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 범죄 너머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낙관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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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법의 세계에서 인간은 대체로 유죄이고, 가끔 무죄지만, 그런 뻔한 것들로 세상이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년 차 검사 정명원의 시선은 차갑고 단정적인 판결문의 세계로부터 한 걸음 비껴 서 있다. 그는 시커먼 악도, 청명한 정의도 아닌 애쓰고 있는 평범한 이들의 얼굴을 마주한 경험을, 형사법의 틈바구니에 피어난 인간의 온기로 풀어낸다. 이 책은 '공소장 너머의 삶'을 이야기하는 한 검사 개인의 기록이자, 우리가 잊고 있던 질문-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3부로 구성된 책은 법과 사람 사이에서 겪은 다양한 순간들을 차근히 펼쳐 보인다. 1부는 사건의 외곽, 공소장의 여백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존속살해예비죄대신 특수협박죄로 방향을 튼 어느 어머니와 아들의 사건, 두부 공장에서 평생을 일했으나 횡령죄로 기소된 공장장의 삶, 범죄 피해자임에도 가해자의 생계를 걱정한 유족의 마음법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저자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다. 2부는 검사라는 직업과 조직 문화 안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성찰을 다룬다. 상사의 부당한 음주 강요, 민원실 옆방의 고독한 검사실에서 시작된 이끼 검사의 분투가 녹아 있다. 3부는 상주지청장 시절의 기억을 풀어낸다. '곶감 시티' 상주에서의 느리고 단단한 시간들, 법보다 사람을 먼저 품으려 애쓴 조직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지금, 정치적 맥락은 독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검찰 권력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고 검찰 공화국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 책을 받아들여야 할까. 정명원 검사는 분명 2,200명의 검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입증되는 세계와 입증되지 않는 세계가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말하며, 유무죄 이분법이 가릴 수 없는 삶의 결을 보여준다. 이 책은 검찰 제도에 대한 신뢰가 바닥난 시대에 검사도 인간이다라는 단순한 선언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연약한 종족에 대한 낙관을 버리지 않으려는 의지"에 가깝다.

 

정명원은 외곽주의자검사다. 특수부도, 공안부도 아닌 곳에서, 주류가 아닌 입장에서, 그는 자신이 겪은 법정과 검사실, 조직 문화를 담담히 풀어낸다. “나는 마치 무너져가는 성곽에 꽃을 심는 한가한 정원사가 아닌가 싶었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 성곽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되묻고, 결국 그 땅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은 단지 법조인의 에세이가 아니다. 법이 차갑고 무정하다는 통념에 맞서는 한 사람의 따뜻한 기록이다. 동시에 그 따뜻함이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지속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법이 놓친 것들, 법조인이 감당하는 것들, 그리고 그 틈을 채우려는 '애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기대해야 할 정의는, 냉정한 판결문 너머에서 고단한 삶을 오래 들여다보려는 이 연약한 낙관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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