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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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역, [도쿄기담집], 비채, 2014.

Murakami Haruki, [TOKYO KITAN SHU], 2005.

  하루키가 쓴 기이한 이야기라니...

  나 무라카미는 이 글의 필자다.(p.7)

  왜 내가 여기에 얼굴을 내밀었는가 하면, 과거에 내 신상에 일어났던 몇 가지 '신기한 일'에 대해 직접 말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종류의 일들이 내 인생에서는 자주 일어났다. 어떤 것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고 내 삶의 존재 방식에 적잖이 변화를 몰고 오기도 했다. 또 어떤 것은 별 볼일 없는 소소한 사건이어서 그것에 의해 내 인생이 딱히 영향을 받는 일은 없었다... 아마 없었을 것이다.(p.7)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에 (물론 나의 편견이겠지만) 그가 이런 유의 글을 썼다는 것과 도대체 그의 글쓰기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음이 놀라웠다. 아직 그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아서 이러한 작품을 한 권씩 만날 때마다 신비로움이 더해간다. [도쿄기담집]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다섯 개의 짤막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그가 이전에 썼던 수필에서처럼 음악과 문학, 영화와 여행에 관한 뛰어난 식견이 잘 드러나 있지만, 다른 점은 기이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연 여행자

  하나레이 해변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시나가와 원숭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산다. 어쩌면 그것이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때로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서 인생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의 삶을 크게 결정지은 것이 아닌 소소한 쪽의 체험만을 다룬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공통으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이 나온다. 그것은 남매간의 애틋함이고, 하나뿐인 아들이고, 함께 사는 남편이고, 의미 있는 연인이고, 내 이름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것을 찾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과연 그 속에는 어떤 기이함이 있을까?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도."(p.30-31)

  "짧은 기간에 내 인생이 홱 바뀐 거야. 거기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웠어. 진짜로 겁이 나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어. 그런 때에 남들에게 설명 같은 건 못 해. 이 세계에서 뚝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해해줬으면 했어. 그리고 단단히 끌어안아줬으면 했어. 이론이니 설명이니, 그런 건 다 빼버리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p.37-38)

  '우연 여행자'는 자신의 꿈을 바꾸고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이 때문에 가족의 관계는 틀어져 버렸다. 쇼핑몰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나 대화를 하면서 누나를 떠올리는데...

  상어가 사람을 즐겨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살덩어리가 내는 맛은 어느 쪽인가 하면 상어의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 한 입 베어 먹었다가도 대개는 실망해서 그냥 가버린다. 그래서 상어에게 습격을 받더라도 패닉 상태에만 빠지지 않으면 한쪽 팔이나 다리를 잃을 뿐,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녀의 아들은 너무나 놀랐고 그래서 아마 심장발작 같은 것을 일으켜 대량의 바닷물을 마시고 익사했을 것이다."(p.47)

  "대의가 어떻건 전쟁에서의 죽음은 양측이 각각 갖고 있는 분노나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내 편 네 편 따위는 없습니다. 부인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p.52)

  "여자와 잘 지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어. 첫째, 상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것. 둘째, 옷차림을 칭찬해줄 것. 셋째, 가능한 한 맛있는 걸 많이 사줄 것. 어때, 간단하지?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된다면 얼른 포기하는 게 좋아."(p.80)

  '하나레이 해변'은 카우아이 섬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한 젊은이가 서핑하다가 상어의 습격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어머니는 시신을 수습하고 매년 아들의 기일에 맞춰 그곳을 찾는다. '상어에게 아들을 잃은 일본인 맘'으로 알려진 그녀는 여전히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처를 싸매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아들 또래의 젊은이에게 몇 가지 조언해준다.

  "공짜라는 건 절대로 믿지 말라고 남편이 항상 얘기했어요." 여자는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대개는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덫이 있어서 좋은 꼴 볼 일은 없다더군요."(p.97)

  "아시다시피 모든 물은 주어진 최단거리를 따라 흘러가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물 자체가 최단거리를 만들어내지요. 인간의 사고란 그러한 물의 기능과 흡사해요. 나는 항상 그런 인상을 품고 살아왔어요."(p.110)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는 실종된 남편을 찾고 있다. 평소와 다름없던 이가 아파트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사라졌다. 남자는 아내의 의뢰를 받아 그곳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을 인터뷰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과연 남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남자는 평생 동안 만나는 여자 중에 정말로 의미 있는 여자는 세 명뿐이야. 그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p.123)

  "당신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아. 뛰어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뭔가가. 분위기는 조용하지만 몇몇 작품은 특히 생생하게 표현되었고 문장도 아름다웠어. 그리고 무엇보다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사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음악이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그리고 균형이 잘 잡히지 않은 작품이나 연주를 만나면, 즉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미완성의 작품을 만나면, 정말 속이 뒤집혀. 멀미하는 것처럼. 내가 콘서트에 가지 않는 것도,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p.135-136)

  "무엇보다 멋진 것은 그곳에 있으면 나라는 인간이 변화한다는 거예요." 그녀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아니, 그보다 변화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높은 곳에 올라서면 그곳에 있는 것은 단지 나와 바람뿐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바람이 나를 감싸고, 나를 뒤흔들어요. 그렇게 바람이 나라는 존재를 이해합니다. 동시에 나는 바람을 이해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거예요. 나와 바람뿐, 그밖에 다른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이죠. 아뇨, 공포감은 없어요. 일단 높은 곳에 발을 내딛고 그 집중 속에 빠져버리면 공포감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친밀한 공백 속에 함께 존재해요. 나는 그런 순간이 세상 무엇보다 좋은 거예요.(p.154)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여자 세 명 중에서 한 명을 찾는 이의 기록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냥 그랬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의 설을 따라 의미 있는 여자를 신중히 찾고 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단지 세 명뿐이라는 압박으로 결국에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관계만을 형성한다. 이러한 그에게 다가온 한 여자는 하나의 숫자를 꼽을 만하다. 그런데 그녀에게 연락되지 않는다.

  나한테 세일즈를 맡겨주면 좀더 많은 차를 팔 수 있고 영업소 전체의 실적도 지금보다 오를 텐데, 라고 그녀는 이따금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면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 세일즈맨보다 두 배는 매상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자네는 세일즈에 소질이 있어. 서류 정리나 전화 담당자로 썩히기에는 재능이 아까운걸. 앞으로 세일즈를 좀 맡아주겠나?"라고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게 회사라는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세일즈는 세일즈, 사무직은 사무직. 한 번 정해진 담당 직무의 기본 틀은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다.(p.166)

  어쩌면 이렇게도 재미없는 인생인가. 미즈키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새삼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인생에서는 드라마틱한 요소라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영상물로 비유하자면, 수면을 유도할 목적으로 제작된 저예산 자연풍경 비디오 같다. 덤덤한 색조의 풍경이 그저 덤덤하게, 하염없이 이어진다. 장면 전환도 없고 클로즈업도 없다. 신나는 장면도 없고 우울한 장면도 없고 눈길을 끄는 에피소드 같은 것도 없다. 복선도 없고 시사점도 없다. 이따금 생각난 것처럼 카메라 앵글이 조금 달리질 뿐이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이런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자면 이 사람은 얼마나 따분할까, 카운슬러가 가엾어질 정도다. 무심결에 하품이 날 때는 없을까? 날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어느 시점엔가 틀림없이 따분해서 죽고 말 것이다.(p.174-175)

  '시나가와 원숭이'는 이따금 자신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이름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중대한 질병의 징후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을 찾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고민 상담실을 찾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다가 상담 마지막 날에 증상의 원인을 찾아낸다. 이름표를 훔치는 원숭이가 있다.

  하루키의 소설을 아직 정식으로 읽어보지 않아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 아닌 다른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감정은 다 읽은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욕망이다. 혹시 그의 글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어떤 중대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내 상황에 따라서 글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가 언급한 음악과 문학을 따로 정리해 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듯하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특이한 마력을 지닌 그의 글솜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크게 상실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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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슈라라봉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3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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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키메 마나부, 권남희 역, [위대한 슈라라봉], 비채, 2014.

Makime Manabu, [IDAINARU, SHURARABON], 2011.

  인간의 한계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눈에 보이는 자연계에서 상식 범위의 운동이나 정신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힘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눈을 피해 지금 어딘가에 그들만의 세계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신분을 감추고 있다가 역사의 긴박한 순간에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고 다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인간 능력의 한계 극복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이런저런 발칙한 상상이 결합하여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으니 마키메 마나부의 [위대한 슈라라봉]이다.

  어째서 히노데 가도 나쓰메 가도 지금까지 완고하리만치 자신이 가진 힘을 감추고 살아온 걸까?

  그것은 만약 힘의 존재가 주위 사람에게 알려지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도 힘의 존재를 절대 남에게 말해선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혹시 상대가 친구 누군가여도 힘에 대해 들키면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생활할 수 없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은 강력한 억제력으로 어린 마음에 작용했다. 그 결과, 나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힘을 얘기하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만큼, 나 자신의 근본을 거짓으로 은폐하는 듯한 마음을 항상 지우지 못해, 몸에 쌓인 독을 빼내기라도 하듯이 거짓말을 많이 하는 불안정한 십대 초반을 보내게 되었지만.(p.264)

  슈라라봉~ 이라는 독특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가볍고 유쾌함을 기본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힘을 컨트롤 하는 두 가문의 이야기를 독특한 세계관으로 담아내고 있다. 천 년의 숙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히노데 가와 나쓰메 가는 모두 '호수의 사람'으로 비와 호의 기운으로 힘을 발휘한다. 지금은 히노데 가가 도시를 장악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나쓰메 가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양측은 서로 천적의 관계로 어느 한쪽이 힘을 사용하면, 다른 한쪽은 (세부적인 증세는 다르지만) 날카로운 신경의 거슬림과 불쾌함으로 경기를 일으킨다. 둘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사이이다.

  히노데 가와 나쓰메 가는 양쪽 다 '호수의 사람'이다. 비와 호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비와 호라는 심장을 잃지 않기 위해, 양쪽 집안은 아무리 서로 물어뜯고 발을 걸어도 힘에 대해서만은 절대 폭로하지 않는다는 암묵의 규칙을 지켜왔다. 거기에는 힘의 존재를 과시해서 주위의 위협이 되기보다 남들이 모르는 힘을 이용해 사회와의 공영을 꾀하는 편이 장기간에 걸쳐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천 년 이상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양쪽 집안의 지혜가 있었다.(p.264)

  아버지는 본가에서 나와 평범하게 살았으나 료스케는 열다섯 살이 되자 히노데 가의 선택된 사람으로 이와바리시에 있는 본가로 간다.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저택에서 가문을 이끄는 당주와 집안을 돌보는 심상치 않은 기운의 사람들 틈에서 수련을 하고 새로운 학교에서 고교 생활을 해야 한다. 비슷한 또래로 가문의 후계자인 단주로와 함께 빨간색의 눈에 띄는 교복을 입고 매일 아침에 배를 타고 등교한다. 그리고 우연히 같은 반이 된 나쓰메 가의 장남 히로미... 셋은 첫날부터 싸움에 휘말리고 계속해서 크고 작은 다툼과 경쟁을 벌인다.

  "나는 앞으로 그림을 훨씬 더 잘 그리고 싶어. 도예도 조각도 더욱 잘하고 싶단 말이야. 아름다운 것을 더 만지고 가까이하고 싶어. 그렇지만 이건 아니야. 이 힘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고. 자연에서 온 것이라도 인간세계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아. 멋대로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고 우습지도 않은 싸움의 발단이 되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거란 말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힘을 피해왔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번 잃어버린 자연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p.461)

  특별한 능력과는 상관없이 열다섯은 이래저래 많은 것을 고민하는 나이인가 보다. 사소한 말에 자존심이 상하고, 교장의 딸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가 하면, 짊어져야 하는 가문의 책임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꾸기도 한다. 앙숙인 가문의 여동생을 한 번 보고 마음에 두는... 본의와는 다르게 셋은 이렇게 저렇게 얽혀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와 호를 기반으로 하는 두 가문에 치명적인 위협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치는데, 쉽지 않은 싸움이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행동을 조종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런저런 음탕한(?)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지만, 판타지의 옷을 입은 이 소설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남용하기보다 조화롭게 살아감을 말하고 있다. 천 년을 이어온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야 하는지만... 때로는 힘을 거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하는 십 대의 성장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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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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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최고은 역, [침묵의 거리에서②], 민음사, 2014.

Okuda Hideo, [CHINMOKU NO MACHIDE], 2013.

  작가는 한 중학생의 죽음을 두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교사, 같은 반 친구들과 테니스부 부원들의 뜻밖의 증언, 우리 아이가 연관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 왜 우리 아이가 죽음에 이르러야 했는지 슬픔과 원통함에 빠진 유족, 사건의 숨은 진실을 찾기 원하는 경찰과 검사, 누군가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언론, 법리적인 해석에만 집중하는 변호사... 이들 각각의 견해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사건을 단순 명확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음을 잘 드러낸다.

  "아이들은 누구나 그런 잔혹성을 가지고 있지만 커 가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닐까. 중학생은 아직 그 성질이 남아 있고. 학교 폭력, 집단 괴롭힘이 가장 심한 연령도 중학생이야. 고등학생이 되면 강도를 조절할 줄도 알고 동정심도 생기지."(②, p.306-307)

  "나도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굴러먹은 게 아니야. 이런 일은 여러 번 겪었으니 좀 믿고 맡겨 봐요. 분명히 사카이씨의 말대로 피해자 가족은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하면 분노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한마디로 죽은 가족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건 조금이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그게 인지상정인데 어쩌겠어요.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이성과 감정이 항상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단 말입니다. 근본이 그런 생물이라고."(②, p.321)

  [침묵의 거리에서]의 가장 큰 매력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추리의 과정이나 후반부의 깜짝 놀랄 반전보다는 각자의 처지에서 그려진 탁월한 심리 묘사를 읽는 재미이다. 각각의 관점은 모두가 다 사건의 순리적인 해결을 원하면서도 더는 문제가 확산하지 않기를 바라는 학교, 이기적일 정도로 내 자식만을 감싸는 학부모, 조속한 수사를 원하는 경찰과 검찰, 특종을 생각하는 기자, 진실보다는 어떻게든 합의를 원하는 변호사,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의 독특한 세계관... 등 잔잔하면서 끝까지 몰입하게 하는 글맛은 단연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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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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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최고은 역, [침묵의 거리에서①], 민음사, 2014.

Okuda Hideo, [CHINMOKU NO MACHIDE], 2013.

  좋아하는 일본 작가를 묻는다면? 누구와 누구, 또 누구... 라고 줄줄이 이름을 댈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명을 꼽으라면?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주저 없이 '오쿠다 히데오'를 말하고 싶다. 전혀 무관심하던 일본소설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은 그를 통해서였고, 한때는 두문불출하며 그의 작품을 사 모아 몰아서 읽은 적도 있다. 세상이 무라카미 하루키에 열광하고 있을 때에 나는 오쿠다 히데오를 읽고 있었으니... 이러한 이유로 오랜만에 만나는 [침묵의 거리에서]는 기분 좋은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다.

  이 작품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다양한 시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트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점을 공감해 주신다면 작가로서 더없이 행복할 겁니다.(①, p.7)

  하필이면 왜 소설을 읽는가? 라는 물음에서 어떤 이는 단순히 재미있어서,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 때로는 자극이 필요해서... 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고달픈(?)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비극보다 해피엔드를 좋아하고, 나에게 책은 진통제이고 마약이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아서 눈에 띄는 따돌림을 당한 적은 없다(미성숙한 인격의 소유로 누군가를 은근히 따돌린 적은 있어도...). 일본사회의 청소년 따돌림 문제를 소재로 하는 이 소설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 프로그램처럼 하나의 사건을 두고 교사, 학생, 학부모, 경찰, 기자, 검사, 변호사의 눈으로 보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조금은 익숙한듯하나 중립적이면서 철저한 그의 글솜씨는 나의 현실을 망각할 정도로 충분한 재미를 준다.

  대충 기사를 훑어보니 죽은 소년, 나구라 유이치가 동급생들에게 일상적으로 괴롭힘을 당했으며, 몸에 폭행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14세 이상인 두 학생을 상해 혐의로 체포하고, 14세 미만의 두 학생은 아동 상담소로 송치했다는 내용이었다. 나구라 유이치의 시체가 교정에서 발견된 일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수사 중."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박스 기사에는 소년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실려 있었다.(①, p.124)

  새삼 그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스물넷의 다카무라로서는 외아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아마 제 인생을 빼앗긴 듯한 심정일 것이다. 앞으로 진심으로 웃는 날은 영영 오지 않는 게 아닐까.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고, 그런 일상의 즐거움을 느낄 때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을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 맑게 개는 날은 이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①, p.220)

  경찰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네 소년이 나구라 유이치에게 은행나무로 건너뛰도록 강요했고, 건너뛴 걸 보고 나구라 유이치를 홀로 남겨 둔 채 돌아갔다. 또는 떨어진 걸 보고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하시모토의 마음속에 의심도 분명히 존재했다. 어쩌면 단순 사고인 게 아닐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구라 유이치가 일부러 혼자 건너뛰었을 리는 없지만, 중학생이란 원래 충동적인 생물이다.

  자신의 중학 시절을 돌아봐도,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행동만 했던 건 아니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뜬금없는 짓을 저지른다. 자살 충동이 싹트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의 특징이다.(①, p.233)

  구와바타 시립 제2중학교에서 방과 후에 운동부실 2층 건물에서 떨어진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2학년 나구라 유이치인데, 평소 교우관계의 특이성과 몸에 꼬집힌 상흔으로 경찰은 왕따를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한다. 가장 먼저 같은 테니스부 활동을 하는 4명의 동급생이 용의자로 조사를 받는데, 휴대전화에 남겨진 문자 메시지와 학교 주변의 CCTV 기록을 토대로 괴롭힘의 정황이 포착된다. 사건이 일어난 날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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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요코야마 히데오, 서혜영 역, [사라진 이틀], 들녘, 2004.

Yokoyama Hideo, [HANOCHI], 2002.

  일본소설을 즐기며 기억해야 할 작가가 또 한 명 늘었다,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익히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작품으로 만나기는 처음인데... 기자 출신으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그의 글이 마음에 든다. 빈틈없는 사전조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이의 호기심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흡입력과 진실을 향해 날카롭게 파고드는 구성으로 그만의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이 소설을 발표한 이후에 제128회 나오키상의 후보에 올랐지만, '현실성의 결여'라는 혹평으로 낙선하자 결별을 선언하여 일본 문단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가 지녀야 할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 어쩌면 평생 정보를 수집하고 글을 쓰며 살아온 글쟁이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은 평가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적 관용의 범위에서 현실성의 결여를 거의 느끼지 못해서 나오키상의 아쉬움이 크다.

  미완의 자백

  이틀간의 공백

  글리니커 다리

  인간 오십 년

  법정의 고독

  살아가는 이유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라진 이틀]은 미스터리로 어느 한 경찰 간부의 살인과 자수, 신문과 심문, 특종 기사, 재판과 수감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담아 사회적인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고 있다. 단편이 아님에도 여섯 개의 소제목을 나열한 이유는 순서대로 경찰, 검사, 기자, 변호사, 판사, 교도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짜임새 있는 구조는 사건과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법을 집행하는 각자의 처지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가부키쵸-. 지방에 사는 사람이 그 지명을 들으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향락산업이다. 그곳이 현직 경찰관이 스스로 목 졸라 죽인 아내의 시체를 내버려두고 찾아간 장소라면,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p.165)

  카지 소이치로는 W현 경찰청 교육과 계장으로 온화하고 고지식한 인물이다. 7년 전에 하나뿐인 아들을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떠나보내고 아내와 살고 있는데, 남은 아내마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매일 기억을 잃고 있다. 그는 아들의 기일인 12월 4일 저녁에 아내를 죽이고 7일 아침에 자수한다. 그런데 5일과 6일, 이틀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문은 한 권의 책이다. 피의자는 그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실로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책 속의 주인공은 책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다. 이쪽이 책을 펼침으로써 비로소 뭔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쪽을 향해 눈물로 호소하기도 한다. 분노의 불을 지피기도 한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가 읽어주기 바란다. 이쪽은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빨리 넘기라고 조바심을 치며 기다리고 있다. 이쪽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한,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p.29-30)

  시키 카즈마사는 W현 경찰청 수사 제1과 강력계 지도관으로, 진급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근무할 때에는 '자백의 시키'라고 불릴 정도로 신문에 상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는 현직 경찰관이 자신의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 후에 자수해온 사건에 긴급 투입되어 신문하게 된다.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백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건 후, 이틀간의 행적이 묘연한 범인. 사건의 내용은 언론에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경찰 내부에서는 조용히 처리하기를 강요한다. 그는 형사부와 경무부의 신경전, 축소 및 은폐의 날조 공작에 가담하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검사는 말하자면 단독 관청이다. 모든 법적 절차를 개인의 이름과 책임 아래 진행한다. 그 개인 재량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에 긍지를 갖고 검사로 임관하는 자도 많다. 사세도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절차의 장면 장면마다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의 원칙'에 묶여 있어서, 상부의 의사결정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조직의 체질도 매우 낡았다. 상명하복의 엄격성은 사안에 따라서는 경찰조직보다 더했다.(p.112)

  사세 모리오는 W 지방검찰청의 삼석 검사이다. 검찰로 송치된 피의자를 조사하는 중에 경찰의 조직적인 사건 은폐를 눈치챈다. 살해 후 이틀간의 공백? 자살할 곳을 찾아다녔다는 경찰의 조서는 믿을 수 없다.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으려는 검사의 책임감과 경찰보다 상위 법 집행 기관으로서의 자존심으로 경찰 본부 청사의 압수수색을 계획한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모든 것이 백지화된다.

  사세가 헛소리처럼 말했던 '글리니커 다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다리로, 동서 냉전시대 스파이 포로를 교환했다.'

  그렇다면 포로 교환-. 경찰청과 지검 사이에 뒷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지검은 경찰 측에 날조된 조서를 보낸 건을 추궁할 생각이었는데, 지검 또한 뭔가 약점을 잡히는 바람에 날조 의혹 해명을 단념한 것은 아닐까?(p.191)

  나카오 요헤이는 동양신문의 경찰, 검찰청 출입 기자이다. 우연히 알게 된 검찰과 경찰의 불협화음. 늘 특종을 쫓아다니는 기자의 감각으로 뭔가 낌새를 눈치채지만, 경찰과 검찰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매일 서로 으르렁대는 기자 세계의 경쟁, 신문사 내에서의 불안정한 자신의 입지... 그래서 특종을 찾아야만 한다. 남들이 뒤따라오는 기사를 써야 한다.

  독립-.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일상적으로 변호사의 존재를 의식하고 활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W현의 도시에는 의외로 변호사가 많아, 인구 비례나 기업수로 보아도 포화상태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변호사는 출신지에 사무소를 차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연락망 등을 활용해 지역밀착형 경영을 한다. 암묵적으로 서식지 분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 기반도, 인맥도 없는 타향 사람이 새로 끼어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p.225)

  우에무라 마나부는 후지미 법률사무소의 고용변호사이다. 가족의 희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어렵게 사법시험을 치른 후에 변호사가 되었다. 지난날의 삶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한때는 도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 중의 하나였지만, 동료의 비리로 그의 사무소는 신용을 잃었고 쌓아올린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내를 살해한 현직 경찰관의 변호를 맡게 된다면, 묘연한 이틀간의 행적을 밝혀낸다면, 자신의 이름은 크게 알려질 것이고 독립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맡고 있는 사건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기일회'. 실로 재판은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후지바야시가 판사로 임관했을 때 아버지가 재판관이 명심해야 할 단 하나의 말이 이것이라고 했다. 재판이 끝나버리면 두 번 다시 그 피고인을 만날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 나와 있는 시간은 오직 그 피고인만을 위해서 사용하라. 그러한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였다. 다도의 세계에서 말하는 '진심으로 대접하라'와 통하는 것이 재판에도 있다는 얘기다.(p.290-291)

  후지바야시 케이고는 특례판사보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살인 사건의 공판에서 합의체 좌배석 판사로 심리에 임한다. 세 명의 판사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있지만, 이 재판에서는 주심을 맡아 판결문을 기안해야 한다. 왜 그렇게 쉽게 죽인 것일까? 과연 돌볼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아버지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더구나 그자의 불가해한 외출을 은폐하기 위해 W현 경찰과 검찰은 결탁하여 신문조서를 날조했다는 의혹도 있다. 모두가 그를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는 아내는 그에게 지금까지 몰랐던 말을 한다.

  세월이라는 것이 이토록 빠르고, 어이없이 가버릴 줄은 몰랐다. 심문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암흑 속을 정처 없이 걸어왔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믿고 있었다. 전개, 호전, 역전,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농염이 없는 밋밋한 인생이었다. 미스즈의 죽음과 아키히코의 홋카이도행이 코가의 생활에서 말을 빼앗았다. 결국에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40년이나 근무했다. 그런데 남은 것이라고는 갈비뼈가 튀어나온 기름기 없는 몸과 그 이상으로 말라비틀어진 마음뿐이었다.(p.333-334)

  코가 세이지는 M교도소의 주임 교도관으로 이제 정년을 1년 남짓 남겨두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맡은 직무에 충실하면 반드시 수형자를 갱생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랐다. 믿었던 선배는 수감자와 은밀한 거래로 징계면직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자신은 공범으로 의심을 받아야 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이후에 그의 앞길은 막혀버렸다. 그런데 아내를 살해한 경찰관을 놓고 누군가 또다시 은밀한 제한을 해오는데...

  심각한 것 가운데 하나. 죽음, 혹은 자살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일본은 전쟁으로 점철된 기나긴 전국시대를 지나왔다.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아주 흔하다. 그래서 전국시대부터 일본의 사회풍조는 죽음 자체보다도 어떤 모양의 죽음인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일본 특유의 죽음의 미학, 자살의 미학 등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에서도 왜 카지(경찰관)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는가가 계속 중요한 의문사항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일본의 문화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사항임을 이해했으면 한다.(옮기고 나서, p.359)

  올해는 우연히 남자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을 연이어 읽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감수성을 제대로 아는 나이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50살을 바라보는 남자의 이야기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과 느끼게 될 감정을 간접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부분적인 감정의 이입으로 감동과 마음의 울림도 있었고... 일본소설은 특유의 가벼움과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 때문에 좋아하는데, 사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묵직함이 있어서 읽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경찰과 검찰의 대립, 기자 사이의 경쟁,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몸부림, 치매 환자를 부양하는 가족, 경쟁에서 밀려난 인생... 등 조직의 생리와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마지막을 따뜻함으로 이 모든 것을 녹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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