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칼럼] ‘못난 놈들아, 이제 다시 시작이다’
곽병찬칼럼
 
 
한겨레  
 








 

» 곽병찬 논설위원
 
맞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말하지 않아도 단박에 그 시름을 알고, 가슴속 불덩어리를 느끼고, 억지로 삼키는 눈물 콧물을 눈치챈다. 고향을 따질 필요도, 출신 성분을 가릴 필요도 없다. 그저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신경림 <파장>에서)일 뿐이다.

보기만 해도 흥겨우니, 남 탓할 겨를이 없다. 거짓말로 선동할 일도 없고, 남 돈 버는 데 배 아파 할 이유도 없다. 소주에 오징어, 막걸리에 참외, 그리고 따듯한 햇볕만 있으면 됐다. 아이들 배가 부르면 만족했고, 아이들 건강하면 그만이었다. 남들만큼 공부 못 시키는 게 가슴 아플 뿐. ‘강물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봄밤>에서)는 김수영의 충고는 애시당초 그들과 무관했다.

그러나 때론 위험하다. 새벽 인력시장 모닥불 옆에 웅크린 이들, 잠긴 공장 정문 앞에 서성이는 이들, 무료 점심배급소 앞에 줄지어 있는 못난이들이 모이면 위험하다. 100번씩이나 서류를 내고도 면접 한 번 보지 못한 못난 청년 백수가 어깨를 맞대면, 갓난 송아지 보고 한숨부터 짓는 못난 농부가 모이면 위험하다. 지금 그들에겐 ‘긴 여름해 저물어,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며 돌아갈 곳도 없다.

원래 못난 놈들의 눈물엔 화약 성분이 있었다. 치명적인 폭발력과 독성이 있다. 가난하다고 터지는 게 아니다. 잘난 놈의 위선과 거짓과 기만과 파렴치가 문제다. 태풍도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작은 떨림에서 시작하는 법. 새털보다 가벼운 눈송이가 눈사태를 일으킨다. 그 눈물이 하나둘 모이면 태풍도 되고 쓰나미도 되는 것이다. 왕조가 바뀌고 정권이 엎어진 것도 그 때문이고, 민주공화국도 그렇게 세워졌다.

시작은 언제나 작고 보잘것없었다. 학교 앞 아스팔트에 쪼그려 앉아 수업하는 선생님과 아이들에게서 비롯된다. 헤어지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눈물방울이 모여 시작했다. 직장다운 직장에 다녀보지 못한 못난 동생들이 아스팔트 위로 내딛는 발걸음에서 시작한다. 펜을 잃은 기자들이 거리에 누우면서 시작한다. 지난 6월 광장의 찬란한 행진도 어린 누이가 켜든 작은 불씨에서 시작했다.

시인 강은교는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우리가 물이 되어>에서)라는 꿈을 노래했지만, 못난 놈은 천성이 물이다. 애써 마음을 내지 않아도 그들은 죽은 나무 뿌리까지 적시며 흐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야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을 쓰다듬고 있나니.”

겨우 1년 만이다. 못난 놈들에게 그나마 힘이 되었던 민주주의는 빈사상태다. 마구잡이로 쪽박마저 깨도록 노동관계법을 개악하고, 항의도 저항도 못하도록 집시법을 개악하고, 정보기관의 무제한 사찰을 허용하려 한다. 반면 3%만을 위한 교육·의료·조세·경제 정책 등 그들의 철옹성은 높아만 간다. 방송까지 독재자들을 찬미하던 족벌언론과 재벌에 넘기려 한다. 그들은 지금 독재자의 전철, 즉 장기집권을 위한 진지 구축에 나선 것이다. 그것도 박정희가 19년에 걸쳐 쌓아올린 파시즘의 성채를 불과 1년 만에 세우려 한다. 그러니 어떻게 물이 되어 만나기를 기약할 수 있을까.

그 꼴을 보면서도 물타령을 마저 하는 이유는 하나, 내일이면 새해이고, 이제 희망의 솟대 하나 세워,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만 리 밖의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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