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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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노진선 역,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비채, 2014.

Jo Nesbo, [SORGENFRI](NEMESIS), 2002.

  작년에 작가의 방한(이때 사인회에 가서 직접 사인을 받았다) 이후 일 년 만에 읽은,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 네 번째인 [네메시스]이다. 같은 의미로 '복수의 여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은연중에 커다란 암시를 하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이 시리즈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몰입해서 읽게 하는 매력이 있다. 책을 손에 들어 단숨에 읽기를 바랐지만, 좋은 문장과 재미있는 글을 읽을 때마다 빠르게 읽어버리면 아까운(?) 생각이 있어 적당한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읽은 작품이다.

  해리에게 음주 문제가 있다는 것은 경찰청 직원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이유만으로 공무원을 해고할 수 없다. 취중 근무만이 해고 사유였다. 지난번 해리의 알코올 중독이 도졌을 때 경찰청 윗선에서는 그를 해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강력반 책임자인 비아르네 묄레르 경정은 당시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달라며 해리를 감쌌다. 그 상황의 특수성이란 에스프레소 머신 위쪽에 걸린 사진 속 주인공인 엘렌 옐텐이 아케르셀바 강 옆에서 야구방망이로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해리는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엘렌의 죽음을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다.(p.30)

  "지금까지 내가 사랑한 여자는 딱 세 명입니다." 해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첫 번째 여자는 학창시절에 사귀었는데, 난 그 애와 결혼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일이 완전히 틀어져버렸어요. 그 친구는 나와 헤어지고 한참 후 자살했습니다. 그러니 그 친구의 자살은 우리가 헤어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죠. 두 번째 여자는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쫓던 범인에게 살해되었어요. 내 파트너였던 엘렌도 그렇게 죽었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주위의 여자들은 다 죽어요."(p.302)

  북유럽 스릴러를 대표하는 이 시리즈의 특징은 어느 한 권을 먼저 읽어도 전후 문맥을 통해 앞뒤 사건을 짐작하게 하는 작가의 배려가 돋보인다. 그럼에도 순서대로 읽는 것이 더 나은 재미를 보장하고 있어서 최근에 출간한 [데빌스 스타](비채, 2015.)를 뒤로하고 이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흔히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와 [네메시스] 그리고 [데빌스 스타]를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3부작이라고 하는데, 각각의 개별사건 이외에 해리의 파트너였던 엘렌 옐텐의 죽음과 연관된 불법무기밀매상인 프린스와의 대결이라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가능하면 세 권은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한다).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스노우맨](비채, 2012.)에서는 해리 홀레 반장의 피폐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사랑하는 연인 라켈의 곁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헤어져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가? 동물적인 감각과는 별개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여기에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이미 세월이 흐른 뒤의 평론이지만... [박쥐](비채, 2014.)에서는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을, [레드브레스트]에서는 개인의 가정사를 토대로 하여 노르웨이의 어두운 근대사를,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중 삼중으로 얽혀있는 심도 있는 트릭으로 전형적인 스릴러의 형태를 보이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거네요. 한 남자가 백주대낮에 사람들로 붐비는 은행에 걸어 들어가 200만 크로네를 강탈하고, 여자까지 죽였다. 그러고는 유유히 걸어 나가 노르웨이 수도 한복판에 있는, 비교적 인적이 드물기는 해도 차량 통행량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경찰서에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로 도망쳤다. 그리고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 경찰은 수사를 계속할 단서가 하나도 없다."(p.28)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수사 중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은행을 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조금 다른가 보다. 연이은 은행강도와 전설적인 은행털이범이 등장하고 있으니... 아무튼, 사건은 한 남자가 대낮에 은행에서 돈을 강탈하고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르고 사라진다. 단서는 은행 내의 CCTV뿐이고 목격자는 거의 없다. 사건의 해결을 위해 강력반 형사 해리 홀레와 강도수사과 베아테 뢴은 파트너로 한 팀을 이룬다.

  슬슬 시작해볼까? 어떤 여자와 저녁 식사를 했는데 다음 날 그 여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상상해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S2MN(p.193)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p.550)

  소설은 복합 구성으로 또 하나의 사건을 첨가하고 있는데, 해리는 개인적인 일로 함정에 빠져 용의자가 된다. 예전에 잠시 만나던 연인 안나와의 저녁 식사 후 그녀는 자살한다. 죽음의 의문과 수상한 메시지로 혼자서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향한 목줄은 조여지고... 그는 누명에서 벗어나 두 가지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복수에 관한 다양한 서술...

  네메시스 여신이야... 복수의 여신. 그러고 보니 복수도 자살의 흔한 동기라네. 자신의 삶이 이렇게 비참해진 것은 누군가의 탓이고, 그러니 자살을 함으로써 상대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거지. 베르톨 그리머도 자살했다네. 아내를 죽인 후에 말이야. 아내가 바람을 피웠거든. 복수, 복수, 복수. 인간만이 복수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아나?(p.131)

  "주위를 둘러봐. 인간은 앙심을 품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복수와 응징. 그거야말로 학창 시절에 얻어맞고 다니던 땅꼬마가 훗날 억만장자가 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를 봐. 우리 경찰이야말로 차갑고 이성적인 응징으로 위장한 이 사회의 불타오르는 복수 아니겠어? 그게 우리 직업이라고."(p.257)

  "'코케 페르 코케koke per koke'. 머리에는 머리로. 피 흘리는 복수를 뜻하는 알바니아식 표현이지. 복수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험한 마약이야."(p.310-311)

  복수. 원시적이라고? 천만에. 복수는 사고하는 인간의 반사작용이야. 행동과 일관성의 복잡한 혼합물로, 지금까지 인간 외에 다른 종은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수의 실행은 그 자체로 너무 효과적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가장 복수심이 넘치는 사람만이 살아남았지. 복수 아니면 죽음. 서부 영화 제목 같지? 하지만 입헌국을 만든 것은 보복의 논리라는 걸 명심하라고. 눈에는 눈, 죄를 지은 자는 지옥에서 불타거나 최소한 교수대에 매달린다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지. 복수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기초야, 해리.(p.456-457)

  기독교의 윤리는 복수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대변해서 복수해주는 위대한 존재야.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 불에 타게 되리라. 그거야말로 일반 범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완전한 복수 행위지.(p.593)

  다행히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사소한 복수심을 가져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해치고자 하는 분노의 복수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 이 책에서는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이라는 제목답게 복수의 칼날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통쾌함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질없음을 시사한다. 작가는 성실한 자료 수집으로 복수에 관한 철학, 심리학, 종교, 국제관계...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포함하여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잘 만들어진 스릴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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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가노 료이치, 한희선 역, [환상의 여자], 황금가지, 2015.

Kanou Ryouichi, [MABOROSHI NO ONNA], 2003.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안타깝게도 아직 현실에서 환상의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더구나 일본의 하드보일드 서스펜스는 그리 익숙하지 않아 [환상의 여자]는 이런저런 신비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마치 기름을 바짝 짜낸 후의 담백함처럼 서술형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특유의 가벼움으로 경쾌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소함이 발목을 잡은 것일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이미 [제물의 야회](한희선 역, 이미지박스, 2008.)... 등으로 일본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에게 잘 알려진 가노 료이치는 이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이선희 역, 창해, 2008.)과 함께 1999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공동으로 받았다고 하는데, 들리는 소문과 비교하여 국내 번역은 다소 늦은듯하다.

  "......즐거워."

  냄비 건너편에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불륜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끼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이 여자와 있을 때야말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몸을 맡기고 있으면 참을 수 없이 마음이 편하고 감미롭고 애절하고 그리고 어딘가 죄의 고통이 잠재하고 있는 것조차도 기분이 좋은 착각.(p.55)

  어린 시절에 부모와 관련해서 어두운 기억을 가진 남자가 있다. 그는 과거를 잊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린다. 좋은 대학을 나와 사법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되어 법률회사 대표의 딸과 결혼을 한다. 법치와 사회정의를 외치며 승승장구하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퇴근 후 들린 선술집에서 고바야시 로쿄라는 여자를 만난다. 불륜을 정당화하거나 죄책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여자에게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열정으로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한 가지 상담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내일 다시 전화할게."(p.57)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르고, 스모토 세이지는 아내와 이혼하고 장인의 회사에서 나와 새로 사무소를 개업한다. 한동안 술에 취해 떠나간 연인의 행방을 뒤쫓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갑자기 왜? 라는 의문과 함께 그리움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길에서 우연히 그녀와 재회한다.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간단히 연락처만 주고받는데, 그날 저녁 그녀가 남긴 음성 메시지... 그리고 다음 날 살해된 채 발견된다. 그녀에게 내일은 없었다.

  끄덕였지만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양친을 미워하기는 해도 내심 사랑하기도 했다. 부모자식 관계는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어진 듯 보일 때에는 언제나 본인들밖에 모르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끊지 않는 편이 마음의 부담은 훨씬 적다. 친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향도 그렇다.(p.81)

  피해자의 주변 인물로 경찰 조사를 받으며 죽음을 눈으로 확인한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인데, 하루아침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왜 떠났는지?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변호사의 촉각을 긴장하게 한다. 그녀는 가족이나 왕래하는 친척이 없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계를 끊고 살아야만 했을까? 대리인으로 장례를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고향을 찾아 행적을 뒤밟는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고바야시 로쿄가 아닐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알던 그녀는 누구인가?

  나는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 35년을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인생이라는 뭔가 대단한 것을 사는 게 아니라 나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침을 살고 낮을 살고 밤을 사는 것뿐이다.

  어려운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마 그뿐이리라.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버팀목이었다. 그녀는 사라지고 난 후 그것을 직접 제 손으로 쌓아올렸다.(p.549)

  나와 만났을 때 그녀는 고독했다. 그전부터 계속 고독했고, 나와 만났을 때도 고독했고,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내고 있어도 또한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몇 분의 1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만을 밀어붙이려 했을 뿐.

  나는 대체 그녀에게 뭐였을까? 잃고 나서 계속 그것을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만나서 묻고 싶었다. 나는 네게 뭐였지? 그렇게 문고 싶다고 계속 바랐다. 그러나 대답은 아마 그녀가 사라진 것 자체로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다만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을 뿐이다.(p.549)

  [환상의 여자]는 시종일관 비밀스러운 한 여인의 진짜 정체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세키네 쇼코의 정체를 찾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박영란, 시아, 2000.)(이영미 역, 문학동네, 2012.)가 연상된다. 또한, 기묘한 행적을 보이는 기스기 교코의 행방을 뒤쫓는 모치즈키 료코의 [신의 손](김우진 역, 황금가지, 2014.)이 떠오르기도 하고... 하지만 비슷한 설정이라고 해도 사회파 메시지가 강조되거나 문학성의 경계에 놓인 이전의 작품과는 다르게 여기에서는 하드보일드의 글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남자의 순정 그리고 가족의 상처를 포괄적으로 다루어 인생의 의미를 뒤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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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출간 기념 이벤트

'해리 홀레 샷 잔'을 드려요.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50417_star&start=pbanner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826873

[데빌스 스타]는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인데요.
이번에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3부작을 완성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군요.
해리는
사건을 마주하면 동물적인 감각으로
형사의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여 움직이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하나둘 주위의 동료를 잃어가는 아픔으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하는데요.
주인공이 마시는 술은 짐빔이고,
이것을 기념해서 '해리 홀레 샷 잔'(300명 추첨)을 준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에게 행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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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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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노리즈키 린타로, 박재현 역, [녹스 머신], 반니, 2014.

Norizuki Rintaro, [KNOX'S MACHINE], 2013.

2014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일본은 책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유명 작가를 기념하거나 상업의 목적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의도로 만들었지만, 이것이 세월의 흐름으로 권위를 형성하고 명성을 갖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상은 1935년부터 나오키 산주고(1891-1934)의 업적을 기려 대중문학의 작품에 주는 '나오키상'(순수문학의 작품에 주는 아쿠타가와상), 2004년부터 전국 서점 직원이 뽑은 가장 팔고 싶은 책으로 주로 문학성과 함께 엔터테인먼트의 요소를 갖춘 작품이 선정되는 '서점대상'. 그리고 1988년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가이드로 제정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순위이다. 각각의 상은 여기저기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하고 있어서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녹스 머신

  들러리 클럽의 음모

  바벨의 감옥

  논리증발 - 녹스 머신2

  4개의 중, 단편으로 이루어진 노리즈키 린타로의 [녹스 머신]은 이러한 이유로 출간부터 큰 관심이 있었다. 더구나 SF와 추리의 결합이라니! 책을 읽으면서 소문으로 들은 작가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추리문학의 방대한 사전조사와 포괄적인 물리학의 지식은 두말할 필요 없이 참신하고 기발하고 개성 강하다. 물론 재미있다.

  5.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인의 두뇌는 너무 많은 지식을 쌓은 반면 도덕은 전혀 익히지 않았다"라는 궤변에 가까운 오래된 서양 속담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책을 펼쳐 '친루의 찢어진 눈' 식의 기술이 보인다면 바로 책을 덮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책은 졸작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할 때 졸작이 아니었던 것은 어네스트 해밀턴 경의 [멤와스의 4개의 비극]뿐이다.(p.15)

  메타 분석이라고 해야 하나? 작가는 황금기 영미권 추리소설(앵글로색슨 탐정소설)을 문헌 연구하여 소설의 뼈대를 세우고 있는데, 첫 번째인 '녹스 머신'은 로널드 A. 녹스의 생애와 그가 쓴 작품을 가지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2058년 중국 상하이 대학 인문학부에서 문학수리해석을 전공한 유안 친루는 국가과학기술국이 발부한 이메일 소환장을 받는다. 문학수리해석이란 시나 소설에 사용되는 단어와 관용구를 정밀 분석하는 학문인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작가 고유의 문체를 통계학 기법으로 완벽히 되살려 낼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오토포에틱스'라는 기계를 통한 문학이 형성되어 셰익스피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작이 연이어 출간되고, 이것은 이야기 생성 방정식과 결합하여 심지어 노벨문학상까지 받게 된다. 그동안 인간의 뇌와 손으로 창작하던 문학은 내용이나 비용대비 효율 면에서 결코 경쟁이 될 수 없어 빠르게 도태한다.

  "말하자면, 갈라진 과거의 세계 B에서 미래 방향으로 시간여행을 해도 세계 B의 미래로밖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에 성공해도 세계 A에 속하는 현재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의 경우에도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동일 시간 선상에 있다고 해도 일단 미래로 이동한 시간여행자는 다시금 현재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여행을 떠나면 도착한 시점에 현재가 두 갈래로 나뉘어 역시 세계 A와 세계 B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거꾸로 되돌아오는 시간여행자는 그 시점에서 세계 B에 속하게 되고 우리들의 세계 A와는 영원히 무관한 존재가 됩니다."(p.32-33)

  그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으로 대표되는 20세기 탐정소설을 연구 중인데, 작법과 관련하여 '녹스의 십계'를 적용하여 녹스장이라는 문학수리해석 알고리즘을 만들고 5항 No Chinaman을 '숨겨진 변수'로 삼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히 시간여행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는데... 블랙홀과 타임 패러독스의 문제를 제외하고 라도 과연 양방향 시간여행은 가능할 수 있을까? 녹스는 [탐정소설 걸작선] 1928년판의 서문에서 왜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을까?

  들러리 클럽은 명탐정의 조수나 친구들이 만든 모임으로,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다분히 편안한 친목단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탐정소설을 둘러싼 환경 자체가 지금보다 한결 느긋하고 여유로웠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데 크리스티 여사 유괴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이후부터 클럽의 성격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마치 지상과제라도 되는 듯 들러리의 전통이나 탐정소설의 건전화에 혈안이 된 비밀결사 비슷한 집단으로 변해버린 것이다.(p.81-82)

  두 번째로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1929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11일간의 의문의 실종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그녀의 작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가지고 발칙한 상상을 들려준다. 들러리 클럽은 존 H. 왓슨 박사를 회장으로 우리가 알만한 아서 헤이스팅스 대위, 밴 다인 변호사, 아치 굿윈, 크리스토퍼 저비스 박사, 해롤드 메리필드, 라이오넬 타운센드, 줄리어스 리커드, 머빈 번터... 등을 임원과 상임이사로 하는 비밀 모임이다.

  "나는 이런 애매 모호한 여학생 취향의 탐정소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네. 독자가 탐정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도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지. 원래 탐정이란 오귀스트 뒤팡이나 셜록 홈스처럼 뛰어난 지성과 개성을 겸비한 위대한 인물이어야 해. 그렇기 때문에 나처럼 진솔한 들러리의 존재가 빠질 수 없는 거지. 그러나 만일 크리스티 여사의 글쓰기가 인정된다면 경솔한 독자와 새로운 것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평론가가 몰려들 테고, 영국 탐정소설계는 이런 종류의 너절한 소설들에 점령당하고 말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 같은 들러리는 말할 것도 없고 위대한 명탐정이 설 자리도 뿌리째 빼앗길 것은 불 보듯 뻔해. 아무리 설득한들 그 같은 미래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것뿐이야."(p.99-100)

  이들은 모두 명탐정 셜록 홈스나 에르큘 포와로... 등의 친구이자 동료로 그동안 수기식 구조의 탐정소설에 출연해서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새로운 시도는 전통적인 규칙이나 작법에서 벗어나 조수의 역할을 점차 축소 제외하였는데, 여기에 불만과 위기를 느낀 이들은 비밀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누군가 그녀를 암살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데...

  갑자기 교신 라인이 열리고 파트너의 사념이 날아들었다. 파트너란 나의 경상鏡像(거울에 비친 상) 인격을 말한다. 사이클로프스인의 정신파동 스캐닝(마인드 리딩)에 대한 방어용 수단으로 만들어진 쌍둥이 형제다... 나(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이클로프스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갈라테이아에 행성 간 무역상으로 위장 잠입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행성 갈라테이아는 지구와 흡사한 생태계를 갖고 있다. 이 행성에는 지구에서 이미 멸종된 생물자원이 풍부하게 서식한다. 천문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행성이라 어떻게 해서든 지구의 편으로 만들어 둬야 했다.(p.119-121)

  세 번째로 '바벨의 감옥'은 일본어 세로쓰기에 맞춘 트릭으로 구성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난해하다. '바벨'이란 성경의 창세기 11:9에서 '언어의 혼잡'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우주 어딘가의 공간인지? 가상의 공간인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사이클로프스인의 정신파동 스캐닝은 3차원에서의 공간 처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의식에 가상의 책이라는 형식을 주고 나와 파트너의 인격 데이터를 격리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종이 책장을 넘겨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들이 이해 가능한 범위 밖에 있다.

  검열관은 우리 지구인들이 전자책을 읽도록 2D의 모니터 화면을 스크롤하거나 슬라이드 쇼 같은 형식으로 의식을 스캐닝한다. 그렇다면 종이의 앞과 뒤로 등을 맞대고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책장을 넘길 때 인쇄된 문자와 기호가 원호상의 궤적을 그리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 그들이 가진 맹점이 있다. 아니, 구두점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 공간은 32자 X 25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행수와 글자 수를 지정하면 공간의 좌표를 고정할 수 있다.(p.140-141)

  작품의 구조상 다른 세 개의 단편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을 텐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겠다.

  지금까지 여러 편의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나는 어느 사이엔가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깜빡 잊고 있었다. 벌써 몇 년 전 일로, 퀸 이라는 이름의 신사가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뛰어난 작품을 읽어온 독자라면 내가 초기 작품 안에서 핵심 부분마다 '독자의 도전' 코너를 삽입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소설 한 편을 완성시켜 편집을 마치고 교정을 모두 끝낸 뒤 출판사의 누군가(실로 명석한 사람이다)가 늘 게재되던 '도전' 코너가 누락되었다는 걸 귀띔해주었다는 사실뿐이다. 당혹감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누락분을 보완한 뒤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전 작품을 살펴보았고, 이전 책에서도 깜빡 잊고 '도전' 코너를 싣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p.157-158)

  네 번째로 '논리증발'은 '녹스 머신'의 속편으로, 이번에는 엘러리 퀸의 작품활동과 국명 시리즈를 가지고 대미를 장식한다. 2073년, 인도계 여성 프라티바 후마얀은 골플렉스사 전자책 사업부의 원전관리 책임자인데, 여름휴가 중에 팔로알토에 있는 본사로부터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골플렉스는 지구에 존재하는 온갖 정보를 상호작용을 통해 수집하고 보관 및 관리하는 복합지성체이다. 마치 갓난아기의 뇌 신경 조직처럼 끊임없이 성장하여 비록 민간기업이지만, 잠재적인 지배력과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전부터 양자화된 텍스트 일부가 불타 손실되고 있다. 문제의 근원을 추적하니 20세기 전반에 쓰인 미국의 탐정소설이고,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 중에서 1933년에 발표한 [샴쌍둥이 미스터리]이다.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단'은 반反 '오토포에틱스'를 주장하는 비합법 활동가 그룹이 조직한 사이버 테러집단이다. 하이테크 기술의 진보에 반기를 든 신 러다이트운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인문주의 문학의 복권과 저작권 보호를 호소하며 웹상에서 전자 텍스트에 수차례 공격을 가한 바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목표는 우아하고 섬세한 종이책 시대를 되살리기 위해 현대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인 골플렉스의 양자 네트워크로 구성된 거대한 전자 텍스트의 기록보관소를 송두리째 불태워 없애는 것이었다.(p.177-178)

  양자 네트워크의 구축과 '오토포에틱스'의 끊임없는 진화는 20세기 이전의 오리지널 문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웹상에는 무수히 많은 자동 이야기 생성 프로그램이 있어서 날마다 대량의 개작과 변이를 토해내고 있고, 이외에도 '좀 벌레'라고 불리는 데이터 포식 바이러스가 전자 텍스트를 갉아먹어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을 내고 있다. 더 나아가 '반 오토포에틱스'를 주장하며 종이책 시대를 되살리고자 하는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단'의 공격은 아주 치명적이다. 그녀는 불을 끄기 위해 No Chinaman이라는 과거에 시간여행을 한 남자를 찾아간다.

  작가는 마치 이 한 권의 책으로 미스터리 소설은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널드 A. 녹스,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의 작품 세계와 더불어 수많은 명탐정의 조연에 관한 깨알 같은 서술은 그가 작가 이전에 얼마나 많은 탐정소설을 애독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우주물리학과 양자역학에 관한 이해도 충만하여 책을 읽는 내내 복잡함으로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였지만, 작년과 올해에 개봉한 영화 <인터스텔라>와 <타임 패러독스>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더 재미있다. 도넛 모양으로 회전하는 블랙홀, 시간여행에서 생기는 모순, SF와 일본식 미스터리의 완벽한 결합은 정말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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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품격
신노 다케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윌북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신노 다케시, 양억관 역, [공항의 품격], 윌북, 2012.

Shinno Takeshi, [APOYAN], 2008.

  코드가 맞은 것일까?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숨은 명작을 찾았을 때의 기분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작년 12월 국내 모 항공사의 '땅콩 회항' 사건이 쟁점화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었을 때에 단순히 [공항의 품격]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 이상의 재미를 안겨준 작품이다.

  작가의 경험은 글을 쓰는 데에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가 보다. 신노 다케시는 처음으로 만나는 작가인데, 대학을 졸업한 후에 여행 회사에서 6년간 일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3년이 넘는 세월을 전철과 캡슐 호텔 등을 전전하는 노숙생활을 하고 돌아와 작가로 화려하게 데뷔하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공항에 파견되어 출국하는 여행객을 돕는 여행사 직원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아무래도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듯하다.

  웃어, 웃어, 아포양

  패밀리 비즈니스

  온 타임

  생쥐와 탐정

  황금돼지

  불완전 여행

  공항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크고 작은 분쟁, 복잡한 일상을 뒤로하고 잠시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의 기쁨, 남자와 여자의 다른 생각, 가족에 관해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듯한 좌충우돌 6개의 에피소드는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유쾌한 휴먼 드라마를 완성한다.

  '아포'란 에어포트의 일본식 발음을 줄인 것이다... 아포양은 원래 나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행의 출발점인 공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여객을 무사히 보내는 공항 일 처리의 전문가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회사 내부에서 공항 관련 업무의 위상이 달라지면서 상황은 변했다. 매출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장을 경시하는 풍조 때문이다. 예전에는 여자 스태프도 모두 본사에서 채용한 정사원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현지 채용의 계약직 사원이다. 이것만 보아도 회사에서 현장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다.(p.18-19)

  이제 곧 서른 살이 되는 엔도 게이타는 다이코 투어리스트의 입사 8년 차로 취직 빙하기의 좁은 관문을 뚫고 들어와 본사에서 나름 전도유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하루아침에 나리타 공항으로 발령이 나서 여행객의 출국을 돕는 '아포양'이 된다. 더구나 6년을 사귄 여자친구로부터 마마보이 같다는 말과 함께 이별을 통보받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직장 내 교육을 지도하는 선임은 뭐가 들었는지 빵빵한 주머니의 무게로 바지가 내려가 셔츠 자락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꼴 사나운 모습으로 "웃어, 웃어"를 연발하고 "요즘 즐기고 있어?"라는 다소 엉뚱한 물음을 해온다. 미래의 비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아무런 실적을 쌓을 수 없는 공항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당시에 나는 여객과 직접 접촉하는 일이 없었다. 나에게 여객이란 컴퓨터 화면에 뜨는 알파벳 문자에 지나지 않았다. 울고 웃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의식이 희박했다. 그때 비로소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선명한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런 에피소드를 선배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게 바로 아포양이라고 했다. 나름 성깔이 있어 공항에 잘 적응하지 못하지만 여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고, 본사에서 범한 사소한 잘못을 원만하게 덮어주는 전문가를 아포양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긴 팔다리를 펼쳐 공을 막아내는 골키퍼를 연상했다. 그리고 믿음직한 그 모습을 동경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나도 공항에서 근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p.42-43)

  아포양이 하는 일은 예약된 고객이 정해진 일정대로 비행기에 탑승해서 무사히 여행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간혹 본사의 실수나 어떤 착오로 인해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경우 즉시 현장에서 해결해야 한다. 일본 사회의 직업윤리나 사회 구조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데, 이들은 고객을 감동하게 해 웃는 얼굴로 출발하게 하는 것이 사명이고 책임이고 자부심이다.

  "우리의 역할은 고객이 웃는 얼굴로 출발하게 만드는 거야. 그렇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출발을 막으려 한 거잖아. 그것뿐이야."(p.49)

  "자네한테 말한 적이 없었나? 나는 고객을 가족이라 생각해. 가족이라 생각하고 대하는 자세가 중요해. 그래서 노사카 씨는 어머니지. 자네도 그런 마음으로 대해주길 바라서 한 말이었어."(p.113)

  나는 아래로 축 늘어진 셔츠 자락을 황망히 바지 안으로 밀어 넣은 후 벨트를 잡고 바지를 끌어올렸다. 바지 주머니가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지갑, 휴대전화, 손거울, 근무 일정표, 무설탕 껌, 안전핀, 볼펜, 메모지. 필요한 걸 하나둘 집어넣다 보니 어느새 이마이즈미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 무게로 바지가 내려가고 셔츠 자락이 비어져나오는 것마저 똑같다.(p.121)

  "여자들만 있는 사무실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 마찰이나 알력이 생겨. 개인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이번 사건은 그런 것 때문에 뒤틀린 마음이 표출된 거야. 물론 그 배후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야. 가벼운 다툼이라면 화를 내면 되지만, 그 반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은 풍파를 일으키지 말고 내버려두는 편이 좋아. 귀신이 씐 듯한 사건이니까 같은 일이 반복될 염려도 없어."(p.221-222)

  "우리 세대는 황금돼지띠라서 베이비붐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듣고 보니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고도성장기 때 자랐기 때문에 생활이 점점 나아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고,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계속 성장했지만 마침내 거품경제에 이르렀지. 물론 그 거품은 꺼지고 말았지만 우리 세대는 연금을 제대로 받았어. 어려운 시기에 돈을 챙기고 도망치는 꼴이었어도 그야말로 평생 돈에 궁하지 않다는 황금돼지의 복이 아닐까 싶어."(p.243)

  "그건 당연한 일이잖소. 여행이란 이런 불편을 즐기는 것이니까요. 완벽한 여행사라면 재미가 없는 겁니다."(p.327)

  어느 한순간에 사랑도 진급도 인간관계도 모두 막혀버린 절박한 상황에서 각각의 사연을 가진 여행객이 찾아온다. 재입국 비자가 없는 브라질 국적의 일본계 소녀는 비행기를 타면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일 년에 두세 차례 예약하지만, 항상 비행기를 놓치는 노부인은 이번에도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가족 여행에서 여권을 놓고 오는 바람에 홀로 남겨진 축구 소년은 공항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예약이 사라져 출발하지 못하는 신혼부부, 매번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단골 여행자... 과연 이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경쟁 사회에서 어쩌면 낙오자와 다름없는 공항 파견 근무자들 사이에서 몇 달간의 생활은 교훈으로 다가온다. 웃을 일이 없지만, 고객을 대하며 억지로 지은 미소는 어느 순간에 진심으로 바뀌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혼자서 고군분투 하지만, 결국에는 팀원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꼴사나운 선배의 모습이 이제는 내 모습이 되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고하며 떠나는 연인을 향해 아포양으로 기꺼이 배웅한다. 순간순간 빵 터지는 웃음과 인생에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 아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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