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수업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예술 강의
문광훈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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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4 <미학 수업(문광훈 지음/흐름출판)>

몇 년 전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며 미학이란 참 어려운 학문이라고 느꼈다.

이번 책도 어려웠다. 그러나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예술에 대한 평론만이 미학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삶의 여러 기준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이 책을 시민을 위한 예술교양서라고 했다. 이 땅의 삶과 나 자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현실에 관한 책.

 

직장과 가까운 곳에 미술관이 있어도 1년에 한 번 가기도 어려웠고 음악회 역시 가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예술은 나와 멀리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야기하고 묻는다.

현실에서 어떤 것이 좀 더 가치 있고, 어떤 것이 의미 있는지를. 이런 가치와 의미 가운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이 아름다움은 어찌하여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지, 우리의 것이라 해도 왜 쉽게 사그라드는지를 생각한다.

나의 삶이 주체적으로 꾸려지도록 이끄는 예술. 공동체와 유리되지 않고 연결되도록 이끄는 예술. 그러기 위해 나와 우리의 삶을 위한 주체성을 한결 같이 이야기한다.

 

생소한 미학이라는 창문을 통해 다른 것들을 만나고, 잠들어 있는 우리의 감각을 쇄신시켜주었고, 오늘의 를 넘어 내일로 나아가고, 더 넓고 깊은 곳을 보고, ‘의 삶을 만들고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아름다움으로의 변화를 꿈꾸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미학과 예술

부당한 일은 항의하고, 기쁜 일은 함께하며, 중앙보다는 변두리에 귀를 기울이고,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모순은 어떤 지점에서 어찌할 바 없는 것으로 그저 껴안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신화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사실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이 미의 변증법이다.

예술은 삶의 한계 속에서 어떤 자유를 느끼게 하고, 그 자우 이상의 책임을 떠올려주며, 이런 책임 속에서 다시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절감케 한다. 자유와 책임 중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예술은 미망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술 속에서 다시 꿈꾸고 선택하며 새롭게 깨어나 행동하게 된다. 예술은 설렘과 아쉬움의 교차 경험이다. 이는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잠시 돌아보게 한다.

 

풍경화를 제대로 보려면 홀로 있어야 한다. 수도사처럼 혼자 서서 느끼고 생각하며 돌아봐야 한다. 정신의 내면적 눈은 이때 생긴다. 생명은 지워지는 하나의 점이면서 무한의 우주로 이어진 고리다. 이 무한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왔던 세계가 일부일 뿐이며, 그 일부의 세계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또 다른 광활함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이곳이 저편과 어떻게 얽혔는지, 부분은 어떻게 전체로 이어지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서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렵다. -p42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

 

좋은 그림은 한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제약을 뛰어넘는다. 마치 터너가 낭만주의 화가이면서 그 사실적 밀착으로 현대성까지 획득하듯이. 그래서 감정 속에서 감정 이상의 현실을, 삶 속에서 삶 이상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며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부로 들어가게 된다. 나는 <, 증기, 속도>에서 낭만적 감정과 현실, 상상과 사실이 만나는 한 지점을 읽는다. 이것들이 동시에 구비될 때 현실의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이는 환상의 사실성이고 논리의 감각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꿈을 꾸듯이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고, 이 그림 밖의 현실이 조금은 바뀌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p63 터너의 <, 증기, 속도>

 

삶이 죽음만큼 불행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인간 조건의 근원적 허약성을 인정함으로써, 그러나 이런 인정에도 불구하고 하찮지 않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가. 어깨의 힘을 조금 더 빼고, 더 유연하고 탄력적인 성찰로 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삶의 배후와 속살은 그때야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예술과 철학, 학문과 문화도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 -p78 다비드의 <살해된 마라>

 

오늘날 우리는 단테처럼, 또 단체를 그린 들라크루아처럼 지옥의 강을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폐허와 죽음, 폭력과 울음은 역사에 항구적이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파산 신청을 하고, 똑같은 일을 같은 시간 해도 같은 액수의 돈을 받지 못하는 수백만 명이 이곳 반도의 남쪽에 산다. 지구는 살 만한가. 쉼 없이 떠나고 목숨을 끊는 현실의 유황불은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있다.

예술의 보편성은 당파나 관점을 벗어나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 이야기는 산 자의 행동에 대한 얘기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단테의 시도 그르칠 것이다. -p114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

 

우리는 그림을 보며 우리 사는 곳, 우리를 에워싼 것과 우리가 딛고 선 것들의 광활한 무게를 느낀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이런 나날의 일을 간결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경제위기의 많은 것은, 줄이고 줄이면, 과욕에서 온 것이다. 거품-확장-열풍-무분별은 자기한계를 의식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다. 한계는 삶의 테두리를 돌아봄으로써 자각된다. 예술이 상기시키는 바로 이 근원적 질서다. 이 질서 앞에서 진상은 허상으로 바뀌고, 쓸모없는 것은 쓸모있는 것으로 변모한다. 주위를 돌아볼 때 마음은 두려워지면서 평안해진다. 홍대연의 그림은 이 점은 알려주는 듯하다. -p143 홍대연의 <인물산수도>

 

시장과 자본의 힘, 수익과 효용 그리고 이윤을 위해 사람은 이제 어떤 것도 꺼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과 예술이,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생활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는 일, 돌아보며 자기의 느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의 실제가 어떤지 떠올려 보는 것, 그것은 하부구조적infrastructural 실천이다. 문화란 상부이데올로기적 사안이 아니라 하부구조적 기반활동이다. 이 하부구조적 실천에 각자가 더 참여하고, 이 같은 시민적 참여를 사회제도가 장려하는 일, 그리하여 이 모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 삶의 유쾌한 교향악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적 과제다. 그렇게 될까? 지금의 현실은 이러한 각성이 예술 안에서의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여기게 한다. -p166 최북의 <영모도>

 

봄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변화를 존중한다는 뜻이고, 이 시간에 제약된 인간의 삶을 의식하라는 뜻일 것이다. 유한성의 조건이란 인간 생애의 근본조건이다. 이 근본조건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놓아줘야 할 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기존과는 다른 세계와 만난다는 것이고, 이 세계의 다른 인물과 생애를 일정한 거리 속에서 전체적으로 대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전망 좋은 방에 들어서는 일과 같다. 이 방에서 우리는 더 많은 자유와 열정과 개방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전망을 기억하고 간직한다면, 우리는 봄과 다투지 않을 것이고, 이 세계의 자연스런 움직임에도 충실할 것이다. -p179 봄하고는 다투지 마라

 

눈멀지 않기 위해 사랑은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성은 믿음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믿음도 이성도 자기를 넘어선다. 이 점에서 이성과 믿음, 합리성과 종교는 배치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드높은 곳에서 서로 만난다. 사랑은 이 교차점이고, 이런 교차를 통한 넘어섬의 형식이다. 이때는 기독교적이란 말을 빼도 무방할 것이다. 판화 속의 예수는 이런 사랑의 원형-일체의 구분과 경계를 넘어서는 숭고한 인간애를 떠올리게 한다. -p193 램브란트의 <이 사람을 보라>

 

시를 이해하기란 간단치 않다. 시란, 한마디로 사물 삼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대상 속에 감정을 투사시켜 마치 내가 그 대상인 것처럼느끼고 표현된다. 그렇게 해서 만물은 새롭게 태어난다. , 시인은 자기만의 중얼거림이 아니라 무엇에 기대어 그것을 상상적으로 관통하면서 자신을 표현한다. 시의 언어를 빗대어 말하기또는 이미지의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시인의 느낌이고, 그의 삶과 세계관이다. -p222 플라타너스 그늘의 기억

 

추사에게 자기 경계와 도량, 사실 직시와 운치, 준엄함과 유머는 마치 연암에게 그러했듯이 둘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늘 정격과 파격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다. 스스럼없는 정신이 어느 한편에 치우쳤다면, 그의 글은 이다지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울림은 학문과 생활, 예술과 삶이 어긋나지 않은 데 있을 것이고, 작게는 스스로 마음을 속이지 않는自不欺心데서 올 것이다. 옛 것을 익히며 새것을 만들어내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도 이런 철저함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근원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다. 최상의 예술가에게 모든 것은 낱낱의 것과 융회관통融會貫通한다.

남은 것은 추사의 성취를 오늘의 세계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다. -p249 아무 것도 아닌 실존의 전부

 

네가 누구인지 네 스스로 안다면, 넌 네 삶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네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고, 마침내 자유로운 인간으로 너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삶이 어렵다면, 그것은 자기 직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 일의 절반은 자기를 얼마나 바로 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p271 뒤러의 <자화상>

 

인문학은, 적어도 인문이라는 학문이 아니라 인문정신은, 궁극적으로 보면, ‘사는 데로 수렴되고, 또 그렇게 수렴될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에 대한 반성이고, 이 반성 속에서의 자기갱신이며, 이 갱신을 통한 자기 삶의 변형에 있다. 그러나 이때의 변형은, 그것이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외적 지침이나 도덕적 훈계와는 다르다. 그러면서 그것은, 생활의 실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윤리적이다. -p299 어떻게 사느냐, 사는 것을 어떻게 배우느냐: 인문학의 존재 이유

 

이 리뷰는 흐름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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