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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관광청을 주로 홍보하는 마케팅 업체의 이모 부장을 최근 만났다. 서로 일본 다녀왔다는 수다가 이어졌다. '어디서 뭘 쇼핑했다'고 늘어놓기엔 민망하고, 어느 정도 문화적 내공을 앞세우려는 30대 이상 사이에서 몇 년 전까지 '일본 갔다 왔다'고 하면, 롯폰기 힐스 "'모리 미술관' 가봤어요?", "가 봤지요"가 정해진 대화 수순. 지난 1월 이후로는 "롯폰기의 '국립신(新)미술관'가 봤냐"가 단골 질문이 됐다.
"거기 식당 끝내주죠? 아트숍도 근사하고. 그런데 너무 스타일링에만 힘 준 것 같아요(이렇게 토 다는 것도 '문화적'임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특징)." "요즘 미술관은 패션이죠, 뭐. 대형 쇼핑몰과 주상복합 빌딩을 띄우는데 미술관이야 말로 확실히 폼 잴 수 있는 도구니까." 그러고 보면, 이번에 도쿄에 들어선 복합시설 '미드타운'도 은근히 산토리 미술관과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디자인 전시장을 갖췄으므로 '우리는 (쇼핑몰 들어선 상업공간이 아니라)문화공간'이라는 식이다. "스타 건축가를 앞세운 최신 미술관에 갈 때마다, 다리가 아파 '이제 그만'을 외칠 때까지 그림을 보고 또 보는 유럽 미술관에 가고 싶어지죠."
'미술관은 역시 유럽' '뉴욕도 좋다'식의 '맞아 맞아' 대화가 이어지던 중 이모 부장이 하는 말. "제가 신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다가 볼펜으로 수첩에 메모를 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경비원이 다가 오더니 '볼펜으로 쓰지 말라'는 거에요. 혹시 실수나 사고로 작품에 손상이 갈까봐 그러나 보더라고요. 그러더니 너무 예쁜 연필을 주는 거 있죠. 손잡이에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디자인이 특이했어요."
어? 그러고 보니 나도 미술관에서 연필을 받은 적이 있다. 몇 년 전, 모리 미술관에서 '빅토르 앤 롤프'의 의상을 앞세운 패션전시회를 보던 중. '전시가 굉장히 재미있긴 한데, 음, 너무 상업적이군'이라고 잘난척하며 수첩에 볼펜으로 "역시 모리는 상업적"이라 적고 굵게 밑줄 긋는 순간, 경비원이 슥 다가왔다. 그리고 연필을 내밀었다. '아니 뭔 큰일 난다고 펜도 못 쓰게 해?'라는 짜증은 손가락만한 플라스틱 손잡이에 연필심이 살짝 꽂힌, 맘에 꼭 드는 연필 디자인을 본 순간 싹 사라졌다(스위스 등 일부 유럽 미술관에서도 연필을 준다고 한다).
'전시장에서는 관람객이 볼펜 사용을 자제하게 한다. 볼펜 발견 시, 그냥 스톱시키는 게 아니라 연필을 제공한다. 이 때 연필은 그냥 아무 문방구에서나 사온, 못 생기거나 특징 없는 것이면 안 된다. 미술관이라면 자고로 특별한 디자인의 연필을 제공해야 한다.' 뭐 이런 식의 대응 방법이 재미있다. 그런 일본적 겉치레와 '오바'가 여행의 색다르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