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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요 네스뵈, 노진선 역,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비채, 2014.
Jo Nesbo, [SORGENFRI](NEMESIS), 2002.
작년에 작가의 방한(이때 사인회에 가서 직접 사인을 받았다) 이후 일 년 만에 읽은,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 네 번째인 [네메시스]이다. 같은 의미로 '복수의 여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은연중에 커다란 암시를 하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이 시리즈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몰입해서 읽게 하는 매력이 있다. 책을 손에 들어 단숨에 읽기를 바랐지만, 좋은 문장과 재미있는 글을 읽을 때마다 빠르게 읽어버리면 아까운(?) 생각이 있어 적당한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읽은 작품이다.
해리에게 음주 문제가 있다는 것은 경찰청 직원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알코올 중독이라는 이유만으로 공무원을 해고할 수 없다. 취중 근무만이 해고 사유였다. 지난번 해리의 알코올 중독이 도졌을 때 경찰청 윗선에서는 그를 해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강력반 책임자인 비아르네 묄레르 경정은 당시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해달라며 해리를 감쌌다. 그 상황의 특수성이란 에스프레소 머신 위쪽에 걸린 사진 속 주인공인 엘렌 옐텐이 아케르셀바 강 옆에서 야구방망이로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해리는 파트너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엘렌의 죽음을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다.(p.30)
"지금까지 내가 사랑한 여자는 딱 세 명입니다." 해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첫 번째 여자는 학창시절에 사귀었는데, 난 그 애와 결혼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일이 완전히 틀어져버렸어요. 그 친구는 나와 헤어지고 한참 후 자살했습니다. 그러니 그 친구의 자살은 우리가 헤어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죠. 두 번째 여자는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쫓던 범인에게 살해되었어요. 내 파트너였던 엘렌도 그렇게 죽었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주위의 여자들은 다 죽어요."(p.302)
북유럽 스릴러를 대표하는 이 시리즈의 특징은 어느 한 권을 먼저 읽어도 전후 문맥을 통해 앞뒤 사건을 짐작하게 하는 작가의 배려가 돋보인다. 그럼에도 순서대로 읽는 것이 더 나은 재미를 보장하고 있어서 최근에 출간한 [데빌스 스타](비채, 2015.)를 뒤로하고 이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흔히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와 [네메시스] 그리고 [데빌스 스타]를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3부작이라고 하는데, 각각의 개별사건 이외에 해리의 파트너였던 엘렌 옐텐의 죽음과 연관된 불법무기밀매상인 프린스와의 대결이라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가능하면 세 권은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한다).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스노우맨](비채, 2012.)에서는 해리 홀레 반장의 피폐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사랑하는 연인 라켈의 곁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헤어져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가? 동물적인 감각과는 별개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여기에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이미 세월이 흐른 뒤의 평론이지만... [박쥐](비채, 2014.)에서는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을, [레드브레스트]에서는 개인의 가정사를 토대로 하여 노르웨이의 어두운 근대사를,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중 삼중으로 얽혀있는 심도 있는 트릭으로 전형적인 스릴러의 형태를 보이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거네요. 한 남자가 백주대낮에 사람들로 붐비는 은행에 걸어 들어가 200만 크로네를 강탈하고, 여자까지 죽였다. 그러고는 유유히 걸어 나가 노르웨이 수도 한복판에 있는, 비교적 인적이 드물기는 해도 차량 통행량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경찰서에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로 도망쳤다. 그리고 나라의 녹을 먹는 우리 경찰은 수사를 계속할 단서가 하나도 없다."(p.28)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수사 중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은행을 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조금 다른가 보다. 연이은 은행강도와 전설적인 은행털이범이 등장하고 있으니... 아무튼, 사건은 한 남자가 대낮에 은행에서 돈을 강탈하고 '불필요한 살인'을 저지르고 사라진다. 단서는 은행 내의 CCTV뿐이고 목격자는 거의 없다. 사건의 해결을 위해 강력반 형사 해리 홀레와 강도수사과 베아테 뢴은 파트너로 한 팀을 이룬다.
슬슬 시작해볼까? 어떤 여자와 저녁 식사를 했는데 다음 날 그 여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상상해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S2MN(p.193)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p.550)
소설은 복합 구성으로 또 하나의 사건을 첨가하고 있는데, 해리는 개인적인 일로 함정에 빠져 용의자가 된다. 예전에 잠시 만나던 연인 안나와의 저녁 식사 후 그녀는 자살한다. 죽음의 의문과 수상한 메시지로 혼자서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향한 목줄은 조여지고... 그는 누명에서 벗어나 두 가지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복수에 관한 다양한 서술...
네메시스 여신이야... 복수의 여신. 그러고 보니 복수도 자살의 흔한 동기라네. 자신의 삶이 이렇게 비참해진 것은 누군가의 탓이고, 그러니 자살을 함으로써 상대에게 죄책감을 주려는 거지. 베르톨 그리머도 자살했다네. 아내를 죽인 후에 말이야. 아내가 바람을 피웠거든. 복수, 복수, 복수. 인간만이 복수를 하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아나?(p.131)
"주위를 둘러봐. 인간은 앙심을 품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복수와 응징. 그거야말로 학창 시절에 얻어맞고 다니던 땅꼬마가 훗날 억만장자가 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를 봐. 우리 경찰이야말로 차갑고 이성적인 응징으로 위장한 이 사회의 불타오르는 복수 아니겠어? 그게 우리 직업이라고."(p.257)
"'코케 페르 코케koke per koke'. 머리에는 머리로. 피 흘리는 복수를 뜻하는 알바니아식 표현이지. 복수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험한 마약이야."(p.310-311)
복수. 원시적이라고? 천만에. 복수는 사고하는 인간의 반사작용이야. 행동과 일관성의 복잡한 혼합물로, 지금까지 인간 외에 다른 종은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수의 실행은 그 자체로 너무 효과적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가장 복수심이 넘치는 사람만이 살아남았지. 복수 아니면 죽음. 서부 영화 제목 같지? 하지만 입헌국을 만든 것은 보복의 논리라는 걸 명심하라고. 눈에는 눈, 죄를 지은 자는 지옥에서 불타거나 최소한 교수대에 매달린다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지. 복수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기초야, 해리.(p.456-457)
기독교의 윤리는 복수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대변해서 복수해주는 위대한 존재야.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 불에 타게 되리라. 그거야말로 일반 범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완전한 복수 행위지.(p.593)
다행히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사소한 복수심을 가져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해치고자 하는 분노의 복수심을 가져본 적은 없다. 이 책에서는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이라는 제목답게 복수의 칼날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통쾌함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질없음을 시사한다. 작가는 성실한 자료 수집으로 복수에 관한 철학, 심리학, 종교, 국제관계... 등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포함하여 명확하게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잘 만들어진 스릴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