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내]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기대에 부흥할 만한 재미는 그닥 느끼지 못했다. 사실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 절판된 시공사 판 [높은 성의 사나이] 가격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적게는(?) 17500원, 22500원, 많게는 40000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는데도 현재까지 가격에는 변동이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얼마나 독자들이 오매불망 찾고 있는, 보고 싶어 하는 소설이길래 원가 8500원짜리 책이 이렇게도 뻥튀기 되어서 판매되는 것인가.



 
우리의 볼라뇨 역시 [괄호 치고]에서 이 소설에 대해 짤막하지만 한 마디 보태 내 기대에 불을 지폈다. "딕은 [높은 성의 사내]에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으로, 리얼리티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역사란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준다."(197쪽) 추천이라기보다는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페이지에선 이런 찬사를 보냈다. 딕은 "[높은 성의 사내]로 현대 미국 소설에 혁명을 일으켰다."(198쪽)





어쩌면 기대가 컸다기보다는, 필립 딕의 소설을 보며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이 너무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높은 성의 사내]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바라는 것이라곤, 머릿속이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유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취해버리기에 [높은 성의 사내]는 별다른 굴곡 없이 너무나도 멀쩡한(?) 소설이었다.





[주역]을 읽고 이 소설을 봤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을까.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은 [주역]에 많이 의존하면서 생활한다.

"주역은 점괘를 구하는 사람이 품은 더 근본적인 물음을 인식하고, 겉으로 드러난 질문에 답해주는 한편 알게 모르게 속에 숨은 의문에도 답을 줄 때가 많다"(40쪽), "3천 행이 넘는 주역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내용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전체 점괘는 길하다 할 수 있었다. / 어떤 쪽을 따라야 할까?"(90쪽)와 같이 주역을 수식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불안한 점괘가 섞여서 나오긴 했지만(...) 끝까지 창조적으로 일하는 거야. 최대한 열심히, 역동적으로 살아야지. (...) 점괘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어. 운명은 결국 어떻게든 우리를 쓰러뜨릴 테지만, 그때까지도 내겐 할 일이 있어."(92쪽)

실제 책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보더라도 작가가 [주역]에 많이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립 K. 딕은 1961년(...) 같은 해 [주역]을 처음으로 접한 뒤로 20여 년간 주역의 점괘를 참고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작가의 실제 생활은 이 책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심지어 이 책의 줄거리 일부는 [주역]으로 얻은 점괘를 참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445쪽) 흥미로운 일이다. 

(근데 "작가 연보"에선 [주역]을 [역경]이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게 맞는 거지?)


등장인물들은 [주역]과 더불어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소설도 읽는다. 물론 가공의 책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호손 아벤젠. [높은 성의 사내]에서 바로 그 사내이다. [메뚜기...]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1945년 이후 실제로 진행된 현대사와 비슷한 세상을 가상으로 다"룬다. 말하자면 "가상 소설 속 가상 소설인 셈"이다. "히틀러는 전범으로 체포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미국이 앞장서서 세계를 이상향으로 이끌고 있는 세상"(446쪽)이다.

줄리아나라는 인물은 작가인 호손 아벤젠을 찾아가 이렇게 묻는다.

"그럼 왜 그 책을 쓰셨죠?"(432쪽)

그러자 아벤젠이 이렇게 답한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 당신은 당신 비밀이 있고 나도 나름대로의 비밀이 있죠. 내 책을 읽었다면 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본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433쪽)

이들의 긴 대화는 결국 [주역]에 이르게 된다. 줄리아나가 이렇게 외친다.

"주역에게 묻습니다. 왜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책을 썼습니까? 우리는 뭘 배워야 합니까?"(439쪽)

줄리아나는 동전을 던지고, 그 결과를 종이에 적는다.

"상괘는 손巽이고 하괘는 태兌군."
"표를 보지 않고도 어떤 괘인지 아세요?"
"그렇소." 아벤젠이 말했다.
"중부中孚괘. '내면이 진실'이죠. 저도 책을 보지 않아도 알아요. 그리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죠." 줄리아나가 말했다.
(...)
"그러면 내 책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래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439-440쪽)

어쩌면 이것이, 필립 K. 딕이 [높은 성의 사내]라는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그냥... 발췌.


56쪽
줄리아나는 생각했다. 디젤이 특실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지? 바다를 건너는 배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지 몰라. 하지만 이곳에는 바다가 없지. 그래도 늘 방법은 있게 마련이야.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ㅡ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 할 텐데...


71쪽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과업이죠.

ㅡ 그렇다면 과연 소설의 과업은...? (그런 게 있으려나...)


74-75쪽
하지만 '미쳤다'는 건 무슨 뜻일까? 바이네스는 생각했다. 법적 정의 말이다. 무슨 뜻이지? 느껴지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도대체 뭐지? (...)
그는 그들이 저지르는 짓, 그들의 존재 자체가 미친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 그들이 다른 이들에 대해 무지한 것.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저지르는 짓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들이 야기했고 야기하는 파괴행위가 미친 짓이다. (...)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라 명예 자체를 중시한다. 관념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선善은 존재하나 좋은 사람은 없다. 공간과 시간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이곳'을 관통해 거대하고 깊은 어둠 속 불변의 존재들을 본다. (...) 미친놈들은 화강암, 먼지, 무생물이 되려는 열망에 부응한다. 그들은 '자연' 자체를 거들고 싶어 한다. (...)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가 되려 한다. 스스로 신의 권능을 가졌다고, 신과 같다고 믿는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지닌 근본적인 광기다. (...) 자만도 아니고 긍지도 아니다. 자아가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다."(74-76쪽)

ㅡ 광기, 미침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계속된다.


118쪽
소설이니까 대부분 꾸며낸 이야기죠. 재미있게 쓰지 않으면 아무도 안 읽을 테니까 말이에요. 흥미 위주로 쓴 부분도 있어요.

ㅡ 딕은 소설에서 '재미'라는 요소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닥 재미가 없었...


236쪽
일본이 지배하는 미국, 이라는 배경인 만큼 일본 문화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하이쿠, 와카도 등장한다. "봄비가 떨어지는데, 아이들은 갖고 놀던 공이 비에 젖은 채 지붕 위에 놓여 있네"(80쪽), "뻐꾸기 울음을 듣고는 / 그쪽을 바라보았다 / 소리가 나는 쪽에서 / 나는 무엇을 보았나? / 동 트는 하늘 위에는 창백한 달뿐"




ㅡ 처음엔 이 하이쿠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출처가 어딘지 궁금했다. 그래서 각주를 따로 달아주지 않은 역자와 편집자에게 투덜거렸는데 나중에 봤더니 책 서두 "감사의 말" 속에 작가가 직접 적어두었다.

"요산 부손이 지은 7880쪽의 하이쿠는 해롤드 G. 핸더슨이 번역한 것으로 도날드 킨이 편집하고 엮은 [일본 문학 선집 제1권](그로브 프레스 사, 1955, 뉴욕)에 실렸다.
  235236쪽에 등장하는 와카는 치요의 작품으로 다이세츠 T. 스즈키가 지은 [禪 그리고 일본 문화](판테온 북스 볼링겐 시리즈64, 1959, 뉴욕)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다."(4쪽)


"해봐. 직접 디자인하는 거야. 아니면 디자인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봐도 좋고. 멋대로 해보는 거야. 애들 놀이처럼."(88쪽)

ㅡ 딕은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




ㅡ 소설에선 여러 차례 "1860년에 생산한 콜트 44구경"이 등장하는데, (그리고 역시나 발사된다!) [총백과사전]에선 이 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콜트 모델 1860년형 육군 리볼버는 세 번째 모델인 드래군을 계승하는 총으로 남북전쟁 기간 중 양측에서 가장 폭넓게 사용되었다. 제조사인 콜트사에 따르면 1860년부터 1873년까지 약 20만 500정이 생산되었고 그중 미국 정부가 최소한 12만 7156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총은 충격 격발식 무기로 탄창 앞쪽의 장전기를 사용해 장전하는데, 가장 큰 특징은 즉각 발화가 가능한 종이 탄피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수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무게는 무거운 편으로 철 또는 강철로 만들어졌고 방아쇠울과 전방 지지대는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황동 날형 전방 가늠쇠와 공이치기 격발자에 있는 홈을 가늠쇠를 사용하여 조준한다. 장기간의 생산으로 많은 변형이 나왔지만 탄 구경은 0.44in로 구정되었는데 콜트 1861년형 네이비 모델(Navy Model 1861)의 0.36in 또는 0.44in 구경을 채택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70쪽)


158쪽
그런 능력은 자신처럼 고위직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 타인에 대한 직관력. 형식과 겉모습을 배제하고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

ㅡ 꼭 고위직이 아니더라도 이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83쪽
칠던은 직접 종이를 벗겨 선물을 보여주었다. 백여 년 전 뉴잉글랜드의 고래잡이배 선원들이 상아 조각에 그림을 새긴 것으로, 스크림쇼라고 부르는 작고 화려한 예술품이었다. 늙은 선원들이 시간이 남을 때 만들곤 했다는 공예품을 알아보고 두 사람은 얼굴이 환해졌다. 오래전의 미국 문화가 이보다 더 집약된 물건도 없을 것이다.

ㅡ 그러니까 스크림쇼라 함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출처: http://www.feelway.com/gv_today_1711237139.html)


191쪽
물론 많이 팔리는 책이 좋은 건 아니죠. 누구나 그건 압니다. 베스트 셀러는 대다수가 쓰레기니까요.

ㅡ 몇 십 페이지 뒤에는 앞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을 불러내는 소설의 힘은 위대한 거야. 아무리 싸구려 인기소설이라도 말이지."(218쪽)


192쪽
뉴올리언스 재즈는 진정한 진짜 미국 전통음악입니다. 이땅에서 생겨난 음악이죠. 다른 음악은 모두 유럽에서 건너왔습니다.

ㅡ 뉴올리언스 재즈라는 걸 듣고 싶은데 뭘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소개 좀...)





"당신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며 영어를 사용했으니 혹시 제가 책 읽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조금 까다로운 책이라 어렵네요. 1930년대에 미국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로버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귀한 책인데 어쩌다 구하게 됐습니다. 나다니엘 웨스트 작품이죠. 제목은 [미스 론리하츠]입니다. 재밌게 읽었지만 지은이가 뜻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
"유감입니다. 얇은 책인데요. 신문에 칼럼을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오랫동안 상담을 해주다 보니 그만 머리가 이상해져서 자신이 예수라는 환상에 빠지고 말죠. (...)" (198쪽)




222쪽
소설가들은 수없이 많은 속임수를 안다. 괴벨스 박사만 봐도 그렇다. 그도 시작은 같았다. 그도 소설을 썼다. 겉보기에 아무리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해도 누구나 내면에 숨은 욕망이 있다. 소설은 그 근본적인 욕망에 호소한다. 그래, 소설가들은 인간을 잘 알아.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이고 성적 본능에 지배당하며 겁을 집어먹은 채 흔들리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던지는지 잘 알지. 소설가는 그저 북을 울리기만 하면 돼. 그럼 저절로 반응이 일어나지. 그러면 웃으면서 얻은 것만 챙기면 되는 거야. (222쪽)

ㅡ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관 혹은 소설가관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267쪽
아코디언 밴드가 폴카인지 스코틀랜드 민속음악인지 모를 곡을 연주했다. 줄리아나는 두 가지 음악을 구별할 줄 몰랐다.
"천박하군."
음악이 끝나자 조가 말했다.
"내가 음악에 대해선 꽤 알지. 누가 위대한 지휘자인지 말해줄게. 당신은 기억 못하는 사람일 거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모르겠는데."
줄리아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이야. 하지만 나치는 전쟁이 끝나자 그의 정치관을 이유로 들어 지휘를 못하게 했어. 지금은 죽었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폰 카라얀은 마음에 안 들어. (...)"


276-277쪽
"나는 지식인이 아니야. 파시즘은 지식인 아니어도 괜찮아. 필요한 건 행동이야. 행동에서 이론이 생겨나지. (...) 사실 미국은 사생아처럼 생겨난 곁가지 신세지. 놈들은 정확히 말해 제국이 아니라 돈만 보고 사는 나라에 불과해. 영혼이 없으니 당연히 미래도 없어. 발전도 없지. (...) 무솔리니 총통이 쓴 글 읽어본 적 있어? 영감이 넘쳐. 멋진 사람이야. 문장도 훌륭해. 모든 사건의 근원이 되는 현상을 잘 설명하지. (...) 게르만인의 기질에는 철학이 지나치게 많아. 연극적 요소도 강하고. 툭하면 집회잖아. 진정한 파시스트는 입으로 떠드는 법이 없어. 행동하지.(...)"


296쪽
폴의 사무실은 작지만 현대적이고 수수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멋진 복제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목계(*牧谿 송나라 말 원나라 초의 승려 화가)가 그린 호랑이 그림은 13세기의 걸작이었다.

ㅡ 목계가 그렸다는 호랑이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으나 여의치 않았고 대신 다음 블로그를 발견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411&logNo=60129454323



ㅡ [갤러리 페이크]란 만화책에 소개된 목계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는데 현재 이 만화책은 전부 품절이다. 소장해두면 좋을 것 같은데. 만화방에는 있으려나... 어쨌거나, 중국 화가가 그린 그림을 미국 소설가가 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어 일본 만화가가 그린 만화를 통해 보게 되다니...




393쪽
이제 내게 말해봐. 다고미는 장신구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나를 옭아맸어.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하얀 빛,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 나오는 사후세계에서나 보이는 빛의 목소리를 듣고 싶군. 하지만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397쪽
사후세계다. 다고미는 생각했다. 뜨거운 바람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건 환상이야. 무슨 환상이지? 영혼이 이걸 견딜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사자의 서]를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죽고 나서도 다른 이들을 감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모든 이는 각자 혼자다. 어느 쪽을 봐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끔찍한 여행. 고통과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세계는 혼란에 빠져 달아나려는 영혼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망상들.




[높은 성의 사내]를 보니 무라카미 류의 [오 분 후의 세계]가 떠올랐다. (왜 이 소설은 재출간이 안 되는 걸까.) 알라딘엔 책소개가 따로 없고 대신 [장정일의 독서일기2]에 류의 소설이 소개됐다는 정보만 나와 있었다. [독서일기2]를 뒤져보니 중반 좀 지나서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미학사 판이라 범우사 판과 페이지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몇 군데 발췌.

"[오분 후의 세계]는 이십 년 가까운 작가 생활 끝에 류가 자신의 대문자를 공표한 소설이다. 도쿄 시민인 오다기리는 아침 조깅 중에 타임 슬립(Time Slip)되어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로 월장한다. 그곳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부터 전혀 다른 시간이 진행된 세계로 두 개의 원폭을 맞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2,200m의 깊이에 파 놓은 지하 도시로 합참본부가 도피한 이후 오늘까지 열도를 점령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과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일본. 대개의 역사 대체 소설은 현실을 원본으로 하여 가상의 세계를 탐험한 주인공이 원래의 현실로 복귀하는 데 반해 이 소설은 가상의 세계가 원본으로 제시되며 도리어 현실이 고려되어서는 안 될 허구로 치부된다."(168쪽)

"주인공은 귀환해서 현실세계의 소시민이 되기보다 일본 해방의 전사가 되기를 선택하는데 바로 그 부분에, 현재의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다고 늘 주장해 왔던 작가의 호소가 개입해 있다. 비록 무력점령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식민지나 다름없다는 것이 무라카미 류의 일본의 미국 식민지론 요지이다."(169쪽)

"류처럼 대문자를 발견한 작가의 운명은 이제 무엇일까? 그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기껏 역사소설을 빌어 자신의 신념을 간증하지 않을까? 진정 위대한 작가는 자신의 대문자를 파괴해야 한다. 큰 작가가 난해하고 중층적인 것은 그처럼 자신의 의도를 자꾸 배반하기 때문이다."(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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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9-23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류는 문장을 쓸 줄 알지. 그래서 (그 이후로) 시시한 것들만 써도 소설이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되는 모양이지만... 근데 난 이 짧은 문장을 끝내는 것도 힘들기만...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23 02:16   좋아요 0 | URL
이런 건 그냥 하이쿠로 끝내버리면... 내게 왜 이러는지 오늘 했던 말 저 하늘 위로...

치니 2011-09-2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23 14:08   좋아요 0 | URL
호오가 뚜렷하게 갈릴 것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