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테면 분열증적 현상이나 도취 상태 등을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독자들에게 이식시켜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를 떠나서 머릿속이 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든다. 근데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다.
다음은 [화성의 타임슬립]을 읽으며 떠올랐던 단상, 혹은 작가나 책들.
61쪽
뉴 이스라엘 거류지 북쪽에 있는 와이즈만 비행장을 햐해 헬리콥터를 몰면서 슈타이너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원래는 오토를 못 따라오게 하려고 적당히 꾸며댄 말이었고, 결코 본심이 아니었다. 그가 느끼는 진짜 감정과도 상반되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치심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B-G 캠프에 결함이 있는 아들을 맡겨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수치심이란 도대체 얼마나 강한 충동이길래, 나로 하여그 그런 얼토당토않는 말까지 늘어놓게 만드는 것일까.
ㅡ 수치심과 관련된 에밀 시오랑의 글을 최근에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썼다. "작가의 '영감의 근원'은 바로 그 자신의 수치심이다. 자신 속에서 수치심을 보지 못하거니 회피한다면, 표절작가가 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출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독설의 팡세]나 [절망의 끝에서]에 나오지 않나 싶은데 현재로선 두 책 다 절판 상태라 일부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93쪽
묘한 일이다. 누군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자책하고 책임을 느껴야 하다니. 혹시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어떤 일을 했더라면...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니 모두 내 잘못이다. 이런 식이다.
ㅡ 지난 금요일에 만난 친구와 자살과 관련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날 본 이 책에서 이런 구절과 맞닥뜨려 기분이 이상했다.
117쪽
"양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디." 휘트록이 말했다. "먹이가 될 만한 것, 이를테면 옥수수 줄기 따위를 울타리 너머로 던져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니? 1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금세 알아차리고 달려온단다." 휘트록은 껄껄 웃었다. "양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똑똑해. 그런 걸 보면 진짜로 똑똑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 않니? 똑똑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제대로 간파할 줄 아는 사람이야. 똑똑하면 살아가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단다."
ㅡ 이 대목에서 나는 곧바로 가카가 떠올랐다. 물론 이 구절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똑똑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18쪽
그러나 잭 자신은 티칭머신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의 '공립학교'의 이념 자체가 그의 기질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을 일정한 틀, 그것도 지독하게 제한적인 틀에 넣어 새로 찍어내는 곳이다.
121쪽
'학교' 자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결론을 잭이 내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학교'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상을 벗어난 이변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였다. 이것은 강박증의 세계이며,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ㅡ 마치 지금 나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박증의 세계. 건강함과는 거리가 먼.
122쪽
신경증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실비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경증이란 의식적인 멈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삶을 동결시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는 행위라고나 할까.
148쪽
"난 이 곡의 LP판을 갖고 있어." 어니는 계속하며 말했다. "엄청나게 오래된 희귀판이라서 틀어볼 엄두도 못 내지만 말이야."
"LP"판이 뭡니까? 헬리오가발루스가 물었다.
"설명해줘도 어차피 넌 모를 거야. 글렌 굴드가 연주한, 40년이나 된 거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가보야. 이런 양손 교차 소나타 연주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는 사내였지."
ㅡ 스카를라티라는 이탈리아 작곡가의 건반 소나타 모음집인 것 같은데 들어본 적이 없으니 떠오르는 선율은 있을 리 없고... 대신 최근에 출간된, 글렌 굴드를 등장시키며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라고 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가 생각났다.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보자면,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회상과 성찰이 중심을 이룬다. 챕터 구분도 단락 구분도 없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하였고, 이것은 베른하르트의 특징인 장광설의 문체와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고 말하는 베른하르트는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장과 언어 파괴를 주요 기법으로 사용하는 그는 과장이야말로 글쓰기의 필수 요건이며 과장을 통한 현실 파괴와 언어 해체의 작업만이 상투적인 현실 고발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1쪽
죽음은 모든 사람을 동요하게 만들고, 평소에는 안 하던 일을 하게 만든다. 사람의 행위와 감정을 마치 수면 위로 파문이 퍼져나가듯이 밖으로 밖으로 파급시키며, 더 많은 사람들과 사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328쪽
광기란 무엇일까? 잭은 생각했다. 그에게 관기란 어딘가에서 만프레드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언제 그랬는지를 기억 못하는 일이었다. 어젯밤 어니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도린이 해준 얘기를 바탕으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하나씩 짜 맞춰본 뒤에야 어렴풋하게나마 전체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광기란 자기 삶의 정경이 어쨌는지 일일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ㅡ 그러니까 광기란,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현상을 말하는 건가...는 그냥 농담이고, 진부하지만 광기, 하면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모리스 블라쇼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중세에서 19세기까지 감금되는 광기에 관한 이야기이고, 더 심층적으로는 수용이라는 그런 구조의 연구를 통해 광기와 비이성 사이의 대화를 확립하려는 시도이며, 요컨대 완결되자마자 필연적으로 잊혀진 그 모호한 행위, 즉 '한계'의 역사이다. 하나의 문화는 어떤 것을 이 한계 쪽으로 배척하는데, 그것은 그 문화에 대해 외부가 된다."
338쪽
그는 헬리오가발루스가 읽고 있던 책을 집어 올렸다. "파스칼." 그는 소리내어 읽었다.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이런 책을 읽어준 이유가 뭐야? 아니, 이유가 있기는 해?"
"리듬 때문입니다." 헬리오가발루스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위대한 산문의 운율은 소년의 방황하는 주의력을 매료시키고, 붙들어매는 효과가 있습니다."
ㅡ 필립 K. 딕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스칼을 보며, 볼라뇨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필립 딕을 읽고 나서 파스칼을 읽었을 수도 있으려나... 어찌됐건 산문은 리듬이다! 생각난 김에 책장에서 [팡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혹시나 싶어 책 검색을 해봤는데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불과 며칠 전에 출간되었다! 물론 '위대한 산문의 운율'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다음 출판사 책소개를 보니 [팡세]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보는 게 좋겠다 싶다.
"이 작품에서 파스칼 특유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관점 제기, 그만의 독특한 필치가 없었더라면, 교리논쟁을 다룬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 문학사에 기록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대를 납득시키는 기술’과 ‘상대의 마음에 드는 기술’로 이루어지는 그의 설득술, ‘섬세의 정신’과 ‘기하학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수사학론은《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리’ 혹은 ‘진실’을 표현하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파스칼과 동시대를 산 라퐁텐느, 라브뤼에르, 라신느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심지어 볼테르를 거쳐 베르나노스, 모리악, 줄리앙 그린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작품이 갖는 의의는 무엇보다도《팡세》와의 관계에서 단적으로 가늠될 수 있겠다. 우선,《팡세》의 많은 부분이《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특히 ‘제주이트’, ‘진리와 폭력’, ‘기적’ 등에 관한 단편들은《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진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시기적으로도 두 작품이 쓰여진 해는 1656년에서 1658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팡세》가 파스칼이라는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의 관념적 산물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참여와 치열한 자기인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정확한 독서와 이해 없이는《팡세》의 올바른 이해 역시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349-350쪽
"잠깐만. 담뱃불 좀 붙이고." 실비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재떨이를 가져왔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위치를 바꾼 다음, 사건의 전말을 지극히 세세하게, 아슬아슬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필수 불가결한 창작을 덧붙여가면서 늘어놓았다.
놀랍게도 이렇게 얘기하는 일은 실제 경험만큼이나 즐거웠다.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ㅡ 어쩌면, 필립 K. 딕이 느끼는/생각하는 창작의 기쁨일지도...
409쪽
실비아는 강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생각했다. 내가 오늘 무턱대고 저질렀던 일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느꼈을 종류의 증오를 얘기하는 거로군. "잭ㅡ" 그녀는 어색하게 운을 뗐다.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결혼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
잭은 오랫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렇지 않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
"그렇지 않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실비아는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남편에게 마음을 읽힌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어떤 식으로든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
ㅡ 잭과 실비아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진다. 이 대화 부분을 읽고 있으려니 레이먼드 카버가 아주 강렬히 생각났다. 대화의 뉘앙스나 그 순간의 이미지가, 카버의 소설 속 일부와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버의 소설에서 나타나던 모호한 결말과는 달리 발췌해둔 구절에선 비교적 선명하게 끝을 맺는다.
며칠 전 본 홍상수의 [북촌방향]에서도 그렇거니와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선적이고 일회적인 시간 구성을 무너뜨리고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 구성이 보여지는데(물론 그 방식이나 이유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All You Nees Is Kill]이 언뜻 떠올랐다.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같은 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구성이 독특하다는 생각에 구해둔 기억만 난다.
마지막 장식은 역시(?) 볼라뇨. 볼라뇨는 [괄호 치고]에 있는 "필립 K. 딕"이라는 짧은 글에서 [화성의 타임슬립]에 대해 다음과 같아 간략하게 언급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가상 의식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글을 쓴 사람은 딕이 처음이다. 속도에 대한 인식, 엔트로피에 대한 인식, 천지만물의 아우성에 대한 인식에 관한 글을 쓴 사람 역시 딕이 처음이다. 처음이 아니라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이런 것들을 보여줬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미래의 묵시적인 예수와도 같은 자폐증 소년은, 역설적인 시간과 공간이나 우리 모두가 향하는 죽음에 대해 느끼고 고통 받는 데 자기 자신을 바친다."(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