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장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7
나가오카 히로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가오카 히로키, 김선영 역, [교장], 비채, 2014.
Nagaoka Hiroki, [KYOJO], 2013.
'경찰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동안 일본소설을 즐기면서 특별히 경찰소설을 구분하거나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은 형사가 등장하고, 탐정이라고 해도 전직 경찰이거나 법조계와 연관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굳이 경찰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간혹 사건이나 범죄의 해결보다 경찰조직의 성향을 강조하는 작품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누쿠이 도쿠로의 [후회와 진실의 빛](비채, 2012.)이다.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된 경찰 간부를 심문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라진 이틀](들녘, 2004.)도 떠오르고... 이번에 읽은 나가오카 히로키의 [교장]은 경찰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6개의 단편 모음이다.
불심검문
고문
개미구멍
조달
이물
배수
책을 읽기 전에 출판사 인터넷 카페에 직접 썼던 기대 평이다.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경찰소설은 특히 강력반이나 경시청 수사 1과를 중심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해 가는 소설은 철저한 남성 우월주의와 마초들의 집합으로 묘사하는데요. 그래서 여성은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가부장적인 구조도 발견되고요(물론 이러한 금기를 깨고 어찌어찌 배치된 여경이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는 소설도 있지만). 나가오카 히로키의 소설 [교장]은 경찰학교를 배경으로 하는데,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나름의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고 경찰에 입문한 순수한 생도들이 간교하고 파렴치한 범죄와 대결하기 위해 자신을 점점 서서히 악으로 물들여 가는 과정이 기대됩니다. 이와 대비하여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과의 갈등도 기대되고요. 처음에는 송사리와 같이 나약하고 어설픈 생도가 사건을 맞이하며 어떻게 대어로 성장해 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거 같네요.
우리나라 사복형사는 반드시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어야 하고, 슈퍼마켓에 가서 개인적인 용무를 볼 때에도 주변의 인상착의에 신경을 쓴다고 하는데요. 일본의 경찰은 네 걸음부터는 반드시 뛰어야 한다는... 이것 말고 또 어떤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생각이 너무 앞서간 것일까? 교장(敎場)이라고 하니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송이 생도가 전설적인 교관을 만남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과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순수한 꿈을 꾸고 입학한 생도가 법 집행의 현실에서 악에 물들고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극적인 전개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사회에서 다른 직업을 경험하고 두 번째로 경찰학교의 문을 두드린 이들은 이미 세상을 경험한 능구렁이이고, 철저히 계산된 속셈으로 제복을 꿈꾸는 자들이다. 전설의 교관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교관이 등장하고...
"하나 묻겠네. 자네에게 경찰학교는 어떤 곳이지?"
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단련하는 곳이며, 나아가 경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나 다름없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체, 라고 할까요."
하지만 미야사카는 그렇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경찰관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학생을, 이른 단계에서 걸러내기 위한 체. 그것이 경찰학교다.(p.26)
"동경하는 마음으로 들어왔다면 앞길이 뻔하기 때문이네. 오히려 경찰에 불만이 있어 경찰관이 된 학생이 여기에는 더 잘 맞아.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말이지."(p.28)
"여기는 그래, 체가 맞아.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하지. 교관이 남겨야 할 인재라고 판단하면 일대일로 지도해서라도 남긴다. 여긴 그런 곳일세."(p.224)
직업의 특수성, 사회적 책임감, 선택받은 자부심, 끈끈한 동료애, 젊음의 열정,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하지만 소설 속에 그려진 98기 단기과정 생도들은 여기에서 조금 동떨어진 듯하다. 생명의 은인인 경찰관의 아들에게 대신 신세를 갚으려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고, 뺑소니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약혼자의 복수를 계획한다. 목적 성취를 위해 코너에 몰린 동료를 외면하고, 현실과 타협하여 은밀한 거래를 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아직 벼랑 끝에 몰린 적이 없어서 삶은 새롭지 못하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는 백발의 흐린 눈을 가진 교관 가자마 기미치카.
모두 선발의 과정을 거쳐서 입학했음에도 이들은 졸업하기 전까지 의무와 규율 아래 경직된 생활을 한다. 사소한 실수에 뺨으로 손이 날아오고, 매트 위에서 업어치기를 당하며, 팔굽혀펴기와 운동장 돌기... 등 얼차려가 부여된다. 교관의 눈에서 멀어지면 서슴없이 그 자리에서 퇴교를 명령받고... 경찰학교는 떨거지를 걸러내는 체이다. 몇몇 생도는 자신의 욕망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런데 새로 온 담임은 이전의 교관과는 비슷한듯하면서 뭔가 크게 다르다.
"그렇다.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중죄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므로 이만한 서류 작업이 발생하는 것이다. 공무집행방해로 체포한다, 흔히 듣는 말이지. 하지만 자네들은 그 이면에 있는 업무를 생각해본 적 있나? ... 시시한 서류 작성에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지 마라. 그럴 여유가 있으면 거리로 나가 일 분이라도 오래 순찰하는 게 세상을 돕는 길이다. 취객이 시비를 걸어도 참아라. 경찰관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p.35-36)
사건이 발생했다는 허위 신고를 진짜로 받아들여 파출소의 경찰관들이 우르르 현장으로 몰려간 뒤에 텅 빈 파출소에서 비품을 훔쳐간다. 그런 사건은 사실 종종 일어난다. 피해 물품이 자전거나 전화기 정도라면 경위서로 끝나리라. 하지만 혹여 권총이라도 도난당한다면 서장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문제다.
"경찰관이 움직인 곳은 전부 현장이 된다."(p.85)
"6월 15일 이후로 자네 일기장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늘어난 표현이 있었네. 그건... 소리에 관한 기술이지. 자네는 우리 교관들에게 은연중에 귀가 잘 들린다고 호소하고 싶었던 게야. 어째서 그래야만 했을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야."(p.151)
"모르겠다면 답을 알려주마. 조력자를 만드는 것이다. 아파트나 맨션 관리인. 혹은 반상회를 맡고 있는 반장. 그리고 집집이 트고 지내는 상점 주인. 즉 관내 거주자의 생활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 제삼자. 그런 인물과 연줄을 만들어 조력자로 확보하면 된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거주자의 가정환경이나 동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p.198)
"사람을 상처 입힌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잘 지킬 수 있지. 그런 법이다."(p.231)
"배짱이다." 가자마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경찰 일을 하려면 배짱을 빼놓을 수 없다. 한계 상황에서 싸워보지 않은 사람은 배짱이 없기 때문에 제일선에서는 무용지물이지. 그만두게 하는 게 본인을 위한 일이야. 나는 경험상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네."(p.269)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기 이전에 불필요한 대상은 가차 없이 걸러내는 곳에서 매화마다 사건과 사고는 끊이지 않고 결국 탈락 및 이탈자가 발생한다. 가자마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른 안목으로 옥석을 가려내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그만의 방법으로 훈육한다. 이들은 끝까지 잘 버텨 낼 수 있을까?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수사 기법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 들어 있어서 정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높은 가독성과는 별개로 제목만으로 정통(?) 경찰소설을 기대한다면, [교장]은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경찰조직 특유의 남성적이면서 묵직한 느낌보다는 서바이벌식의 살아남기 구조로 되어 있어서 (긴장감은 있지만)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기분이다. 반면에 오밀조밀한 구성의 짤막한 글을 좋아하거나 인물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서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만족할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