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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평점 :

사형 선고 단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 나라. 1975년 4월 9일 새벽, 사법부가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잔인하게 빼앗을 수 있는지 보여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우리 현대사 최악의 조작이자 참혹한 사법 살인이었다. 희생자 故 우홍선 선생의 아내, 아흔세 살 강순희 여사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무엇일까.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네 아이의 어머니, 그리고 사형수의 아내. 그러나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를 덮고 나면 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는 결국 책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거도 재판도 조작된 사건으로 남편을 황망하게 잃은 날, 국가가 빼앗아간 것은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초등학교를, 전두환 시대에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 1학년 때 6월 항쟁을 겪은 나에게 이 책은 단순한 타인의 역사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삶의 시간과 겹쳐 보여주는 기록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 위에서 나아갔기에, 민주주의를 ‘피를 먹고 자라나는 가치’라 표현한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책이 슬픔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는 강순희라는 사람 때문이다. 남편을 잃은 뒤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남편 옥바라지를 갈 때도 선글라스를 쓰고 양장 옷을 빼입었다. "너는 울어도 웃는 것 같다"는 말처럼, 힘든 일 앞에서도 지나간 일에 매이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것은 슬픔을 감추기 위한 허세가 아니라, 국가 폭력 앞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결코 빼앗기지 않겠다는 가장 당당한 선언이었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며 사는 게 인생입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아요. 나한테 주어진 환경에서 내 힘껏 노력하고 살았으니까.”


아흔세 살 강순희의 목소리는 거대한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끝내 한 사람의 삶으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행복했다’거나 ‘불행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한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한 여성의 회고록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인간 존엄의 무게를 보여주는 숭고한 증언이다. 인간의 존엄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으며, 민주주의 역시 완성된 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강순희가 살아낸 것처럼.
사랑이 있었기에 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냈기에 역사는 기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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