차례 "1860년에 생산한 콜트 44구경"이 등장하는데, (그리고 역시나 발사된다!) [총백과사전]에선 이 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콜트 모델 1860년형 육군 리볼버는 세 번째 모델인 드래군을 계승하는 총으로 남북전쟁 기간 중 양측에서 가장 폭넓게 사용되었다. 제조사인 콜트사에 따르면 1860년부터 1873년까지 약 20만 500정이 생산되었고 그중 미국 정부가 최소한 12만 7156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총은 충격 격발식 무기로 탄창 앞쪽의 장전기를 사용해 장전하는데, 가장 큰 특징은 즉각 발화가 가능한 종이 탄피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수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무게는 무거운 편으로 철 또는 강철로 만들어졌고 방아쇠울과 전방 지지대는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황동 날형 전방 가늠쇠와 공이치기 격발자에 있는 홈을 가늠쇠를 사용하여 조준한다. 장기간의 생산으로 많은 변형이 나왔지만 탄 구경은 0.44in로 구정되었는데 콜트 1861년형 네이비 모델(Navy Model 1861)의 0.36in 또는 0.44in 구경을 채택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70쪽)


158쪽
그런 능력은 자신처럼 고위직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 타인에 대한 직관력. 형식과 겉모습을 배제하고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

ㅡ 꼭 고위직이 아니더라도 이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83쪽
칠던은 직접 종이를 벗겨 선물을 보여주었다. 백여 년 전 뉴잉글랜드의 고래잡이배 선원들이 상아 조각에 그림을 새긴 것으로, 스크림쇼라고 부르는 작고 화려한 예술품이었다. 늙은 선원들이 시간이 남을 때 만들곤 했다는 공예품을 알아보고 두 사람은 얼굴이 환해졌다. 오래전의 미국 문화가 이보다 더 집약된 물건도 없을 것이다.

ㅡ 그러니까 스크림쇼라 함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출처: http://www.feelway.com/gv_today_1711237139.html)


191쪽
물론 많이 팔리는 책이 좋은 건 아니죠. 누구나 그건 압니다. 베스트 셀러는 대다수가 쓰레기니까요.

ㅡ 몇 십 페이지 뒤에는 앞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을 불러내는 소설의 힘은 위대한 거야. 아무리 싸구려 인기소설이라도 말이지."(218쪽)


192쪽
뉴올리언스 재즈는 진정한 진짜 미국 전통음악입니다. 이땅에서 생겨난 음악이죠. 다른 음악은 모두 유럽에서 건너왔습니다.

ㅡ 뉴올리언스 재즈라는 걸 듣고 싶은데 뭘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소개 좀...)





"당신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며 영어를 사용했으니 혹시 제가 책 읽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조금 까다로운 책이라 어렵네요. 1930년대에 미국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로버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귀한 책인데 어쩌다 구하게 됐습니다. 나다니엘 웨스트 작품이죠. 제목은 [미스 론리하츠]입니다. 재밌게 읽었지만 지은이가 뜻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
"유감입니다. 얇은 책인데요. 신문에 칼럼을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오랫동안 상담을 해주다 보니 그만 머리가 이상해져서 자신이 예수라는 환상에 빠지고 말죠. (...)" (198쪽)




222쪽
소설가들은 수없이 많은 속임수를 안다. 괴벨스 박사만 봐도 그렇다. 그도 시작은 같았다. 그도 소설을 썼다. 겉보기에 아무리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해도 누구나 내면에 숨은 욕망이 있다. 소설은 그 근본적인 욕망에 호소한다. 그래, 소설가들은 인간을 잘 알아.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이고 성적 본능에 지배당하며 겁을 집어먹은 채 흔들리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던지는지 잘 알지. 소설가는 그저 북을 울리기만 하면 돼. 그럼 저절로 반응이 일어나지. 그러면 웃으면서 얻은 것만 챙기면 되는 거야. (222쪽)

ㅡ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관 혹은 소설가관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267쪽
아코디언 밴드가 폴카인지 스코틀랜드 민속음악인지 모를 곡을 연주했다. 줄리아나는 두 가지 음악을 구별할 줄 몰랐다.
"천박하군."
음악이 끝나자 조가 말했다.
"내가 음악에 대해선 꽤 알지. 누가 위대한 지휘자인지 말해줄게. 당신은 기억 못하는 사람일 거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모르겠는데."
줄리아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이야. 하지만 나치는 전쟁이 끝나자 그의 정치관을 이유로 들어 지휘를 못하게 했어. 지금은 죽었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폰 카라얀은 마음에 안 들어. (...)"


276-277쪽
"나는 지식인이 아니야. 파시즘은 지식인 아니어도 괜찮아. 필요한 건 행동이야. 행동에서 이론이 생겨나지. (...) 사실 미국은 사생아처럼 생겨난 곁가지 신세지. 놈들은 정확히 말해 제국이 아니라 돈만 보고 사는 나라에 불과해. 영혼이 없으니 당연히 미래도 없어. 발전도 없지. (...) 무솔리니 총통이 쓴 글 읽어본 적 있어? 영감이 넘쳐. 멋진 사람이야. 문장도 훌륭해. 모든 사건의 근원이 되는 현상을 잘 설명하지. (...) 게르만인의 기질에는 철학이 지나치게 많아. 연극적 요소도 강하고. 툭하면 집회잖아. 진정한 파시스트는 입으로 떠드는 법이 없어. 행동하지.(...)"


296쪽
폴의 사무실은 작지만 현대적이고 수수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멋진 복제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목계(*牧谿 송나라 말 원나라 초의 승려 화가)가 그린 호랑이 그림은 13세기의 걸작이었다.

ㅡ 목계가 그렸다는 호랑이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으나 여의치 않았고 대신 다음 블로그를 발견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411&logNo=60129454323



ㅡ [갤러리 페이크]란 만화책에 소개된 목계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는데 현재 이 만화책은 전부 품절이다. 소장해두면 좋을 것 같은데. 만화방에는 있으려나... 어쨌거나, 중국 화가가 그린 그림을 미국 소설가가 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어 일본 만화가가 그린 만화를 통해 보게 되다니...




393쪽
이제 내게 말해봐. 다고미는 장신구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나를 옭아맸어.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하얀 빛,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 나오는 사후세계에서나 보이는 빛의 목소리를 듣고 싶군. 하지만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397쪽
사후세계다. 다고미는 생각했다. 뜨거운 바람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건 환상이야. 무슨 환상이지? 영혼이 이걸 견딜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사자의 서]를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죽고 나서도 다른 이들을 감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모든 이는 각자 혼자다. 어느 쪽을 봐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끔찍한 여행. 고통과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세계는 혼란에 빠져 달아나려는 영혼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망상들.




[높은 성의 사내]를 보니 무라카미 류의 [오 분 후의 세계]가 떠올랐다. (왜 이 소설은 재출간이 안 되는 걸까.) 알라딘엔 책소개가 따로 없고 대신 [장정일의 독서일기2]에 류의 소설이 소개됐다는 정보만 나와 있었다. [독서일기2]를 뒤져보니 중반 좀 지나서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미학사 판이라 범우사 판과 페이지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몇 군데 발췌.

"[오분 후의 세계]는 이십 년 가까운 작가 생활 끝에 류가 자신의 대문자를 공표한 소설이다. 도쿄 시민인 오다기리는 아침 조깅 중에 타임 슬립(Time Slip)되어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로 월장한다. 그곳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부터 전혀 다른 시간이 진행된 세계로 두 개의 원폭을 맞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2,200m의 깊이에 파 놓은 지하 도시로 합참본부가 도피한 이후 오늘까지 열도를 점령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과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일본. 대개의 역사 대체 소설은 현실을 원본으로 하여 가상의 세계를 탐험한 주인공이 원래의 현실로 복귀하는 데 반해 이 소설은 가상의 세계가 원본으로 제시되며 도리어 현실이 고려되어서는 안 될 허구로 치부된다."(168쪽)

"주인공은 귀환해서 현실세계의 소시민이 되기보다 일본 해방의 전사가 되기를 선택하는데 바로 그 부분에, 현재의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다고 늘 주장해 왔던 작가의 호소가 개입해 있다. 비록 무력점령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식민지나 다름없다는 것이 무라카미 류의 일본의 미국 식민지론 요지이다."(169쪽)

"류처럼 대문자를 발견한 작가의 운명은 이제 무엇일까? 그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기껏 역사소설을 빌어 자신의 신념을 간증하지 않을까? 진정 위대한 작가는 자신의 대문자를 파괴해야 한다. 큰 작가가 난해하고 중층적인 것은 그처럼 자신의 의도를 자꾸 배반하기 때문이다."(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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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9-23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류는 문장을 쓸 줄 알지. 그래서 (그 이후로) 시시한 것들만 써도 소설이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되는 모양이지만... 근데 난 이 짧은 문장을 끝내는 것도 힘들기만...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23 02:16   좋아요 0 | URL
이런 건 그냥 하이쿠로 끝내버리면... 내게 왜 이러는지 오늘 했던 말 저 하늘 위로...

치니 2011-09-2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23 14:08   좋아요 0 | URL
호오가 뚜렷하게 갈릴 것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필립 K. 딕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테면 분열증적 현상이나 도취 상태 등을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독자들에게 이식시켜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를 떠나서 머릿속이 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든다. 근데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다.


다음은 [화성의 타임슬립]을 읽으며 떠올랐던 단상, 혹은 작가나 책들.


61쪽
뉴 이스라엘 거류지 북쪽에 있는 와이즈만 비행장을 햐해 헬리콥터를 몰면서 슈타이너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원래는 오토를 못 따라오게 하려고 적당히 꾸며댄 말이었고, 결코 본심이 아니었다. 그가 느끼는 진짜 감정과도 상반되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치심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B-G 캠프에 결함이 있는 아들을 맡겨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수치심이란 도대체 얼마나 강한 충동이길래, 나로 하여그 그런 얼토당토않는 말까지 늘어놓게 만드는 것일까.



ㅡ 수치심과 관련된 에밀 시오랑의 글을 최근에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썼다. "작가의 '영감의 근원'은 바로 그 자신의 수치심이다. 자신 속에서 수치심을 보지 못하거니 회피한다면, 표절작가가 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출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독설의 팡세]나 [절망의 끝에서]에 나오지 않나 싶은데 현재로선 두 책 다 절판 상태라 일부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93쪽
묘한 일이다. 누군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자책하고 책임을 느껴야 하다니. 혹시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어떤 일을 했더라면...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니 모두 내 잘못이다. 이런 식이다.

ㅡ 지난 금요일에 만난 친구와 자살과 관련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날 본 이 책에서 이런 구절과 맞닥뜨려 기분이 이상했다.


117쪽
"양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디." 휘트록이 말했다. "먹이가 될 만한 것, 이를테면 옥수수 줄기 따위를 울타리 너머로 던져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니? 1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금세 알아차리고 달려온단다." 휘트록은 껄껄 웃었다. "양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똑똑해. 그런 걸 보면 진짜로 똑똑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 않니? 똑똑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제대로 간파할 줄 아는 사람이야. 똑똑하면 살아가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단다."

ㅡ 이 대목에서 나는 곧바로 가카가 떠올랐다. 물론 이 구절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똑똑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18쪽
그러나 잭 자신은 티칭머신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의 '공립학교'의 이념 자체가 그의 기질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을 일정한 틀, 그것도 지독하게 제한적인 틀에 넣어 새로 찍어내는 곳이다.


121쪽
'학교' 자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결론을 잭이 내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학교'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상을 벗어난 이변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였다. 이것은 강박증의 세계이며,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ㅡ 마치 지금 나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박증의 세계. 건강함과는 거리가 먼.


122쪽
신경증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실비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경증이란 의식적인 멈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삶을 동결시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는 행위라고나 할까.


148쪽
"난 이 곡의 LP판을 갖고 있어." 어니는 계속하며 말했다. "엄청나게 오래된 희귀판이라서 틀어볼 엄두도 못 내지만 말이야."
"LP"판이 뭡니까? 헬리오가발루스가 물었다.
"설명해줘도 어차피 넌 모를 거야. 글렌 굴드가 연주한, 40년이나 된 거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가보야. 이런 양손 교차 소나타 연주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는 사내였지."



ㅡ 스카를라티라는 이탈리아 작곡가의 건반 소나타 모음집인 것 같은데 들어본 적이 없으니 떠오르는 선율은 있을 리 없고... 대신 최근에 출간된, 글렌 굴드를 등장시키며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라고 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가 생각났다.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보자면,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회상과 성찰이 중심을 이룬다. 챕터 구분도 단락 구분도 없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하였고, 이것은 베른하르트의 특징인 장광설의 문체와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고 말하는 베른하르트는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장과 언어 파괴를 주요 기법으로 사용하는 그는 과장이야말로 글쓰기의 필수 요건이며 과장을 통한 현실 파괴와 언어 해체의 작업만이 상투적인 현실 고발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1쪽
죽음은 모든 사람을 동요하게 만들고, 평소에는 안 하던 일을 하게 만든다. 사람의 행위와 감정을 마치 수면 위로 파문이 퍼져나가듯이 밖으로 밖으로 파급시키며, 더 많은 사람들과 사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328쪽
광기란 무엇일까? 잭은 생각했다. 그에게 관기란 어딘가에서 만프레드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언제 그랬는지를 기억 못하는 일이었다. 어젯밤 어니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도린이 해준 얘기를 바탕으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하나씩 짜 맞춰본 뒤에야 어렴풋하게나마 전체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광기란 자기 삶의 정경이 어쨌는지 일일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ㅡ 그러니까 광기란,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현상을 말하는 건가...는 그냥 농담이고, 진부하지만 광기, 하면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모리스 블라쇼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중세에서 19세기까지 감금되는 광기에 관한 이야기이고, 더 심층적으로는 수용이라는 그런 구조의 연구를 통해 광기와 비이성 사이의 대화를 확립하려는 시도이며, 요컨대 완결되자마자 필연적으로 잊혀진 그 모호한 행위, 즉 '한계'의 역사이다. 하나의 문화는 어떤 것을 이 한계 쪽으로 배척하는데, 그것은 그 문화에 대해 외부가 된다."


338쪽
그는 헬리오가발루스가 읽고 있던 책을 집어 올렸다. "파스칼." 그는 소리내어 읽었다.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이런 책을 읽어준 이유가 뭐야? 아니, 이유가 있기는 해?"
"리듬 때문입니다." 헬리오가발루스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위대한 산문의 운율은 소년의 방황하는 주의력을 매료시키고, 붙들어매는 효과가 있습니다."



ㅡ 필립 K. 딕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스칼을 보며, 볼라뇨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필립 딕을 읽고 나서 파스칼을 읽었을 수도 있으려나... 어찌됐건 산문은 리듬이다! 생각난 김에 책장에서 [팡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혹시나 싶어 책 검색을 해봤는데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불과 며칠 전에 출간되었다! 물론 '위대한 산문의 운율'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다음 출판사 책소개를 보니 [팡세]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보는 게 좋겠다 싶다.

"이 작품에서 파스칼 특유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관점 제기, 그만의 독특한 필치가 없었더라면, 교리논쟁을 다룬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 문학사에 기록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대를 납득시키는 기술’과 ‘상대의 마음에 드는 기술’로 이루어지는 그의 설득술, ‘섬세의 정신’과 ‘기하학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수사학론은《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리’ 혹은 ‘진실’을 표현하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파스칼과 동시대를 산 라퐁텐느, 라브뤼에르, 라신느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심지어 볼테르를 거쳐 베르나노스, 모리악, 줄리앙 그린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작품이 갖는 의의는 무엇보다도《팡세》와의 관계에서 단적으로 가늠될 수 있겠다. 우선,《팡세》의 많은 부분이《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특히 ‘제주이트’, ‘진리와 폭력’, ‘기적’ 등에 관한 단편들은《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진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시기적으로도 두 작품이 쓰여진 해는 1656년에서 1658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팡세》가 파스칼이라는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의 관념적 산물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참여와 치열한 자기인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정확한 독서와 이해 없이는《팡세》의 올바른 이해 역시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349-350쪽
"잠깐만. 담뱃불 좀 붙이고." 실비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재떨이를 가져왔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위치를 바꾼 다음, 사건의 전말을 지극히 세세하게, 아슬아슬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필수 불가결한 창작을 덧붙여가면서 늘어놓았다.
놀랍게도 이렇게 얘기하는 일은 실제 경험만큼이나 즐거웠다.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ㅡ 어쩌면, 필립 K. 딕이 느끼는/생각하는 창작의 기쁨일지도...


409쪽
실비아는 강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생각했다. 내가 오늘 무턱대고 저질렀던 일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느꼈을 종류의 증오를 얘기하는 거로군. "잭ㅡ" 그녀는 어색하게 운을 뗐다.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결혼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
잭은 오랫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렇지 않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
"그렇지 않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실비아는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남편에게 마음을 읽힌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어떤 식으로든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



ㅡ 잭과 실비아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진다. 이 대화 부분을 읽고 있으려니 레이먼드 카버가 아주 강렬히 생각났다. 대화의 뉘앙스나 그 순간의 이미지가, 카버의 소설 속 일부와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버의 소설에서 나타나던 모호한 결말과는 달리 발췌해둔 구절에선 비교적 선명하게 끝을 맺는다.




며칠 전 본 홍상수의 [북촌방향]에서도 그렇거니와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선적이고 일회적인 시간 구성을 무너뜨리고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 구성이 보여지는데(물론 그 방식이나 이유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All You Nees Is Kill]이 언뜻 떠올랐다.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같은 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구성이 독특하다는 생각에 구해둔 기억만 난다.




마지막 장식은 역시(?) 볼라뇨. 볼라뇨는 [괄호 치고]에 있는 "필립 K. 딕"이라는 짧은 글에서 [화성의 타임슬립]에 대해 다음과 같아 간략하게 언급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가상 의식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글을 쓴 사람은 딕이 처음이다. 속도에 대한 인식, 엔트로피에 대한 인식, 천지만물의 아우성에 대한 인식에 관한 글을 쓴 사람 역시 딕이 처음이다. 처음이 아니라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이런 것들을 보여줬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미래의 묵시적인 예수와도 같은 자폐증 소년은, 역설적인 시간과 공간이나 우리 모두가 향하는 죽음에 대해 느끼고 고통 받는 데 자기 자신을 바친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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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9-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KD 걸작선 사고 싶다 사고 싶어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19 21:10   좋아요 0 | URL
오프라인 서점에서 한 권씩 신간 사서 보니까 할인 받지 못했다는 아까움이 반드시 봐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샤라락 변하는 것 같더... (먼산)
 





아이들에게 책/소설 읽는 즐거움을 어떻게 알려줘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아무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읽어주라는 대답이 주를 이루는 책이다. 그래서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나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에게 유용하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꼭 교사나 부모가 아니더라도,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좋아할 만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집필 목적이 어느 정도 선명하게 나타남과 동시에 소설(읽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책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었다.


162쪽
프랑스에서는 '읽다'를 속된 말로 '꼼짝없이 매였다'고 한다.

ㅡ 이 구절의 의미가 단박에 와 닿는 사람이라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184쪽
나는 어떤 여자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차창 밖으로 소설책 한 권을 던져버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유인즉슨 비평가들이 하도 격찬을 하는 바람에 비싼 돈을 주고 샀는데 내용이 너무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ㅡ 개인적으론 평론가들에 대한 불만을 이런 블로그에다 투덜거리는 게 전부인데, 책에서 인용된 것처럼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독자들도 있나보다.


204쪽
읽기를 포기하는 숱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만은 좀 더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렴풋이나마 패배한 느낌을 받아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다.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 자신보다 완강하게 느껴지는 무언가에 의해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을 가다듬고 책과 씨름을 해보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는다.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ㅡ 다니엘 페낙 같은 작가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위로 받는 기분이랄까. 페낙은 그렇게 덮어둔 책으로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말콤 라우리의 [화산 밑에서]를 꼽아두었다.

개인적으론, 가장 최근에 읽다가 덮어둔 존 케네디 툴의 [바보들의 결탁]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밖에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나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정도. (훨씬 더 많지만 우선 세 권 정도만...)





ㅡ 위에서 언급된 말콤 라우리의 [화산 밑에서]와 더불어,
26쪽의 "파스칼의 [팡세]라는 책에서..."라는 구절,
130쪽의 "옳거니, [슬픈 카페의 노래]가 좋겠군! 보아하니 학생은 카슨 매컬러스를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어디 한번 [슬픈 카페의 노래] 이야기를 해봐요."라는 구절,
131쪽 "[바보들의 음모]도 괜찮고 말고."(*[소설처럼] 원서를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아마 [바보들의 결탁]이 아닐까 싶은데... 아니면 어쩌나;;)라는 구절 들을 읽으며...

볼라뇨가 떠올랐다.





ㅡ 우선 (아직 한국엔 번역된 적이 없는 것 같은) 말콤 라우리. (* '맬컴' 라우리라는 이름으로, 문지에서 [화산 아래서]가 출간됐다.) 그의 글 일부가, 조만간 번역돼 나올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제사로 인용되어 있다.

// "당신은 멕시코의 구원을 원합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요." //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즈북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한) 찬사의 목록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 [화산의 위협 아래 Under the Volcano] 이후 멕시코에 관한 최고의 소설이다(...) // (15쪽)




ㅡ 카슨 매컬러스는 볼라뇨의 [괄호 치고]라는 에세이집(현재 알라딘에서 원서는 검색이 안 되고 영역본만 나온다)에서 "필립 K. 딕"이라는 짧은 글에서 살짝 언급됐던 작가이다.

// 딕은 카슨 맥컬러스처럼 진하게 고통을 그려낸다. 그러나 (*필립 K. 딕의) [발리스]는 맥컬러스의 그 어떤 소설보다 더 불안하다. //(198쪽)

툴의 [바보들의 결탁]은 볼라뇨가 "5000권에 버금가는" 다섯 권의 목록에 포함시켰던 책이다. 이후 다섯 권을 더 언급했는데 거기에 파스칼의 [팡세]도 있었다. [괄호 치고]에는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파스칼에 대해서 간략하게 코멘트를 했다.

// 플레이보이: 죽고 나면 누굴 가장 만나고 싶어요?
    볼라뇨: 전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아요. 만약 존재한다면 놀랄 것 같아요. 우선, 파스칼이 가르치는 어떤 수업이든 당장 등록할 거예요. //(366쪽)


오랜만에 볼라뇨 덕후다운 포스팅이었다. 헛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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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머가 여름 밤바다처럼 배어 있는 소설이다.
2. 고속도로가 아니라 지방도를 달릴 때의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3. 역자가 이세욱이라는 점은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 

 
19쪽
ㅡ "거기, 섬에서 느낀 건데... 주민들이 아주 정확한 어휘, 말하자면 전문가들끼리나 주고받을 만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아이들조차 말입니다. 무슨 얘긴지 잘 아시겠지만, 그들은 '거시기'나 '것' 같은 말은 쓰는 법이 없고, 그냥 '밧줄'하듯이 어떤 물건을 두루뭉술하게 일컫기보다는 '쐐기벌레 구제기', '이중 과수장(果樹牆)', '이물대 꼬재기'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23쪽
ㅡ 섬이라는 곳에서는 시간을 죽이기가 어렵다는 것, 세월에 맞서 싸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25쪽 
ㅡ "사나포선의 뱃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지요? 마음에 드는 어떤 외국 배가 있으면, 그들은 그 배를 세워 이것저것 조사한 다음, 그 선원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친구들을 대신 태웁니다. 그러고 나서는 가장 높은 돛대의 꼭대기에 자기들의 자기들의 국기를 게양하지요. 번역가도 그런 식으로 일합니다. 외국 책을 나포한 다음, 그 언어를 완전히 갈아 치우고 우리나라 것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책이 배라면 말은 그 배의 선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신가요? 


26쪽
ㅡ 따지고 보면 번역이란 외과 수술에 비할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번역가는 문장을 가르고 의미를 잘라 내고 언어유희를 이식하며, 큰 것을 잘게 부수고 끊어진 것을 동여맨다.


55쪽 
ㅡ 출판인들은 우스꽝스러운 과장법이 수반되기 마련인 신간 소개용 팸플릿이나 광고지를 보내어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기벽을 지니고 있었다.


66쪽
ㅡ "그들은 나보코프 작품을 겨울에도 번역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보코프가 누굽니까? 나비들과 너무 가까이 지낸 탓에 그 종잡을 수 없는 교태를 문학에 차용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허전한 계절에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일을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출판사에서만 모르고 있어요.


67쪽
ㅡ 정원 역시 말들이 무더기무더기 널려 있는 난삽한 공간이다. 그곳을 산책하면서 식물의 이름을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은 어렴풋한 표면밖에 감상하지 못한다. 


132-133쪽
ㅡ 우리는 프랑스어를 화제의 중심에 놓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프랑스어의 갖가지 특성, 즉 그 율동과 울림, 그 한결같은 절도, 추상(推象)에 대한 그 고질적인 사랑, 여간해서 헝클어지지 않는 그 문법에 대해서. (...) 술기운이 떨어져서 다시 기가 죽어 있던 우리는 임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임에게 가장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다. 몽테뉴, 라퐁덴, 스탕달, 아폴리네르...
  

148쪽 
ㅡ 번역과 무선 통신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주선하는 소중한 중개자이며 항구적인 평화를 가꾸어 주는 거름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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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를 읽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왜 어리석은 일인지는 제발트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지도. 대부분의 외국작품 뒤에는 '옮긴이의 말'이나 '해설'이 실려 있는데 제발트의 책에 실린 '옮긴이의 말'처럼 무미건조해보이는 경우도 보기 드문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발트의 문장 때문이다. 그의 문장과 맞서서 무력해지지 않을 문장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트에 대해 몇 마디 끄적대려 하고 있다. (이제 굳이 '끼적거리다'고 하지 않아도 되구나!) 뭐든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고, 별 생각 없이;; 친구에게 내뱉은 말 때문이기도 하다.


제발트는, 김훈을 설명할 때면 연관 검색어처럼 단박에 떠오르는 '연필로 꾹꾹'이라는 진부한 수식이 진정 어울리는 작가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화려한 수사나 시적인 미문이나 선언적인 문장 들이 없어도 산문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그의 묘사 때문이리라. 묘사가 어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천대시 되는 요즘 시대에 제발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서사보다 훨씬 자극적인 묘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취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작은 단위의 유형명사/구체명사들이 오밀조밀 나열되어 있는 문장들에서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사실 제발트의 문장은 의미의 밀도가 높다. 하여 한 문장 한 문장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읽어나가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든 만큼 집중 했을 때 찾아오는 쾌감도 크다. 더불어 비극과 파국과 몰락을 바라보는 작가의 덤덤한 눈길이 더해진다. 슬픔 감정이 제거된 비극은 외려 아름답다. 그는 독자들에게 일회적인 눈물보다는 오래 지속될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그가 보여주는 비극은, 파국은, 몰락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발트의 책에는 그가 만난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해준 이야기가 나온다. 혹은 그가 떠올린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 들도 등장한다. 그것만 봤을 땐 일반적인 에세이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마치 윤활유처럼, 허구나 창작이라기보다는 기억의 의도적 왜곡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삽입된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이 과연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제발트를 읽으며 장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와 에세이라는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제발트라는 문학장르. 사실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기존의 문학장르가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자기만의 특성을 띠어왔다.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단순히 좋다 나쁘다 혹은 재밌다 별로다를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다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리고 아마도, 제발트를 다 읽은 독자라면,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의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서. 무엇이 더 좋은 번역이고 무엇이 더 올바른 번역인지 판가름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문장의 리듬에 대해서라면, 산문을 읽는 맛이라는 측면에서라면, 이재영의 번역이 나와 더 잘 맞았다.


현재까지는 [이민자들]이 가장 좋았다. 무지 탓에 놓친 부분이 많을 것이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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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