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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선물 받지 않았다면 외면했을 책이었다. 그냥 뻔한 여행잡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펼쳐드니, 나의 짧고 편협한 선입견에 일격을 가하며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여행을 떠났다는 것, 그것도 장기여행을 떠났다는 점만 빼면 우리주변에서 늘 찾아 볼 수 있는 참 평범한 사람들의 참 진솔한 글들로 가득하다. 삶도 여행과 다르지 않다는 걸... 몸소 실현하고 깨닫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지현은 행복하면서도 외로웠을지 모른다. 외롭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여행이 그런 것이고, 삶도 여행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문 68
살아가는 데,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에도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들은 참 겁이 많다.
항상 무엇인가를 바라거나 소유하지 않고도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본문 104
이루지 못할까 불안한 목표라는 것, 계획이라는 것, 결국 행복하고 싶어서인데... 그런 것이 행복한 삶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갖고 싶은 걸 다 정해놓고 갖지 못했을 때 실망하고 싶지 않아. 109
나와 다른 너를, 우리와 다른 그들을, 다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오만이고 자만이다. 그냥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 부터 배워야 한다.
다른 문화를 내가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세상에는 다 이유가 있어. 본문 264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나와 다른 건 당연한 거잖아. 나와 다르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어. 사람들을 나와 구별하려고 하면, 정작 힘들어지는 건 자기 자신이거든. 나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면 그냥 안아주는 거야. 본문 268
여행을 통해서 혼란한 마음에 질서가 잡히고, 어지럽던 사념이 정리된다고 한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순 뻥이다.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되기 일쑤다.
여행은 몸만 가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곳에 내놓고 지내던 마음까지 추스려 함께 가야 한다는 게 스님이 일러준 여행의 의미였다. 여행을 나섰다고 해서 바깥에 버려두었던 마음이 단숨에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몸이 떠나온 곳에 마음은 머물러 있거나 몸이 갈 곳에 마음이 횡하니 먼저 가버리기도 한다. 본문 281
그럼에도 우리는 한 번은 떠나보아야 한다.
내 앞에 문이 놓여있다. 문은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내가 과연 열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한번도 열어보지 않은 문이기에 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문을 연다는 게 어려울지 쉬울지 알 수 없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건 내 앞에 놓인 문을 열고 나가는 일이다. 문을 열려고 부딛쳐본 사람은 문을 열려는 시도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항상 불완전한 상태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여행이라면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길을 걸어가는 여정은 인생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여행을 떠난다. 배낭을 꾸린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자 도전이며,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여행을 통해 세상은 내가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곳임을 배우게 된다. 본문 311
물론 떠나지 않아도 좋다. 삶과 여행은 다르지 않으니...
여행하듯 살면 그만이다. 살아 가듯 여행하면 그만이다.
여행이 늘 도피로 느껴지는 건, 도피 한번 해보지 못한 자들의 시기심을 의심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피하라. 우리는 가끔 그렇게 도망쳐봐야만 도망치는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이 참을 수 없는 유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행이 중독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중독은 겸손을 배운다는 여행의 의미에 어긋난다. 여행을 다녀와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현실과 여행은 구별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떠난다고 영원히 현실로 돌아오지 않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도피라는 것을 알고 도피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두려움은 호주머니 속에 잠시 넣어두라.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을 위한 부정일 뿐이다. 본문 315
여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다만 여행 후 나의 일상은 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벅찬 것이 되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버리는 건 일상이 아니라 욕심일지도 모른다. 본문 316
당장 배낭을 싸고 싶었다. 물론 배낭 대신 50키로의 짐을 싸서 스위스로 날아오긴 했다. 나는 일상과 일상을 통과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길고 짧은 여행이길 바란다.
잊지 말자.
꼭 어딘가 멀리 떠나지 않아도 내 여행은 끝난 것이 아니며
꼭 일상 생활에 머무르지 않아도 내 일상은 계속 되고 있다는 것.
2006년 9월, 에미레이트를 타고 지구 반을 돌아 오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