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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역, [도쿄기담집], 비채, 2014.
Murakami Haruki, [TOKYO KITAN SHU], 2005.
하루키가 쓴 기이한 이야기라니...
나 무라카미는 이 글의 필자다.(p.7)
왜 내가 여기에 얼굴을 내밀었는가 하면, 과거에 내 신상에 일어났던 몇 가지 '신기한 일'에 대해 직접 말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종류의 일들이 내 인생에서는 자주 일어났다. 어떤 것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고 내 삶의 존재 방식에 적잖이 변화를 몰고 오기도 했다. 또 어떤 것은 별 볼일 없는 소소한 사건이어서 그것에 의해 내 인생이 딱히 영향을 받는 일은 없었다... 아마 없었을 것이다.(p.7)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에 (물론 나의 편견이겠지만) 그가 이런 유의 글을 썼다는 것과 도대체 그의 글쓰기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음이 놀라웠다. 아직 그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아서 이러한 작품을 한 권씩 만날 때마다 신비로움이 더해간다. [도쿄기담집]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다섯 개의 짤막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그가 이전에 썼던 수필에서처럼 음악과 문학, 영화와 여행에 관한 뛰어난 식견이 잘 드러나 있지만, 다른 점은 기이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연 여행자
하나레이 해변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시나가와 원숭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산다. 어쩌면 그것이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때로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서 인생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의 삶을 크게 결정지은 것이 아닌 소소한 쪽의 체험만을 다룬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공통으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이 나온다. 그것은 남매간의 애틋함이고, 하나뿐인 아들이고, 함께 사는 남편이고, 의미 있는 연인이고, 내 이름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것을 찾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과연 그 속에는 어떤 기이함이 있을까?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택하라. 그것이 나의 룰이에요. 벽에 부딪혔을 때는 항상 그 룰에 따라 행동했고,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좋은 결과를 낳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었어도."(p.30-31)
"짧은 기간에 내 인생이 홱 바뀐 거야. 거기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웠어. 진짜로 겁이 나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어. 그런 때에 남들에게 설명 같은 건 못 해. 이 세계에서 뚝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해해줬으면 했어. 그리고 단단히 끌어안아줬으면 했어. 이론이니 설명이니, 그런 건 다 빼버리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p.37-38)
'우연 여행자'는 자신의 꿈을 바꾸고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이 때문에 가족의 관계는 틀어져 버렸다. 쇼핑몰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읽는 여자를 만나 대화를 하면서 누나를 떠올리는데...
상어가 사람을 즐겨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살덩어리가 내는 맛은 어느 쪽인가 하면 상어의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 한 입 베어 먹었다가도 대개는 실망해서 그냥 가버린다. 그래서 상어에게 습격을 받더라도 패닉 상태에만 빠지지 않으면 한쪽 팔이나 다리를 잃을 뿐,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녀의 아들은 너무나 놀랐고 그래서 아마 심장발작 같은 것을 일으켜 대량의 바닷물을 마시고 익사했을 것이다."(p.47)
"대의가 어떻건 전쟁에서의 죽음은 양측이 각각 갖고 있는 분노나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내 편 네 편 따위는 없습니다. 부인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p.52)
"여자와 잘 지내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어. 첫째, 상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것. 둘째, 옷차림을 칭찬해줄 것. 셋째, 가능한 한 맛있는 걸 많이 사줄 것. 어때, 간단하지?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된다면 얼른 포기하는 게 좋아."(p.80)
'하나레이 해변'은 카우아이 섬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한 젊은이가 서핑하다가 상어의 습격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어머니는 시신을 수습하고 매년 아들의 기일에 맞춰 그곳을 찾는다. '상어에게 아들을 잃은 일본인 맘'으로 알려진 그녀는 여전히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처를 싸매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아들 또래의 젊은이에게 몇 가지 조언해준다.
"공짜라는 건 절대로 믿지 말라고 남편이 항상 얘기했어요." 여자는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대개는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덫이 있어서 좋은 꼴 볼 일은 없다더군요."(p.97)
"아시다시피 모든 물은 주어진 최단거리를 따라 흘러가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물 자체가 최단거리를 만들어내지요. 인간의 사고란 그러한 물의 기능과 흡사해요. 나는 항상 그런 인상을 품고 살아왔어요."(p.110)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는 실종된 남편을 찾고 있다. 평소와 다름없던 이가 아파트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사라졌다. 남자는 아내의 의뢰를 받아 그곳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을 인터뷰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과연 남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남자는 평생 동안 만나는 여자 중에 정말로 의미 있는 여자는 세 명뿐이야. 그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p.123)
"당신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아. 뛰어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뭔가가. 분위기는 조용하지만 몇몇 작품은 특히 생생하게 표현되었고 문장도 아름다웠어. 그리고 무엇보다 균형이 잘 잡혀 있어. 사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음악이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그리고 균형이 잘 잡히지 않은 작품이나 연주를 만나면, 즉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미완성의 작품을 만나면, 정말 속이 뒤집혀. 멀미하는 것처럼. 내가 콘서트에 가지 않는 것도,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야."(p.135-136)
"무엇보다 멋진 것은 그곳에 있으면 나라는 인간이 변화한다는 거예요." 그녀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아니, 그보다 변화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높은 곳에 올라서면 그곳에 있는 것은 단지 나와 바람뿐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바람이 나를 감싸고, 나를 뒤흔들어요. 그렇게 바람이 나라는 존재를 이해합니다. 동시에 나는 바람을 이해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거예요. 나와 바람뿐, 그밖에 다른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이죠. 아뇨, 공포감은 없어요. 일단 높은 곳에 발을 내딛고 그 집중 속에 빠져버리면 공포감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친밀한 공백 속에 함께 존재해요. 나는 그런 순간이 세상 무엇보다 좋은 거예요.(p.154)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여자 세 명 중에서 한 명을 찾는 이의 기록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냥 그랬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의 설을 따라 의미 있는 여자를 신중히 찾고 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단지 세 명뿐이라는 압박으로 결국에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관계만을 형성한다. 이러한 그에게 다가온 한 여자는 하나의 숫자를 꼽을 만하다. 그런데 그녀에게 연락되지 않는다.
나한테 세일즈를 맡겨주면 좀더 많은 차를 팔 수 있고 영업소 전체의 실적도 지금보다 오를 텐데, 라고 그녀는 이따금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면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 세일즈맨보다 두 배는 매상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자네는 세일즈에 소질이 있어. 서류 정리나 전화 담당자로 썩히기에는 재능이 아까운걸. 앞으로 세일즈를 좀 맡아주겠나?"라고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게 회사라는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세일즈는 세일즈, 사무직은 사무직. 한 번 정해진 담당 직무의 기본 틀은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다.(p.166)
어쩌면 이렇게도 재미없는 인생인가. 미즈키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새삼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인생에서는 드라마틱한 요소라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영상물로 비유하자면, 수면을 유도할 목적으로 제작된 저예산 자연풍경 비디오 같다. 덤덤한 색조의 풍경이 그저 덤덤하게, 하염없이 이어진다. 장면 전환도 없고 클로즈업도 없다. 신나는 장면도 없고 우울한 장면도 없고 눈길을 끄는 에피소드 같은 것도 없다. 복선도 없고 시사점도 없다. 이따금 생각난 것처럼 카메라 앵글이 조금 달리질 뿐이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이런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자면 이 사람은 얼마나 따분할까, 카운슬러가 가엾어질 정도다. 무심결에 하품이 날 때는 없을까? 날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어느 시점엔가 틀림없이 따분해서 죽고 말 것이다.(p.174-175)
'시나가와 원숭이'는 이따금 자신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이름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중대한 질병의 징후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을 찾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고민 상담실을 찾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다가 상담 마지막 날에 증상의 원인을 찾아낸다. 이름표를 훔치는 원숭이가 있다.
하루키의 소설을 아직 정식으로 읽어보지 않아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 아닌 다른 글을 읽을 때마다 드는 감정은 다 읽은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욕망이다. 혹시 그의 글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어떤 중대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내 상황에 따라서 글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가 언급한 음악과 문학을 따로 정리해 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듯하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특이한 마력을 지닌 그의 글솜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크게 상실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