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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ㅣ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요코야마 히데오, 서혜영 역, [사라진 이틀], 들녘, 2004.
Yokoyama Hideo, [HANOCHI], 2002.
일본소설을 즐기며 기억해야 할 작가가 또 한 명 늘었다,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익히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작품으로 만나기는 처음인데... 기자 출신으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그의 글이 마음에 든다. 빈틈없는 사전조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이의 호기심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흡입력과 진실을 향해 날카롭게 파고드는 구성으로 그만의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이 소설을 발표한 이후에 제128회 나오키상의 후보에 올랐지만, '현실성의 결여'라는 혹평으로 낙선하자 결별을 선언하여 일본 문단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가 지녀야 할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 어쩌면 평생 정보를 수집하고 글을 쓰며 살아온 글쟁이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은 평가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적 관용의 범위에서 현실성의 결여를 거의 느끼지 못해서 나오키상의 아쉬움이 크다.
미완의 자백
이틀간의 공백
글리니커 다리
인간 오십 년
법정의 고독
살아가는 이유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라진 이틀]은 미스터리로 어느 한 경찰 간부의 살인과 자수, 신문과 심문, 특종 기사, 재판과 수감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담아 사회적인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고 있다. 단편이 아님에도 여섯 개의 소제목을 나열한 이유는 순서대로 경찰, 검사, 기자, 변호사, 판사, 교도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짜임새 있는 구조는 사건과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법을 집행하는 각자의 처지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가부키쵸-. 지방에 사는 사람이 그 지명을 들으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향락산업이다. 그곳이 현직 경찰관이 스스로 목 졸라 죽인 아내의 시체를 내버려두고 찾아간 장소라면,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p.165)
카지 소이치로는 W현 경찰청 교육과 계장으로 온화하고 고지식한 인물이다. 7년 전에 하나뿐인 아들을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떠나보내고 아내와 살고 있는데, 남은 아내마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매일 기억을 잃고 있다. 그는 아들의 기일인 12월 4일 저녁에 아내를 죽이고 7일 아침에 자수한다. 그런데 5일과 6일, 이틀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문은 한 권의 책이다. 피의자는 그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실로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책 속의 주인공은 책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다. 이쪽이 책을 펼침으로써 비로소 뭔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쪽을 향해 눈물로 호소하기도 한다. 분노의 불을 지피기도 한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가 읽어주기 바란다. 이쪽은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빨리 넘기라고 조바심을 치며 기다리고 있다. 이쪽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한,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p.29-30)
시키 카즈마사는 W현 경찰청 수사 제1과 강력계 지도관으로, 진급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근무할 때에는 '자백의 시키'라고 불릴 정도로 신문에 상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는 현직 경찰관이 자신의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 후에 자수해온 사건에 긴급 투입되어 신문하게 된다.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백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건 후, 이틀간의 행적이 묘연한 범인. 사건의 내용은 언론에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경찰 내부에서는 조용히 처리하기를 강요한다. 그는 형사부와 경무부의 신경전, 축소 및 은폐의 날조 공작에 가담하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검사는 말하자면 단독 관청이다. 모든 법적 절차를 개인의 이름과 책임 아래 진행한다. 그 개인 재량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에 긍지를 갖고 검사로 임관하는 자도 많다. 사세도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절차의 장면 장면마다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의 원칙'에 묶여 있어서, 상부의 의사결정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조직의 체질도 매우 낡았다. 상명하복의 엄격성은 사안에 따라서는 경찰조직보다 더했다.(p.112)
사세 모리오는 W 지방검찰청의 삼석 검사이다. 검찰로 송치된 피의자를 조사하는 중에 경찰의 조직적인 사건 은폐를 눈치챈다. 살해 후 이틀간의 공백? 자살할 곳을 찾아다녔다는 경찰의 조서는 믿을 수 없다.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으려는 검사의 책임감과 경찰보다 상위 법 집행 기관으로서의 자존심으로 경찰 본부 청사의 압수수색을 계획한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모든 것이 백지화된다.
사세가 헛소리처럼 말했던 '글리니커 다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다리로, 동서 냉전시대 스파이 포로를 교환했다.'
그렇다면 포로 교환-. 경찰청과 지검 사이에 뒷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지검은 경찰 측에 날조된 조서를 보낸 건을 추궁할 생각이었는데, 지검 또한 뭔가 약점을 잡히는 바람에 날조 의혹 해명을 단념한 것은 아닐까?(p.191)
나카오 요헤이는 동양신문의 경찰, 검찰청 출입 기자이다. 우연히 알게 된 검찰과 경찰의 불협화음. 늘 특종을 쫓아다니는 기자의 감각으로 뭔가 낌새를 눈치채지만, 경찰과 검찰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매일 서로 으르렁대는 기자 세계의 경쟁, 신문사 내에서의 불안정한 자신의 입지... 그래서 특종을 찾아야만 한다. 남들이 뒤따라오는 기사를 써야 한다.
독립-.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일상적으로 변호사의 존재를 의식하고 활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W현의 도시에는 의외로 변호사가 많아, 인구 비례나 기업수로 보아도 포화상태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변호사는 출신지에 사무소를 차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연락망 등을 활용해 지역밀착형 경영을 한다. 암묵적으로 서식지 분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 기반도, 인맥도 없는 타향 사람이 새로 끼어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p.225)
우에무라 마나부는 후지미 법률사무소의 고용변호사이다. 가족의 희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어렵게 사법시험을 치른 후에 변호사가 되었다. 지난날의 삶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한때는 도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 중의 하나였지만, 동료의 비리로 그의 사무소는 신용을 잃었고 쌓아올린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내를 살해한 현직 경찰관의 변호를 맡게 된다면, 묘연한 이틀간의 행적을 밝혀낸다면, 자신의 이름은 크게 알려질 것이고 독립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맡고 있는 사건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기일회'. 실로 재판은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후지바야시가 판사로 임관했을 때 아버지가 재판관이 명심해야 할 단 하나의 말이 이것이라고 했다. 재판이 끝나버리면 두 번 다시 그 피고인을 만날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 나와 있는 시간은 오직 그 피고인만을 위해서 사용하라. 그러한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였다. 다도의 세계에서 말하는 '진심으로 대접하라'와 통하는 것이 재판에도 있다는 얘기다.(p.290-291)
후지바야시 케이고는 특례판사보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의 공판에서 합의체 좌배석 판사로 심리에 임한다. 세 명의 판사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있지만, 이 재판에서는 주심을 맡아 판결문을 기안해야 한다. 왜 그렇게 쉽게 죽인 것일까? 과연 돌볼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아버지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더구나 그자의 불가해한 외출을 은폐하기 위해 W현 경찰과 검찰은 결탁하여 신문조서를 날조했다는 의혹도 있다. 모두가 그를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는 아내는 그에게 지금까지 몰랐던 말을 한다.
세월이라는 것이 이토록 빠르고, 어이없이 가버릴 줄은 몰랐다. 심문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암흑 속을 정처 없이 걸어왔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믿고 있었다. 전개, 호전, 역전,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농염이 없는 밋밋한 인생이었다. 미스즈의 죽음과 아키히코의 홋카이도행이 코가의 생활에서 말을 빼앗았다. 결국에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40년이나 근무했다. 그런데 남은 것이라고는 갈비뼈가 튀어나온 기름기 없는 몸과 그 이상으로 말라비틀어진 마음뿐이었다.(p.333-334)
코가 세이지는 M교도소의 주임 교도관으로 이제 정년을 1년 남짓 남겨두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맡은 직무에 충실하면 반드시 수형자를 갱생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랐다. 믿었던 선배는 수감자와 은밀한 거래로 징계면직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자신은 공범으로 의심을 받아야 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이후에 그의 앞길은 막혀버렸다. 그런데 아내를 살해한 경찰관을 놓고 누군가 또다시 은밀한 제한을 해오는데...
심각한 것 가운데 하나. 죽음, 혹은 자살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일본은 전쟁으로 점철된 기나긴 전국시대를 지나왔다.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아주 흔하다. 그래서 전국시대부터 일본의 사회풍조는 죽음 자체보다도 어떤 모양의 죽음인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일본 특유의 죽음의 미학, 자살의 미학 등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에서도 왜 카지(경찰관)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는가가 계속 중요한 의문사항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일본의 문화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사항임을 이해했으면 한다.(옮기고 나서, p.359)
올해는 우연히 남자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을 연이어 읽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감수성을 제대로 아는 나이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50살을 바라보는 남자의 이야기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과 느끼게 될 감정을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부분적인 감정의 이입으로 감동과 마음의 울림도 있었고... 일본소설은 특유의 가벼움과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 때문에 좋아하는데, 사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묵직함이 있어서 읽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경찰과 검찰의 대립, 기자 사이의 경쟁,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몸부림, 치매 환자를 부양하는 가족, 경쟁에서 밀려난 인생... 등 조직의 생리와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마지막을 따뜻함으로 이 모든 것을 녹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