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19-080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 지음/어크로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인 저자의 에세이집.
‘추석이란 무엇인가_명절을 보내는 법’이란 칼럼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칼럼니스트이자 198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영화평론으로 등단한 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철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글은 살짝 시니컬하면서도 해학이 느껴진다.
현상의 배경을 풍부한 사상적 설명과 예술적 소재로 설명하여 직설적인 표현을 살짝 피해나간다.
학생들을 포함해서 인간의 날 것의 상태에 대한 애정도 보인다.
전임 대통령 시기에 쓰인 글들이 많다. 시대적 과제에 대한 전공자의 고민도 드러나는 글들이 보인다.
고도성장을 통한 중산층 진입, 절대악 타도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과거 수십 년간 이 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했던 두 약속에 대해 사람들은 이제 낯설어하게 되었다. 이것이었던가, 우리가 열망했던 것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구호가 낯설게 느껴지게 된 이 공동체의 선택은 이제 무엇인가?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다. 화전민이나 프리라이더가 아니라 조용히 느리게,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 주체로 살아보고야 말겠다는 열정을 가져보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이란 그 자체로 지나치게 큰 야망처럼 보인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에서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살은 언제 뺄 것인지 등등. 그러나 21세기의 냉정한 과학자가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20세기 청년이 더 이상 아니듯이,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아니며, 친척도 과거의 친척이 아니며, 가족도 옛날의 가족이 아니며,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며,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라고.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라고.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_명절을 보내는 법1>
희망 없이 공화국을 사랑하라. 이번 생에는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채로, 공화국을 사랑하라. 신의 침묵과 정치인의 무책임을 은쟁반에 올려둔 채로, 통제 불능의 운명에 참여하라. 21세기 공화국의 시민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투표에 참여하는 시민군이다. 이제 이 땅에 진정한 공화주의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투표소를 향해 진군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햄릿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진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다. 21세기 이곳의 시민은 자신으로 하여금 산업사회 소비자의 메마른 일상을 초월해 고전 비극의 영웅이 될 기회를 마련해준 이 공화국의 미덕을 찬미한다. 한국에서는 자력으로 비극적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모든 시민들에게 똑같이 있다고. 그 비극적 전망이 모두에게 열려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고양된다고. -<공화국 찬가>
민주투사들이 집권하여 독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양태를 보여줄 때, 과거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기립박수를 받을 때, 새롭게 등장한 정치가 한층 더 구태일 때, 진보의 간판이 보수만큼 낡아 보일 때, ‘진보적’ 지식인이 여성의 고용에 대해 오히려 소극적일 때, 인권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도외시할 때, 저 정치인들이 모두 직선제에 의해 뽑힌 이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 지금 교통정체를 탓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차가 바로 그 교통정체를 만들고 있음을 깨달을 때, 뱃살과 나머지 몸 간의 경제는 점점 더 의문시되었다.
뱃살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결국 몸 전체가 뱃살이라면, 뱃살이 뱃살을 개혁할 수 있는가? 피하지방이 내장지방을 개혁해야 하는가? 그 개혁은 어떤 정치경제를 전제한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존재의 가장 정치적인 부위인 뱃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 생각마저 뱃살이 꾸는 꿈에 불과할지라도. -<뱃살이 꾸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