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만성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 부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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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0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메건 오로크 지음/부키)

만성 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WHO가 정의하는 건강이란 질병을 앓지 않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한 상태. 여기 자기 인생의 절반 가까이 온전한 상태에서 벗어나 만성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건강과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고통의 인생을 살아가는 기록이다.

 

예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작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작가는 20대 초반부터 정체불명의 증상들에 시달렸다. 날카로운 전기 충격에 시달리고, 지속적인 피로와 브레인포그, 관절 통증과 악성종양 등 일상이 무너져내리는 시간을 견뎌내던 작가가 원하는 것은 진단이었다. 자신이 무슨 병으로 힘들어하는지를 모르는 시간이 길어져만 갔다.

 

실로 이 책은 병을 없애거나 무찌르는 대신 병과 함께 사는 이야기다. 병을 극복하는 미국적 정신은 놓아주고, 상호의존성을 찾는 이야기다. 신체는 언제나 다른 신체와 소통한다. 면역계는 보건 정책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정서에도 반응한다.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질병을 앓으면, 의료계의 갖은 결점에 직면하게 된다. 건강보다 생산성을 더 중시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부닥치며, 기존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경험을 전달해야 하는 철학적 문제와도 마주한다. -메건 오로크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초기 진단은 증상을 완전히 설명해 주지 못했고,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병에 대한 탐구에 나선다. 의료계, 학계의 전문가와 동료 환자들을 만나 자료를 확인하고 소통하며 이 문제, 정확한 진단이 빠진 만성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자기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진단과 치료법이 모호한 병, 극복하기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병, 남들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병이 많은 이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저자의 고통스러운 증상에 대한 진단은 실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자가면역질환과 갑상샘 질환, 하시모토병, 라임병, 자율신경기능이상, 자궁내막증 등등.

자가면역질환은 신체가 어떤 이유로 자기의 건강한 조직을 공격하는 항체를 만드는 병이다. 또한 하시모토병이 자신의 감상선샘에 생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에 걸친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을 이해했다.

작가가 앓고 있는 많은 면역 매개 질환이나 염증 증상은 일정 시간을 두고 별안간 다시 공격해 온다.

항생제부터 가공식품이며 생활 환경 내 화학물질의 폭발적 증가까지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인해 이런 질병들이 광범위하게 늘어났다.

 

유전자와 바이러스와 스트레스와 면역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복잡한 결과가 질병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진단의 명확성 대신 불확실성이 우리 세계에 고개를 내민다.

21세기는 의학이 질병 유발인자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시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질병 서사도 극적인 시작과 궁극적 치유(혹은 비극적 죽음)로 구성되는 틀에서 벗어나, 더욱 섬세하게 변화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진화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에서 다수의 환자는 건강과 질병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안녕한 상태와 증상이 있는 상태를 별 특징 없이 오갈 것이다. -<의사도 모르는 병> 중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10년에 걸쳐 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치료법으로 병을 무찌르는 영웅담이 아니라 만성질환과 함께 지내는 이야기가 10년 넘게 진행 중이다.

저자는 소리치고 있다. 재난을 맞아 실종 상태에 빠진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겪는 현실의 존엄성을 품는 일. 바로 그래서 내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알고 싶었다. 내 언어를 찾아내려고 그토록 애썼다. ‘극복에 실패한 상황을 병적으로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만성질환을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면, 환자에게 품위 있게 병에 대처하라고 가르치면서 오히려 그들의 품위를 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웃음 치료> 중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생제 처방을 통해 힘을 얻었지만, 항생제가 장을 망가뜨리고 세균의 균형을 망쳤다. 마이크로바이옴의 변화를 통해 면역계의 변화를 원했던 작가는 분변 미생물 이식(FMT)을 선택했다. 독한 부작용도 겪었지만, 작가는 임신에 성공한다.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미국의 의료계는 나를 진단하는 일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수년간 내 탐구를 가로막았다. 내 병을 인정하는 대신, 내 몸을 의료계가 아는 확실한 질병을 앓는 순종적인 그릇처럼 다루고자 했다. 복잡한 병이 깃든 내 몸은 생물학적 요소뿐 아니라 생애적 요소로 구성된 장소인데 말이다.

내 질병 서사는 목적지가 없다. 그보다는 나를 힘들게 하고, 놀라게 한 것들의 총합이다. 어렵게 만난 모든 사람, 내 몸에 대한 적응, 신체의 제약으로 선택하게 된 삶, 투병하면 얻은 앎, 버티고 인내하여 결국 진단을 받았기에 간간이 느끼는 자부심, 임신 전 아이를 고대하며 보낸 시간, 그 모든 것들. 지금은 아이가 있지만, 그 긴 갈망의 시간은 몸에 쓰여 있고 영혼에 칼로 새겨져 있다.

내 병은 언제고 무엇이든 올라올 수 있는 열린 창문으로 남았다. -<지혜 서사> 중에서

 

이 책은 분명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에 도달하는 핑크빛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무채색과 어두움이 어울리는 고통의 이야기다. 그러나 작가 본인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글이다.

10년이 넘도록 저자는 체위성기립빈맥증후군, 엘러스단로스증후군, 자가면역항체 양성, 피로와 브레인포그, 신경 문제와 결합 조직 문제가 나타나고 날카로운 전기 충격에 아직도 통증을 느끼고 있다. 처음 듣는 병명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치유의 이야기는 언제 등장하는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독자가 흔히 갖는 희망을 계속해서 무너뜨리는 글이다.

 

질병을 극복한 이후 더욱 강해졌다거나, 질병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더욱 지혜로워졌다는 식의 서술을 저자는 강력히 부정한다. 병은 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자가 질병과 함께하며 기록한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다.

아픔이 반드시 치유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아는 것,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닌 것,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질병과 함께 살아보는 것.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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