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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에 간 해설사 - 예의 공간에서 힐링의 공간으로
정병철 지음 / 바른북스 / 2026년 1월
평점 :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오르내리던 남계서원의 풍경은 늘 고요했지만, 그 공간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래된 나무기둥, 물빛이 고요한 연못, 왠지 모르게 엄숙한 기운만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서원에 간 해설사』를 읽고 나니 그때의 장면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이야기와 사상으로 연결된 의미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은 십여 년째 국가유산 해설사로 활동하며 서원과 고택을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봐 온 저자 정병철이, 3년 동안 1만 km를 달려 세계유산 9개 서원을 직접 기록한 결과물이다. 남계서원에 모신 일두 정여창의 후손답게, 그는 서원 앞에 앉아 세심하게 풍경을 헤아리고, 방문객이 무심히 지나치는 장면을 안타까워했다. 몇 마디 설명만으로 “아는 만큼 보이네요”라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언젠가 서원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의 씨앗이 자라나 결국 이 책이 되었다.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 ‘서원 여행 채비’는 여행을 떠나기 전 꼭 알아야 할 기초 개념을 차근히 정리한다. 서원의 역사, 제례, 공간 구성, 책판과 목판 인쇄 문화까지 어렵지 않게 풀어내 독자의 발을 가볍게 만든다. 이어지는 2부 ‘서원 여행’에서는 소수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남계서원·도동서원·옥산서원·돈암서원·무성서원·필암서원 등 9개 서원을 동부·남부·서부 권역으로 나누어 현장에서 해설하듯 안내한다. 그저 설명이 아니라, 실제로 걸어가며 어디서 멈추고 무엇을 바라볼지까지 경험적으로 알려주는 구성이다.
이 책의 백미는 ‘감상하게 하는 안내 방식’이다. 단순히 건물 이름과 연대를 나열하는 기존 안내서와 달리, 공간과 철학을 연결해 서원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열어준다. 전학후묘 배치가 ‘학문과 공경의 균형을 구현한 유교적 원리’라는 설명을 접하면, 서원이 구성하는 풍경 자체가 사상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두보의 ‘취병’과 연결하여, 붉게 물드는 절벽의 장관 속에서 누각 이름의 의미를 되짚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풍경 속에 담긴 철학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책 곳곳에는 해설사로서의 세심함이 살아 있다. 새벽에 도착해 바라본 서원의 모습, 해 질 녘의 고요, 동서재의 문 하나하나에 담긴 배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드론으로 촬영해 담아낸 시선까지. 저자에게 서원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정신 위에 지어진 공간’이며, 그 정신을 더 많은 이들이 느끼도록 돕는 것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이다.
읽고 나면 서원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쉽지만, 독자에게 남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 역시 책을 덮고 남계서원 풍영루에 다시 올라 연못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진다는 말이 이 책을 향한 최고의 설명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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