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살다 살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은 처음이다. 읽다가 화가 나서 책을 덮고, 웹툰이나 만화책을 보았다. 그렇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이승만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철저히 이승만을 옹호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빙의해서 읽었다. 그래도 참, 해도해도 너무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굉장히 디테일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이승만의 행적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독부' 이승만, 이 말은 자유당 말기 심산 김창숙 선생이 칭한 것이라고 한다. 독부란,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남자라는 뜻이다. 독부, 독재자, 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그들 나름의 이유를 대면서 항변한다. 이승만의 행적을 통해 사람들이 각자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의 모든 행적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할 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행적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1.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2. 105인 사건으로 많은 애국지사가 시련을 겪었을 때 미국인 친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900명이 구속되고, 105명이 기소된 사건이고 그 중 미국인 24명이 구속되었다.


3. 1919년 2월 정한경과 "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4.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직과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대통령'으로 행세했다.


5. 1922년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의 독선적 행위과 독립자금의 사적 유용 등의 5개항 사유를 들어 대통령직에서 탄핵했다. 또 임정은 1925년 이승만이 위원장으로 있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했다.


6. 하와이 체류 중에 한인사회단체를 자기중심체제로 바꿔 교민사회를 분열시켰다.


7. 1946년 정읍 발언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8.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친일파를 중용하였다.


9. 제주 4.3 사건 때 관련 법률도 없는 게엄령을 선포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 후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적 제거와 언론 탄압에 활용했다.


10. 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북한의 남침에 전쟁이 발발하자 후방으로 이동하여 서울시민을 속이고, 죄 없는 양민들을 용공분자,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 이승만 정부 아래 자행되었던 많은 양민학살사건.


11. 한국전쟁 이후 제대로된 경제 정책이 없어 국민들은 경제난에 허덕이는데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면서 반공ㆍ독재체제를 강화하며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몰두했다. 그 것이 3.15 부정선거를 통해 극에 달했고, 결국 4.19혁명이 발생했다. 4.19 당시 학생시민들에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의 공적으로 여겨지는 외교독립론이 있다. 하지만 궁금한 점은 그가 외교독립론을 주장했지만,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외교적 성과가 있었다면, 왜 미국은 한국임정을 승인하지 않은걸까? 한국임정이 승인되지 않은 점이 오롯이 이승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의사소통도 되는 그가 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이승만은 외교를 통해 독립하고자 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현재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사는 사람이라고 상상을 해보면, 독립을 향한 방법에 있어 무장독립투쟁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버리면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 것을 꼭 친일과 연결시킬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보였던 언행(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 국내 학생들에게 반일운동보다 해외유학 권장 등)은 그가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보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의로운 일, 공익보다 권력 욕심이 더 앞섰던 사람인 것 같다. 그의 정읍 발언이나 1948년 5.10 총선거 때 상대 후보인 최능진의 입후보를 방해하고 무투표로 당선되었던 점을 보면 분명 권력욕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 때 가슴이 아팠던 역사가 있다. 상대 후보였던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출신인데, 한국전쟁 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쓰고 총살형을 당했다. 원통한 것은 최능진을 총살한 사람이 일본 관동군 출신 김창룡이다. 최능진 사건은 재심 소송을 통해 지난달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독립운동가가 독립 후에 그릇된 공권력 행사로 생명을 잃었다. 이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어떻게 보면 이승만은 권력욕이 있는 정치인이었고, 또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감각도 뛰어났던 것 같다. 그의 친일적인 언행은 하와이에 일본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장인환 의사의 통역 거부한 것도 미국 주류사회의 여론이 그에게는 중요했을 것이다. (예수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라...... 법에 근거하지 않고 행사했던 계엄령이나 4.19혁명 때 발포, 이승만 정부 하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문경양민학살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등에서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은 무엇일까?) 해방 이후 반소, 반공, 친미를 주장하며 미군부와 긴밀하게 지냈던 점, 미군용기를 타고 귀국했던 점 등은 그의 정치감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이런 정치감각이 개인의 욕심보다 국가를 위해 쓰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있는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4.19민주이념이란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시민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승만은 그 부당한 권력의 핵심이었던 독재자이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갔다. 시민들은 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그런데 다시 그의 동상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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