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집 2
정석화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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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화, [춤추는 집②], 네오픽션, 2014.

  글을 잘 써서 유명하다고 그 사람의 인격이 꼭 훌륭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잘하거나 연봉이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부문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분야에서 특출난 것이지 나머지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라는 말을 어느 유명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겉으로는 화려해도 무대 위에서의 모습일 뿐, 막을 내리고 가면을 벗으면 더도 덜도 할 것 없는 한 인간이다. 누군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를 인간의 본성을 깊이 있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히 금품을 노리거나, 과거의 원한이나 현재의 치정에 얽혀 있거나, 계획적으로 아니면 충동적으로... 작가는 파렴치함을 극단으로 몰아 살인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 조각조각의 단서를 흩어놓고 여기저기에 함정을 파놓아 범행의 과정을 복기하는 데에 헛걸음질을 유도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원인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의 쾌감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여기에 함께 드러나는 추악한 본성은 미스터리만의 매력이다.

  줄리엣이 죽으면 로미오도 죽어요.(p.10)

  오, 이 더러운 육체여. 녹아 흘러 한 방울 이슬이 되어라.(p.36)

  아시안게임 수영 3관왕으로 아시아의 인어라고 불리던 이정국의 부인이 물에 빠져 죽은 곳은 최 소장의 근무지이다. 또한, 18년 전에 그곳에서 이정국의 동생네 부부가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그때에도 그곳에 최석규가 있었다. 그는 사건의 중심에 있지만, 태풍의 눈이 고요한 것처럼 수사는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황민기 원장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이나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유력한 용의자는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메시지가 전달된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꼬여있는 매듭을 찾아서 풀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한 번 본 것과 두 번 본 것과 세 번 본 것은 설령 같은 것을 보았더라도 결코 같은 것이 아냐."(p.39)

  "마치 죽지 않는 세포 같아."

  ...죽지 않는 세포.

  아내가 입원한 병원의 담당 의사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암세포는 죽지 않는 세포라고, 죽지 않는 세포가 사람을 죽이는 거라고. 말장난 같은 의사의 말을 석규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죽지 않는다는 건 좋은 거 아닌가? 죽지 않는 세포가 왜 사람을 죽이지?(p.45)

  "계속해서 같은 꿈을 꾼다는 건 그건 꿈이 아니라는 거야."(p.219)

  이정국의 아들 이시우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연쇄살인의 위협은 점점 더 거세게 다가온다. 조속한 해결을 위해 강력반 형사 오태주는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최석규와 정보를 교환하고 수사의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숨어있는 인물을 하나둘 찾아내지만, 뭔가 톱니가 맞지 않는다. 이들의 연합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랑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픈 아내를 오랜 세월 지켜보면서 수백 수천 번 스스로에게 같은 소리를 했었다. 난 아내를 사랑해. 그러니까 난 행복해. 난 행복한 사람이야. 그러나 정말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어땠을까? 일과 아내의 병에 지친 남편을 보면서 그녀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행복했을까? 정말로?(p.59-60)

  "잊으려고 혹은 잊지 않으려고 쓸데없는 노력 같은 거 하지 말아요. 그냥 살아요. 살다 보면 그럭저럭 살아지는 법이니까."(p.301)

  1권에 이어서 2권에서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정석화의 소설 [춤추는 집]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과 [햄릿]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원한으로 가득한 두 가문에서 서로 사랑하면 안 되는 배경을 가진 연인의 사랑이 결국에는 비극을 맞이한다. 왜곡된 욕망으로 가득한 한 집안의 다툼은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가져온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앞지르는 욕심과 순간의 쾌락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군상을 보여주는데, 이들이 뿌린 상처의 씨앗은 1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곪아 터져서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게 된다. 일관된 논리와 현실적인 개연성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서서히 다가가는 진실 찾기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폭로한다.

  "흔히 꿈은 이뤄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또한 그 꿈이 행복과 직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 최근에 우리 곁을 멀리 떠난 어느 가수의 마지막 방송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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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집 1
정석화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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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화, [춤추는 집①], 네오픽션, 2014.

  정석화의 소설 [춤추는 집①]은 [재림](안치우, 황금가지, 2014.)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나는 한국형 추리 문학이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연이어 국내 미스터리를 읽게 되었다. 아직 1권만 읽은 상태라서 섣부른 평가가 우려되지만, 지금까지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고 마음이 가는 작품이다. 과거의 잊고 싶은 인연이 현재의 발목을 잡고,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 은퇴를 앞둔 파출소 소장과 강력반에서 발돋움하는 초임 형사의 시각으로 번갈아 진행하는 이중 구조는 일본 미스터리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짜임새이다. 작가는 2000년 '스포츠 서울'의 신춘문예 추리소설 부문에서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마치 매일 지면에 오르는 연재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문학성과는 별개로 장르소설이 주는 자극성과 정보성은 과하지 않게 적절히 분배되어 가독성을 높이고 있고... 부디 2권에서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곳 저수지의 원래 이름은 호정(狐精)이 아닌 호리병 속에 들어가면 별세계가 보인다는 일호천(一壺天)이었다.

  일호천저수지에서는 매년 일고여덟 명 정도의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낚시를 하거나 꽃놀이를 즐기다가 실족하여 죽는 것이 아닌 작정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살자들이었다. 저수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호정리 사람들은 저수지의 이름이 잘못된 탓이라고 여겼다.(p.25)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건이 일어난 곳은 서평군의 호정저수지이다. 호리병의 모양을 닮은 저수지는 일 년에 한 차례 주위에 심은 벚나무의 꽃이 우거지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제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호정파출소 소장 최석규는 저수지에 차가 빠졌다는 신고를 받는다. 차는 물에 완전히 잠긴 상태이고 운전석에서 한 여자가 익사한 사고이다. 그런데 익사자는 아시안게임 수영 3관왕을 차지해서 아시아의 인어로 불리던 여자이다. 아시아의 인어가 물속에서 죽다니... 문득 18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때도 이곳에서 똑같은 사고가 있었다.

  "둘의 합의에 의한 자살이거나 아니면 한쪽은 자살, 다른 한쪽은 타살이겠지."(p.99)

  최석규, 황민기, 이정국은 중학교 동창이다. 최석규는 파출소 소장이고, 황민기는 에비슨 병원의 원장이며, 이정국은 연극 공연계에서 알려진 인물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연 아니 악연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셋은 서로 얽혀 있으면서 그리 반갑지 않은 사이이다. 18년 전의 사고에서 이정국의 동생 부부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정국의 아내가 죽었다. 최석규는 경찰의 촉으로 여기에 뭔가가 있음을 감지하고 사고사로 마무리된 파일을 다시 들춰낸다.

  "난 정당한 복수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야. 정정당당한 사회가 왜 안 되는 줄 알아? 법대로 하니까 안 되는 거야. 법은 권력이야. 권력의 속성은 지배욕이고. 법은 결코 지배를 당하려고 하지 않아. 약한 자를 위해 법이 필요하다고? 아니지. 그 법을 휘두르는 자는 절대 약자가 아니거든. 예를 들어 북한이 혹은 일본이나 중국이 우리나라를 먹었어. 그럼 재벌 회장님들이 벌벌 떨 것 같아? 그들이 망할 것 같아? 그 사람들 하나도 걱정 안 할걸. 그들은 돈의 힘을 알거든. 권력을 가진 사람들 역시 돈의 맛을 알고. 서로 줄 게 있고 먹을 게 있는데, 너 같으면 피 튀기며 싸우겠냐? 차라리 술잔을 부딪치지. 법이란 게 그렇잖아. 아무것도 못 하는데 무슨 정의가 실현되겠냐고..."(p.127-128)

  오태주와 이시우는 중학교 동창이다. 오태주는 용산경찰서 강력반의 형사이고, 이시우는 이정국의 아들로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유명한 뮤지컬 배우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둘의 사이도 이제는 어색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시우의 주변에서 원인 모를 테러가 지속해서 발생한다. 심한 폭행을 당하고, 익사하고, 황산을 뒤집어쓰는... 그리고 다시 한 번 충격의 사건이 일어난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야. 그 필연에는 반드시 음모가 도사리고 있고. 그래서 우연이 겹치면 그 우연은 결국 우연이 아닌 거야."(p.167-168)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어. 형사는 가면 뒤의 얼굴을 봐야 해. 문제는 이 범인이라는 놈들이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거지만."(p.168)

  "양심에 찔려서 그런 거야. 내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구나, 그걸 아는 거지. 범죄를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굳이 복면을 쓸 필요가 없잖아."(p.183)

  "엄마는 거짓말쟁이였어요."

  그리고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딸은 엄마를 닮죠. 원해서 닮기도 하고 또 원하지 않는데 닮기도 하고."(p.310)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까? 도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이들은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로 살고 있을까? 원인을 알 수 없는 테러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것이 설령 복수라면 무슨 원한이 있었던 것일까? 추리소설 특유의 공식... 가령 명탐정 캐릭터라든가 놀랄만한 트릭이라든가 기막힌 반전이라든가 하는 것은 아직 없었지만, 가랑비에 서서히 옷이 젖어 가듯이 논리성과 개연성을 유지하면서 사건의 본질에 점차 다가가는 재미가 있다. 특히 인물과 인물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는데,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인물 간의 관계성이 핵심인 만큼 숨겨진 사연이 궁금하다. 제목이 왜 [춤추는 집]일까? 작가는 1권에서 뿌린 떡밥을 과연 제대로 회수할 수 있을까? 2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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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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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우, [재림], 황금가지, 2014.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나는 (일본식 표현으로) 본격 미스터리보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선호한다. 다른 말로 오락성보다는 메시지를 더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즐기면서 나름대로 순수문학의 감동(여운이나 그 어떤 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사회성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가? 어떻게? 보다는 왜? 에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안치우의 [재림]은 처음으로 만나는 국내 작가의 추리소설인데, 사회적인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호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재림

  만남, 그리고 시작

  동명의 제목과 다른 제목으로 단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 두 개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눈치가 빠르다면... 이미 제목이나 표지의 디자인만으로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 첫 번째 '재림'은 현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특정 종교를 건드리고 있고,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시작'은 유명무실한 재외공관을 다루며 프리퀄로서 등장하는 인물과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각각 발생하는 사건은 연쇄살인과 실종이라는 다소 심각한 분위기이나 사건을 수사하는 세 명의 각기 다른 탐정 캐릭터 사이에는 유머 코드가 심어져 있어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유신론자는 단순히 '신을 믿는 자'란 뜻이 아니에요. 초인간적인 존재를 믿는 부류는 다신론과 자연신론, 범신론도 있으니까요. 유신론은 주로 인격신, 즉 유일신을 뜻하는 거예요. 오로지 단 하나의 신! 그런데 말이죠. 유신론을 주제로 저런 살벌한 그림을 그렸다면, 혹시 형님께서 유일신 종교 쪽하고 원한이라도 있었나요?"(p.54)

  근본주의 경향이 강한 교회 제단이 쥐고 흔드는 조직 안에서라면 사소한 교리해석만으로도 신학자가 파문당하는 게 현실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해 온 스승이 오히려 예수라는 명분에 의해 파문당하고 비참한 죽음으로 시들었으니... 교계의 폐쇄성과 불관용에 절망했을 테고, 급기야 분노는 신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침묵하는 신을 보며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울분을 느꼈을 터, 그 분노가 바로 저 그림 속에서 데일 듯한 증오로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p.56)

  종교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야 하는데,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빠지면 빠질수록 피폐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보수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잣대는 세계 신학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배타성과 불관용성으로 자신들의 성벽을 구축하고 있고, 여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누구든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스승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았으나 새로운 교리 해석을 문제로 신학대에서 쫓겨나 충격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는 신앙을 버리고 울분과 증오로 산다. 그는 기성 교회를 비판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미진한 경찰 수사로 P.I.(민간조사원)를 고용하는데, 독고 소장의 사무소로 사건 의뢰가 접수된다.

  "한때 배신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베드로는 예수를 부정했던 일을 나중에 참회하게 돼요. 속죄의 의미로다가 전도에 아주 열심히 임하게 되죠.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무지 아름다운 건축물이 말해 주듯이 베드로는 기독교계에서는 대단히 추앙받는 순교자예요. 베드로의 인생을 한 줄 요약해 보면, '배신과 참회, 그리고 순교'가 되겠네요...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요, 베드로가 네로 황제 때 붙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했다더군요. 이때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내 어찌 감히 예수님이 짊어지신 신성한 십자가 형틀에 이내 미천한 몸을 맡기리오... 베드로는 '역 십자가형'을 받게 된 거예요."(p.129)

  썰렁한 유머를 사용하며 댄스 스포츠를 즐기는 그러면서도 법의학에 관심이 많은 괴짜 변호사 독고잉걸, 그와는 항상 티격태격이며 좌충우돌하는 젊은 미학자 강승주, 180cm의 장신으로 격투기에 능하며 시종일관 강인함과 진지함을 보이는 여성 권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명의 캐릭터는 저마다 강점을 선보이며 흔적을 찾아간다. 죽음의 혈흔, 배달된 베드로의 거꾸로 된 십자가, 장부 속의 명단, 개혁을 외치며 교회를 비판한 사람들... 그리고 연쇄살인.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는 또 다른 단서는 긴장감과 맞물려 명탐정의 활약을 돋보이게 한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위험한 권력이 종교일 겁니다. 폭력조차도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되면 신성한 것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인간이 만든 것인데도 인간을 초월해버리는 현상이 생긴 거죠... 권력화 된 종교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늑대가 될 수 있어요. 이미 역사적으로 종교가 인간에게 늑대였던 적이 너무 많습니다."(p.150-151)

  "작금의 한국교회는 우상숭배 투성입니다. 교회도 목사도 우상숭배입니다. 개신교가 탄생하며 주창했던 건 교회와 목회자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목사를 믿는 것인지 자문해 보세요.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 바로 이성입니다. 네? 이성이라면 주님을 부정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요? 무신론자들이 부르짖는 것도 이성이니 과학이니 아닌가요? 이성보다 앞서는 것이 믿음 아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성은 깨달음의 동력을 뜻합니다. 이성은 배움이고 철학이고 각성입니다. 믿음은 각성의 산물이고요. 어찌 믿음이 자각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거짓된 목회자들이 외치는 건 믿음이 아니라 맹신일 뿐입니다. 우매와 어리석음을 세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정신과 정반대인 겁니다. 예수님은 혁명가셨습니다.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반항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이어야 합니다."(p.155-156)

  "이웃사랑이라는 본질만 깨닫는다면 교회도 성경도 들러리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제가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 또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사실 제게는 신이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제게는 필요 없습니다."(p.181)

  여기에 등장하는 교회는 다른 사이비 이단이 아니라 보수 신앙을 강조하는 우리의 개신교 교회이다. 물질주의에 빠져 윤리성뿐만 아니라 교리성까지 잃어가는 참혹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변질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신자와의 논쟁에서 작가는 하고자 하는 말을 논리적으로 전달한다. 너무 직접적이라 은유의 미학이 없어서 아쉬움이 있고... 내용의 일부는 자유주의 신학의 맥락을 따르고 있어서 백 퍼센트의 공감을 할 수는 없지만, 교회의 문제를 세상에 제기한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영국 유학생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머나먼 타국 땅에서 첫 만남을 가진 세 탐정의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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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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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치즈키 료코, 김우진 역, [신의 손], 황금가지, 2014.

Mochizuki Ryoko, [KAMI NO TE], 2004.

  일본은 조금 다른 줄 알았는데,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내면 깊은 곳에 본능으로 순문학을 향한 정열이 있나 보다.

  그녀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기뻤다. 자신의 이름이 책 뒤에 박혀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 기뻤다. 돈은 이전 작품, 이를테면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사회파라는 이름으로 쏟아낸 가십의 확대물 같은 논픽션으로 더 잘 벌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래도 '순문학'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도취되었다.(p.9-10)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인 만큼 최근에는 선이 불분명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작품이 많아 장르의 구분이 모호하지만, 시대를 초월해서 오랫동안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필생의 역작을 쓰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순수문학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은 열정을 넘어서 자기 파괴로까지 이어진다. 모치즈키 료코의 소설 [신의 손]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니 그 이상의 열의... 광기에 가까운 정념을 가진 한 여류 작가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소설이 좋았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외부 투고 원고는 읽지 않도록 회사 방침이 정해져 있음에도 그걸 무시하고 어떤 인연으로든 손에 들어온 원고는 읽고 답신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걸 구식 편집자 기질이라고, 서툴다고, 외골수라고 했다. 그러나 미우라는 작품 속에서 재능의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닭이 달걀을 품듯 세상 속으로 날아오를 때까지 돌보는 일을 좋아했다.(p.15)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재능을 찾아 산더미 같은 원고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 편집자와 여기에 갈고닦음으로 문학이라는 인고의 창작을 하는 소설가... 소설가와 편집자의 미묘한 공생관계는 작품 전체에 고루 녹아있다. 문예지 <신문예>의 편집장 미우라 고조. 그는 아무리 팔리지 않는 문학이라고 하지만, 특유의 기질로 작가를 발굴하고 재능을 세상에 선보이는 편집자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편집장이 된 후에 얻게 된 결정권은 매 순간 판단을 내려야 하고, 연일 잇따르는 대외행사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 정직함과 성실함이 있지만, 숫자와 통계로 말하는 세상에서 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기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누군가가 미발표 소설 '녹색 원숭이'에 관해서 묻는다.

  저는 1류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2류는 1류의 아래니까 2류라면 부끄럽죠. 그렇다고 3류로 불리는 것은 활동에 지장이 되니까, 2.5류의 작가가 되고 싶어요. 독자를 활자 문화로 인도하는, 만화나 영화에서 문학으로 건너오게끔 하는 다리가 됐으면 해요. 책상 앞에서 읽는 작품이 아니라, 500엔 정도의 가격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잠시 읽고 싶은, 그래서 '아, 활자란 게 꽤 재미있는 거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해서 젊은 층을 활자 세계로 끌어당기는 발판이 되고 싶다고 할까요. 그런 작품을 쓰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가 작가가 되는 것은 활자문화에 중요한 일이에요."(p.29-30)

  10년 전에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며 한 보따리의 원고를 들고 찾아온 기스기 교코. 그녀의 손끌에서 거침없이 쓰인 글은 확실히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족함을 이유로 등단은 한 해 두 해 미뤄지고, 결국 3년 전부터 행방을 알 수 없다. 소설 '녹색 원숭이'는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에 보여준 작품이고, 지금 누군가가 그녀의 행색으로 소설과 함께 나타났다. 그녀는 어디로 숨은 것이며? 그녀를 사칭하는 여자는 누구인가?

  하지만 마키 씨는 소설을 쓰겠다고 한 당시 저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떠다니는 말들을 잡는 것이라고. 그리고 소설가란 마음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고 있다고. 그 괴물을 키우면서 작가가 되고, 그 괴물에 잡아먹힐 때 자살한다......라고요.(p.50)

  작가가 다른 작가를 동경할까요? 누가 뭘 쓰라고 하든, 무엇을 하자고 하든, 예를 덜어 남의 작품을 훔쳐 명성을 얻고자 하더라도 내 알 바 아니에요. 작가로서 존재하는 건 나 혼자뿐이고,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표현할까 결정하는 것도 나 혼자뿐이에요. 작가란 자들은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동경을 품지 않아요. 그저 자신을, 자기라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목숨을 걸어 가며 자기 안에서 발견해 나가는 것뿐이죠......(p.63-64)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이죠, 몸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는 것과 같아요. 그건 숙주를 먹이로 삼아 성장하고, 일단 성장을 시작하면 다 먹어 치울 때까진 만족할 줄 모르죠. 자유로운 사고를 허용치 않고, 때로는 사람 만나는 것조차 못 하게 막고. 숙주를 독점하고, 항상 자기만 신경 쓰라며 아우성치고, 노려보고, 춤추고. 그것과 키보드 사이의 연결 파이프로만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괴물은 커 가는데 나는 소모되고, 신경은 삐걱거려 비명을 지르고, 그래도 놈에겐 자기만이 전부여서, 내가 죽는다면 다음 숙주를 찾아 떠나고 말 거예요. 작가들은 어째서 자살하는 걸까? 인간으로서 그 괴물을 품고 있을 수 없게 된 때, 안식을 얻고 싶은 거예요. 난 지금 거기에 발을 디딘 것 같아요. 바닥 없는 늪이란 것을 알면서도 저항할 수가 없어요.(p.100-101)

  "먹고, 자고, 성욕을 채우고, 죽는다. 거기에 불만을 느낀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인생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에요. 그걸 부정하고 싶으니까 문학이 태어난 거지요. 생존과 생식, 이를테면 자위적 본능만이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그건 동시에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 되지요...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 괴물의 존재를 동경하지요.(p.369)

  [신의 손]은 모치즈키 료코의 데뷔작으로 소설과 소설가를 소재로 하는데, 순문학을 향한 소설가의 정열이나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일본 문예지의 현실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여기에 자전적인 목소리를 더하는데, 글을 쓰는 것은 마치 내면에 괴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는 직유적인 표현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숨죽이고 있던 녀석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 사람의 동경을 받으며 몸집을 키워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다.

  글을 쓰는 극한 직업...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내용으로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맴돈 느낌이다. 그리고 순수소설을 향한 작가적 미련 때문일까? 문학적으로 꾸며진 글이 넘쳐나 오히려 하드보일드가 그리울 정도였다. 조금만 힘을 빼고 절제를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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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7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가오카 히로키, 김선영 역, [교장], 비채, 2014.

Nagaoka Hiroki, [KYOJO], 2013.

  '경찰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동안 일본소설을 즐기면서 특별히 경찰소설을 구분하거나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은 형사가 등장하고, 탐정이라고 해도 전직 경찰이거나 법조계와 연관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굳이 경찰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간혹 사건이나 범죄의 해결보다 경찰조직의 성향을 강조하는 작품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누쿠이 도쿠로의 [후회와 진실의 빛](비채, 2012.)이다.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된 경찰 간부를 심문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라진 이틀](들녘, 2004.)도 떠오르고... 이번에 읽은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은 경찰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6개의 단편 모음이다.

  불심검문

  고문

  개미구멍

  조달

  이물

  배수

  책을 읽기 전에 출판사 인터넷 카페에 직접 썼던 기대 평이다.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경찰소설은 특히 강력반이나 경시청 수사 1과를 중심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해 가는 소설은 철저한 남성 우월주의와 마초들의 집합으로 묘사하는데요. 그래서 여성은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가부장적인 구조도 발견되고요(물론 이러한 금기를 깨고 어찌어찌 배치된 여경이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는 소설도 있지만). 나가오카 히로키의 소설 [교장]은 경찰학교를 배경으로 하는데,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나름의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고 경찰에 입문한 순수한 생도들이 간교하고 파렴치한 범죄와 대결하기 위해 자신을 점점 서서히 악으로 물들여 가는 과정이 기대됩니다. 이와 대비하여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과의 갈등도 기대되고요. 처음에는 송사리와 같이 나약하고 어설픈 생도가 사건을 맞이하며 어떻게 대어로 성장해 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거 같네요.

  우리나라 사복형사는 반드시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어야 하고, 슈퍼마켓에 가서 개인적인 용무를 볼 때에도 주변의 인상착의에 신경을 쓴다고 하는데요. 일본의 경찰은 네 걸음부터는 반드시 뛰어야 한다는... 이것 말고 또 어떤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생각이 너무 앞서간 것일까? 교장(敎場)이라고 하니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송이 생도가 전설적인 교관을 만남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과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순수한 꿈을 꾸고 입학한 생도가 법 집행의 현실에서 악에 물들고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극적인 전개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사회에서 다른 직업을 경험하고 두 번째로 경찰학교의 문을 두드린 이들은 이미 세상을 경험한 능구렁이이고, 철저히 계산된 속셈으로 제복을 꿈꾸는 자들이다. 전설의 교관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교관이 등장하고...

  "하나 묻겠네. 자네에게 경찰학교는 어떤 곳이지?"

  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단련하는 곳이며, 나아가 경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나 다름없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체, 라고 할까요."

  하지만 미야사카는 그렇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경찰관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학생을, 이른 단계에서 걸러내기 위한 체. 그것이 경찰학교다.(p.26)

  "동경하는 마음으로 들어왔다면 앞길이 뻔하기 때문이네. 오히려 경찰에 불만이 있어 경찰관이 된 학생이 여기에는 더 잘 맞아.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말이지."(p.28)

  "여기는 그래, 체가 맞아.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하지. 교관이 남겨야 할 인재라고 판단하면 일대일로 지도해서라도 남긴다. 여긴 그런 곳일세."(p.224)

  직업의 특수성, 사회적 책임감, 선택받은 자부심, 끈끈한 동료애, 젊음의 열정,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하지만 소설 속에 그려진 98기 단기과정 생도들은 여기에서 조금 동떨어진 듯하다. 생명의 은인인 경찰관의 아들에게 대신 신세를 갚으려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고, 뺑소니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약혼자의 복수를 계획한다. 목적 성취를 위해 코너에 몰린 동료를 외면하고, 현실과 타협하여 은밀한 거래를 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아직 벼랑 끝에 몰린 적이 없어서 삶은 새롭지 못하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는 백발의 흐린 눈을 가진 교관 가자마 기미치카.

  모두 선발의 과정을 거쳐서 입학했음에도 이들은 졸업하기 전까지 의무와 규율 아래 경직된 생활을 한다. 사소한 실수에 뺨으로 손이 날아오고, 매트 위에서 업어치기를 당하며, 팔굽혀펴기와 운동장 돌기... 등 얼차려가 부여된다. 교관의 눈에서 멀어지면 서슴없이 그 자리에서 퇴교를 명령받고... 경찰학교는 떨거지를 걸러내는 체이다. 몇몇 생도는 자신의 욕망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런데 새로 온 담임은 이전의 교관과는 비슷한듯하면서 뭔가 크게 다르다.

  "그렇다.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중죄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므로 이만한 서류 작업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무집행방해로 체포한다, 흔히 듣는 말이지. 하지만 자네들은 그 이면에 있는 업무를 생각해본 적 있나? ... 시시한 서류 작성에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지 마라. 그럴 여유가 있으면 거리로 나가 일 분이라도 오래 순찰하는 게 세상을 돕는 길이다. 취객이 시비를 걸어도 참아라. 경찰관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p.35-36)

  사건이 발생했다는 허위 신고를 진짜로 받아들여 파출소의 경찰관들이 우르르 현장으로 몰려간 뒤에 텅 빈 파출소에서 비품을 훔쳐간다. 그런 사건은 사실 종종 일어난다. 피해 물품이 자전거나 전화기 정도라면 경위서로 끝나리라. 하지만 혹여 권총이라도 도난당한다면 서장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문제다.

  "경찰관이 움직인 곳은 전부 현장이 된다."(p.85)

  "6월 15일 이후로 자네 일기장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늘어난 표현이 있었네. 그건... 소리에 관한 기술이지. 자네는 우리 교관들에게 은연중에 귀가 잘 들린다고 호소하고 싶었던 게야. 어째서 그래야만 했을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야."(p.151)

  "모르겠다면 답을 알려주마. 조력자를 만드는 것이다. 아파트나 맨션 관리인. 혹은 반상회를 맡고 있는 반장. 그리고 집집이 트고 지내는 상점 주인. 즉 관내 거주자의 생활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 제삼자. 그런 인물과 연줄을 만들어 조력자로 확보하면 된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거주자의 가정환경이나 동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p.198)

  "사람을 상처 입힌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잘 지킬 수 있지. 그런 법이다."(p.231)

  "배짱이다." 가자마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경찰 일을 하려면 배짱을 빼놓을 수 없다. 한계 상황에서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배짱이 없기 때문에 제일선에서는 무용지물이지. 그만두게 하는 게 본인을 위한 일이야. 나는 경험상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네."(p.269)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기 이전에 불필요한 대상은 가차 없이 걸러내는 곳에서 매화마다 사건과 사고는 끊이지 않고 결국 탈락 및 이탈자가 발생한다. 가자마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른 안목으로 옥석을 가려내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그만의 방법으로 훈육한다. 이들은 끝까지 잘 버텨 낼 수 있을까?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수사 기법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 들어 있어서 정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높은 가독성과는 별개로 제목만으로 정통(?) 경찰소설을 기대한다면, [교장]은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경찰조직 특유의 남성적이면서 묵직한 느낌보다는 서바이벌식의 살아남기 구조로 되어 있어서 (긴장감은 있지만)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기분이다. 반면에 오밀조밀한 구성의 짤막한 글을 좋아하거나 인물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서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만족할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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