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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평점 :

10대의 64%가 투표권보다 소셜 미디어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이 한 줄의 통계가 책의 문을 여는 순간, 독자는 이미 저자가 던지려는 질문의 무게를 감지하게 된다. 문화 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크리스틴 로젠은 이 책에서 기술 비판을 넘어 훨씬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경험들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책은 대면 소통, 손 글씨, 기다림, 감정, 쾌락, 공간이라는 여섯 가지 경험 영역을 차례로 해부한다. 구조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몸의 감각에서 출발해 공동체의 소멸로 끝나는 이 여정은, 기술이 단순히 편의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 존재의 층위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로젠이 가장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은 ‘매끄러움’의 역설이다. 빅테크 기업들이 약속하는 “자동적이고 수월하며 매끄러운” 세계는 실은 실패와 마찰을 제거한 세계다. 그런데 바로 그 실패와 마찰이 인간을 형성하는 핵심 재료였다.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낯선 길에서 길을 잃는 경험, 상대의 얼굴을 보며 말로 하지 않은 감정을 읽는 일. 이것들은 불편하지만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것들이다. 시몬 베유의 말처럼 “관심은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인데, 우리는 그 관대함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쾌락 기계’ 사고실험은 책의 논지를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다. 기계에 연결되었다는 기억 없이 무한한 쾌락을 느끼게 해주는 기계가 있다면 연결하겠는가. 대부분은 거부한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직관이 바로 로젠이 지키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교실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세상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점점 줄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면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현실의 마찰과 불완전함을 견디는 힘도 약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기술 비관론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경험의 멸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다”라고 말하며 개인의 각성을 넘어 공동체의 집단적 대응을 촉구한다.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 진보가 아니라, 혼란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인간다움이라는 역설. 이 책은 그 역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묻는 시대에 이 책은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는 일, 어쩌면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한 첫 번째 저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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