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의 정치학 도란스 기획 총서 4
정희진 외 지음 / 교양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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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9 <미투의 정치학(정희진 엮음/교양인)>

이 책은 미투 운동을 둘러싼 여러 이론과 실천의 주제들을-성적 자기결정권, 한국 사회의 남성 문화와 현실 정치의 남성 연대, 정치와 선거 문화, 매체의 윤리, 사법부 성인지 의식, 젠더 폭력의 개념과 인식론 등- 분석한다. 권김현영, 정희진의 글이 미투 운동과 한국 남성 문화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한채윤, 류인의 글은 성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질문한다.

 

2018129일 한 여성 검사의 검찰 조직 내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정계, 문화예술계, 스포츠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미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 중심적 성 문화를 뿌리째 뒤흔들어 일상의 혁명을 촉구하는 매우 급진적인 운동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 이후 이렇게 전 세대의 여성들이 고르게 지지한 운동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투 운동은 법과 제도, 사회 질서 전반에 성차별적 통념이 얼마나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하기이후 피해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은 여전히 너무 크고,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거의 진전이 없다. 용기 있는 목소리가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검찰 조직 내 성폭력, 안희정 전 충남 도지사 사건,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처럼 오랫동안 수많은 피해 여성을 양산하면서도 침묵과 방조로 지속되던 문제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미투는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여성의 목소리 자체를 여성 상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미투 역시 그랬다. 하지만 미투는 여성 스스로의 인권 의식이 높아진 결과이며, 초기 미투의 가해자들이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유명 인사이거나 피해 여성의 숫자가 은폐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가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허락했는가 아닌가 혹은 여성이 그것을 쟁취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다. 권리를 행사하는 순간, 행사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피해(해고나 사회적 매장’)가 기다린다면 누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 심각한 육체적 훼손이 동반되는 성폭력 사건이나 아동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의 저항은 더 큰 신체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때 여성이 자기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강하게 저항하지 않으면동의한 것인가?

 

사실, 미투는 젠더 질서의 소립자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의 기본 질서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가 없다면, 여성의 노동에 대한 남성과 국가의 착취가 없다면 사회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가부장제 질서의 축도인 여성에 대한 폭력 구조를 해부하지 않으면 미투는 일시적 스캔들이거나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잔인하고 예외적인 뉴스로 치부될 것이다.

 

미투 혁명’.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혁명보다 더 정확한 명명은 없을 것이다. 모든 혁명은 미완이라는 의미에서, 곳곳에 반동이 매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에게 충격과 격세지감을 안겨주었다는 면에서, 혼란 속에서는 늘 장사꾼과 밀정이 활보한다는 의미에서……모두 그렇다. 준비된 혁명은 없다. 언어도 제도도 구비되지 않은 혁명, 대안 없는 혁명,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미투는, 혁명이 분명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젠더 질서에서 나온다. 그래서 피해자가 신문을 받는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상황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해야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렇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피해자에 대한 호기심, 통념에 근거한 여론 재판은 법적 심판 이전의 일상 문화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춘향이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춘향의 어머니의 직업(신분)이 더 우선시되고, 춘향에게 지킬 정조가 있는지 여부는 춘향의 결정이 아니라 춘향 주변의 남자들의 경쟁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정조를 지켜야 할 주체로는 춘향이 호명되지만, 정조가 춘향에게 속해 있지는 않다.

 

반성폭력 운동가들은 성폭력을 다루는 법의 태도를 바꾸려면 형법상의 보호법익부터 바꾸어야 하는 것을 알았다. 기존의 보호법익인 정조권을 대체할 새로운 권리 개념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性的自己決定權)’이다.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동의를 구하려고 했는지가 아니라 피해자가 가해자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강력하게 저항했는지, 거부했는지를 더 중요시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의문의 궁색한 답은 범죄 성립의 예외 규정으로 피해자의 승낙을 다루는 형법 제24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강간죄에서 만약 피해자가 정조를 지키려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정조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자신의 정조를 양도한 것이므로 범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동의할지, 거부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곧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다. 피해자는 애당초 동의와 거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춘향에게 동침을 요구할 요량으로 변학도가 춘향을 억지고 관아로 불렀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고 그 개념을 모색하는 작업은 서구의 제2 물결 페미니즘의 발달과 궤를 같이했다. 섹스, 즉 생물학적 몸/성은 타고나며 변화하지 않는다고 해도, 젠더, 즉 사회적 역할, 행동 양식 등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이 공식의 핵심이다. 이 공식에 따르면, ‘가사노동을 해야 함여성으로 태어남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실천의 효과다. 페미니즘은 이 공식을 통해 여성이 겪는 억압을 권력의 문제로 재구성했다.

 

섹스와 젠더의 관계에는 규칙이 없다. 하지만 이성애-이원 젠더를 규범으로 삼는 사회에서 섹스와 젠더는 필연적 관계로 인식된다. 현대 사회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겪는 트랜스 혐오 폭력은 섹스-젠더의 필연적 관계를 자연화(naturalization)하는 문화적 배경에서 발생한다.

 

여성이 겪는 폭력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이어야 해서, 여성으로 환원되면서 발생하는 폭력은 아닌지 재검토해야 한다. 젠더 폭력 개념을 재해석하는 나의 작업은 새로운것이 아니다. 이 작업은 한국에서 진행 중인 성폭력 개념 정의를 둘러싼 논쟁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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