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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우리는 왜 평등을 외치면서 동시에 위계에 집착하는가? 이철승의 신작 《쌀 재난 국가》는 이 모순된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역사적 해답을 제시한다. 전작 《불평등의 세대》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불평등의 현주소를 분석했다면, 이번 책은 한반도의 고대국가 성립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추적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저자는 ‘쌀·재난·국가’라는 세 키워드로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발전 경로를 설명한다. 벼농사는 단순한 농업 방식이 아니라 강력한 국가와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요구하는 복합 체제였다. 홍수와 가뭄 같은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수리시설과 집단 노동이 필요했고, 이를 조직하는 관료제적 국가 권력이 발달했다. 쌀과 국가는 서로를 강화하며 공진화했고, 동아시아는 결국 ‘쌀 국가(rice state)’가 되었다.

이 벼농사 체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곱 가지 유산을 남겼다. 구휼국가와 공동노동, 표준화와 평준화 같은 긍정적 유산은 코로나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한국 사회가 마스크 착용과 자가격리를 자발적으로 지킨 이유를 단순히 시민의식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오랜 세월 벼농사 마을에서 형성된 ‘사회적 조율 시스템’과 ‘남 눈치 보기 문화’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부정적 유산은 훨씬 더 뚜렷하다. 연공서열 문화, 여성 배제, 시험 위주의 선발, 땅과 자산에 대한 집착은 지금도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구조화한다.
특히 연공제에 대한 분석은 이 책의 백미다. 저자는 연공제를 “기다릴 수 있는 자들끼리의 공모”라 규정하며, 그것이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차별의 핵심 원인임을 데이터로 입증한다. 나이와 연차에 따라 동일한 보상을 나누는 시스템은 정규직 내부에서는 연대 의식을 강화했지만, 세대 간·세대 내 불평등을 고착시켰다. 청년 세대가 안정적 직장을 얻기 위해 20대를 소모하는 현실이 바로 그 결과다.
부동산에 대한 분석 또한 날카롭다. 저자는 한국인의 부동산 집착을 투기 심리로만 보지 않는다. 벼농사 체제의 ‘땅에 대한 집착’과 ‘사적 복지 체제’가 현대 한국 사회의 복지국가 저발전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은 깊은 울림을 준다. 노후를 집 한 채로 대비하는 문화가 사회적 합의를 가로막았고, 그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율이라는 아이러니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책의 미덕은 진단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재난 대비 구휼국가에서 보편적 사회안전망 국가로”, “표준화의 조율에서 다양성의 조율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공제 철폐를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며, 직무 중심 임금제와 숙련 중심 평가로의 전환, 동료로서의 여성 인정, 복지국가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물론 모든 현상을 벼농사 체제로 설명하는 방식은 다소 과감하다. 밀농사 사회와의 대비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이 책은 한국 사회 불평등의 구조적 뿌리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드문 성취다.
“나이 많은 자가 세상을 리드하는 룰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는 저자의 진단은 날카롭다. 벼농사 체제의 긍정적 유산은 계승하되, 부정적 유산은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 《쌀 재난 국가》는 그 길을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나침반이 될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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