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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거울 - 파국의 14세기, 흑사병, 백년전쟁, 그리고 움트는 혁명
바바라 터크먼 지음, 박중서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6월
평점 :

우리는 중세를 흔히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바바라 터크먼의 《먼 거울》을 읽고 나면 암흑은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6월 한 달을 꽉 채워 읽어내야 했던 700쪽이 넘는 이 거대한 가제본 벽돌책은 백년전쟁과 흑사병, 교황권 분열, 민중 봉기로 얼룩진 14세기를 치밀하게 복원하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가 마주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세계다.
터크먼은 실존한 귀족 앙게랑 드 쿠시 7세를 길잡이로 삼는다. 프랑스의 대영주이자 잉글랜드 왕실과 혼인으로 연결된 그는 전쟁과 궁정, 교회와 민중 사이를 오가며 혼란의 한복판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앙게랑이 아니다.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고, 기사도는 무너졌으며, 신앙은 권력 앞에서 갈라지고, 전쟁은 끝없는 약탈로 이어졌던 14세기 그 자체가 주인공이다. 방대한 사료를 유기적으로 엮어 한 시대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터크먼의 필력은 왜 그녀가 최고의 역사 스토리텔러로 불리는지를 증명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제목의 의미다. '먼 거울'은 단순히 오래된 과거를 뜻하지 않는다. 저자는 1970년대 전쟁과 냉전, 종말론적 공포 속에서 14세기를 거울 삼아 자신의 시대를 바라보았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그 거울 속에서 지독한 기시감과 익숙한 풍경을 발견한다. 전염병의 공포, 끝나지 않는 전쟁, 정치와 종교의 분열, 혐오와 음모론, 공동체의 붕괴까지.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은 끈질기게 되풀이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절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터크먼의 시선은 붕괴하는 질서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내고자 했던 저항의 순간들을 샅샅이 비춘다. 저자는 미국 인문학의 최고 영예인 '제퍼슨 강연'에서 〈인류의 더 나은 순간들〉을 말했듯, 인간을 "실수를 연발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끝내 '더 나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믿는다. 33년 넘게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해 온 나에게 이 대목은 깊은 위안으로 다가온다. 결국 역사를 읽는 일은 과거의 실패를 확인하는 오답 노트가 아니라, 절망을 견뎌낸 인간의 가능성을 배우는 과정이 된다.


6월 말 정식 출간을 앞둔 《먼 거울》은 중세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책이 아니다. 혼돈의 2026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적 시간여행이다. 14세기를 여행하고 돌아온 독자는 현재를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가장 먼 과거는 결국 가장 선명하게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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