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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걷다 - 크라스키노에서 상하이까지
박영희.최종수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19년 10월
평점 :

2019-123 <안중근과 걷다 (박영희, 최종수 지음/숨쉬는책공장)> #역사
크라스키노에서 상하이까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이 아니더라도 2019년 여름은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극일의 물결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그 이웃 나라의 야욕에 비참하게 희생당한 우리의 선조들의 역사는 다시 살펴봐도 비분강개할 뿐이다.
의롭지 못한 시대의 흐름에 자신의 일생을 한 줌의 지푸라기처럼 던져버린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언제나 질문은 ‘나라면 저렇게 나의 인생을 던질 수 있을까?’였다.
유관순, 윤봉길, 백범 김구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안중근.
너무나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독립투사들이지만 그들의 인생을 천천히 살펴본 적이 없었다.
르포작가와 신부 두 분이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 의의를 살피고 변화된 오늘의 모습을 사진과 함께 담았다.
안 의사의 높은 기개와 결단력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잘 묘사되고 있었다.
또한, 안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동지들의 면면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영웅들로만 기억되는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와 행동이 얽히고설켜서 형성되는 역사.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확인하며 오늘의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거대한 흐름 속에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묵묵히 역사적 소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의사 안중근으로 알고 있는 인간 안중근의 변화에 저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말타기와 사냥을 즐겼던 안중근의 변화는 어디에서 온 걸까? 천주교 입교는 안중근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바꿔놓았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그의 가두선교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안중근의 두 번째 변화는 한반도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의 을사늑약이다. 북간도와 상하이를 다녀온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시종 한반도의 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주창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한반도에 초대 통감부로 부임한 이토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머리말 중에서

1907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연해주 의병부대에서 안중근은 우군영장에 선임된다. 우군영장은 의병부대에서 참모중장을 의미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에 그친 국내 침공작전.
연해주 의병부대 활동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돌파구를 모색하던 안중근.
이 책은 ‘크라스키노’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단지동맹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룡, 백남규, 황길병, 조순응, 강기순, 강계찬,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1909년 10월 19일, 크라스키노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접한다.
이에 바로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한다.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은 하얼빈행 우편열차에 몸을 실었다. 쑤이펀허에서 러시아어를 통역할 유동하가 합류했다.
안중근이 세 자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건 3년 전(1907년)이었다. 장녀 현생은 여섯 살, 장남 분도는 세 살, 차남 준생은 아장아장 돌이 막 지난 때였다. -p137
1909년 10월 22일 저녁 9시 15분. 안중근 일행은 최종 목적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러시아에서 넘어온 조도선까지 이제 네 명.
25일 밤 11시 창춘역에서 출발하는 이토를 창춘에서 처단할 계획을 세웠지만, 경비 문제로 결행하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동선을 확인한 안중근은 차이자거우역으로 우덕순, 조도선과 이동하였다.
하얼빈에 남은 유동하의 전보를 통해 전달받은 정보에서 불길한 예감을 받은 안중근은 차이자거우역에서 이토를 저격하려는 계획을 수정한다.
이토가 탄 열차는 아침 6시 차이자거우에, 하얼빈역에는 9시경 도착 예정.
우덕순과 조도선이 차이자거우역에 남아서 1차 작전을 펴고 자신은 하얼빈역에서 2차 작전을 실행하는 계획을 세우고 홀로 하얼빈역으로 이동했다.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떠난 후 차이자거우역은 경비 태세가 대폭 강화되었다.
러시아 군인들이 역사 주변을 에워싸고 검문검색이 강화되었다.
6시 이토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우덕순과 조도선은 역사에 진입도 못 하고 1차 작전은 실행도 해보지 못하게 됐다.

운명의 날. 아침 7시 새 양복으로 갈아입은 안중근은 하루도 빠뜨리지 않은 아침 기도를 하고 하얼빈역으로 향한다.
일본 거류민단 틈에 끼어 대합실 찻집으로 들어간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 그리고 여섯 발의 총성, 코레야 우라.
안중근의 사격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세 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배에, 나머지 세 발은 남만주철도 총재 나카무라 제코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고,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를 쓰러뜨렸다.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임무를 마친 안중근은 손에 쥔 권총을 승강장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코레야 우라’를 외쳤다.
여섯 발의 총성과 세 번의 함성이 울려 퍼진 거사 현상을 찾았다.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두 개의 보도블럭이 설치되어 있었다. 삼각형은 안중근이 총을 겨눈 자리, 사각형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다. -p174
1909년 10월 30일.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온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 미조부치 앞에서 마침내 포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개 항의 죄목이었다.
1 한국의 왕비를 살해한 죄
2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4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5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에게 신문 구독을 금지한 죄
10 제일은행권을 강제로 발행한 죄
11 국채 2300만 원의 빚을 지게 한 죄
12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사형 집행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동양평화를 위한 만세삼창과 기도를 올리고 싶다.”
사형 집행을 알리는 백포가 머리에 씌워지자 안중근은 묵도와 함께 기도를 올렸다. 감옥의監獄醫가 안중근의 절명을 보고한 시간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이었다. -p246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된 후 마차에 실려 북문으로 빠져나간 안중근의 유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