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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ㅣ 千년의 우리소설 14
김시습 지음, 박희병.정길수 옮김 / 돌베개 / 2024년 12월
평점 :

조선 초기의 대표적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가 새로운 번역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작품은 1953년 이가원의 첫 번역 이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번역본이 나왔지만, 수준 높은 한문 문장과 복잡한 시구 때문에 오역이 적지 않았다. 이번 박희병, 정길수의 새 번역은 그동안의 오류를 바로잡고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오세신동'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김시습은 21세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책을 불태우고 출가했다. 8년간의 방랑 끝에 29세에 금오산 용장사에 정착한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그의 사상적 지향은 '심유적불'이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이는 마음은 유학이되 겉으로는 불자로 살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불교의 삼세인연설과 윤회설을 실체적 진리로 보지 않았으며, 도교의 미신적 측면도 비판했다.

『금오신화』에는 다섯 편의 환상적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 작품인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 근처에 사는 양생이 절의 부처와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여인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이야기다. 「이생규장전」은 이생이 담을 넘어 본 처녀와 사랑에 빠져 혼인을 하지만, 전쟁으로 이별하게 되고 재회 후 곧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사랑을 그린다. 「취유부벽정기」는 선비 홍생이 평양 부벽정에서 만난 기생과 하룻밤 시를 주고받으며 교감을 나누지만, 이후 그리움에 병들어 죽게 된다는 애절한 이야기다. 「남염부주지」는 박생이 저승을 방문하여 염라대왕과 대화를 나누는 환상적인 이야기이며, 「용궁부연록」은 어부가 용궁에 초대되어 잔치에 참석하는 신비로운 모험담이다.
이 작품들은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환상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절의'를 은유하는 장치다. 특히 첫 세 편의 작품에서 여주인공들이 폭력 앞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버리고, 남녀 주인공이 죽음 이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김시습이 평생 지켜온 절의의 가치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작품집은 장르상 전기소설에 속하는데, 산문 속에 다수의 시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 심리와 미묘한 감정을 표출하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된다. 새 번역본은 특히 이러한 시구들의 정확한 해석에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만강홍」이라는 사(詞) 작품의 경우, 구법에 맞춰 정확히 해석함으로써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흔히 한국 최초의 소설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금오신화』 이전에도 최치원의 「호원」이나 「최치원」, 「조신전」 등의 전기소설이 있었다. 그러나 『금오신화』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한층 성숙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고, 후대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6세기의 『기재기이』, 「원생몽유록」부터 17세기의 「위생전」, 「운영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금오신화』의 영향 아래 창작되었다.

이번 새 번역은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오역을 바로잡아 작품의 본래 의미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구두점의 정확한 해석과 시구의 맥락 파악을 통해 작품의 진정한 의미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고전문학사의 걸작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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