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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평점 :
2019-092 <당신이 옳다(정혜신 지음/해냄)>
저자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만든 재단 ‘진실의 힘’에서 집단 상담을 이끌어 왔다.
그가 보듬어준 사람들을 보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우리에겐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 등 전문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치유법’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자신의 심리학을 ‘적정심리학’이라고 부른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있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개발도상국이나 빈곤국의 삶의 질 향상과 빈곤 퇴치를 위해 적용되는 기술이다.
당신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정신적 위기에 빠진 이를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지해줄 수 있는 방법,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익히고 있는 심폐소생술처럼 전문의의 처방과 처치까지 기다리기 전에 시행할 수 있는 치유법을 ‘적정심리학’이라고 불렀다.
나와 내 옆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 ‘적정심리학’을 공부해본다.
연예인들이 갖고 있는 정신질환 중 공황장애가 있다.
스타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배우자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 자체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 주어진 역할에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스타들이 겪는 공황장애 삶의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자기성(自己性)이 소거된 채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죄의식과 무력감은 겉보기엔 자신만 갉아먹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사 이래 가장 강한 위력을 내포한 사회적 힘을 이끌어냈다. 죄의식과 무력감의 연대가 해낸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날리지 말고 공감하라
심리적 CPR은 ‘나’처럼 보이지만 ‘나’가 아닌 많은 것들을 젖히고 ‘나’라는 존재 바로 그 위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 위치한 곳은 내 감정, 내 느낌이므로 ‘나’의 안녕에 대한 판단은 거기에 준해서 할 때 정확하다. 심리적 CPR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도 감정에 따라야 마땅하다.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천천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 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 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 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
문이 ‘존재 자체’라면 문고리는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에 정확하게 눈을 포개고 공감할 때 사람의 속마음은 결정적으로 열린다.
공감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힘이다.
국가의 국경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경계가 존재한다.
국경 수비대가 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경제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지키는 일이 어렵다.
그 경계를 인지할 수 있어야만 나도 지키고 생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경계란 개념은 이상향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너와 나를 갑과 을로 나눌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다.
갑과 을 같은 사회적 관계로 너와 나의 관계 전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인지할 수 있어도 갑을 관계를 갑갑의 관계로 바꿀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을 건너뛰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로 넘어갈 방법은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자전거의 왼쪽 페달이라면 자기를 살펴보는 일은 동시에 돌아가는 오른쪽 페달이다. 한쪽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 즉시 자전거는 멈추고 넘어진다. 자기에 대한 성찰이 멈추는 순간 타인에 대한 공감도 바로 멈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을 방해하는 허들이 된다.
누구나 한결같이 공감받고 공감하며 살길 원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살기 힘든 건 공감까지 가는 길목에서 여러 허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허들을 잘 넘어야 마침내 공감에 도달할 수 있다.
그토록 원하는 공감받고 공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허들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대표적인 허들이 감정에 대한 통념이다.
역할에 충실한 관계란 ‘모름지기 주부란, 아내란, 엄마란, 며느리란 이러이러해야 한다. 모름지기 가장이란, 아빠란, 아들이란, 사위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충실한 삶이다.
역할 놀이 중인 삶이다.
이런 삶, 이런 관계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내 심리적 S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한 번도 그의 속살을 본 적이 없는 삶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인가. 공감을 잘한다는 건 상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결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듣고, 더 많이 묻고 듣다 보면 사람도 상황도 스스로 전모를 드러낸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어떤 마음에서 그런 건데.
네 마음은 어땠는데 핑퐁게임 하듯 주고받는 동안 둘의 마음이 서서히 주파수가 맞아간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감 혹은 공명이다.
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 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기 얘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낯선 상황이나 낯선 사람이라도 어떤 식이로든 그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