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가노 료이치, 한희선 역, [환상의 여자], 황금가지, 2015.

Kanou Ryouichi, [MABOROSHI NO ONNA], 2003.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안타깝게도 아직 현실에서 환상의 여인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더구나 일본의 하드보일드 서스펜스는 그리 익숙하지 않아 [환상의 여자]는 이런저런 신비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마치 기름을 바짝 짜낸 후의 담백함처럼 서술형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특유의 가벼움으로 경쾌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소함이 발목을 잡은 것일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이미 [제물의 야회](한희선 역, 이미지박스, 2008.)... 등으로 일본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에게 잘 알려진 가노 료이치는 이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이선희 역, 창해, 2008.)과 함께 1999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공동으로 받았다고 하는데, 들리는 소문과 비교하여 국내 번역은 다소 늦은듯하다.

  "......즐거워."

  냄비 건너편에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불륜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끼는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이 여자와 있을 때야말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몸을 맡기고 있으면 참을 수 없이 마음이 편하고 감미롭고 애절하고 그리고 어딘가 죄의 고통이 잠재하고 있는 것조차도 기분이 좋은 착각.(p.55)

  어린 시절에 부모와 관련해서 어두운 기억을 가진 남자가 있다. 그는 과거를 잊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린다. 좋은 대학을 나와 사법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되어 법률회사 대표의 딸과 결혼을 한다. 법치와 사회정의를 외치며 승승장구하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퇴근 후 들린 선술집에서 고바야시 로쿄라는 여자를 만난다. 불륜을 정당화하거나 죄책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여자에게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열정으로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한 가지 상담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내일 다시 전화할게."(p.57)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르고, 스모토 세이지는 아내와 이혼하고 장인의 회사에서 나와 새로 사무소를 개업한다. 한동안 술에 취해 떠나간 연인의 행방을 뒤쫓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갑자기 왜? 라는 의문과 함께 그리움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길에서 우연히 그녀와 재회한다.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간단히 연락처만 주고받는데, 그날 저녁 그녀가 남긴 음성 메시지... 그리고 다음 날 살해된 채 발견된다. 그녀에게 내일은 없었다.

  끄덕였지만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양친을 미워하기는 해도 내심 사랑하기도 했다. 부모자식 관계는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어진 듯 보일 때에는 언제나 본인들밖에 모르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 끊지 않는 편이 마음의 부담은 훨씬 적다. 친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향도 그렇다.(p.81)

  피해자의 주변 인물로 경찰 조사를 받으며 죽음을 눈으로 확인한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인데, 하루아침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왜 떠났는지?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변호사의 촉각을 긴장하게 한다. 그녀는 가족이나 왕래하는 친척이 없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계를 끊고 살아야만 했을까? 대리인으로 장례를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고향을 찾아 행적을 뒤밟는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는 고바야시 로쿄가 아닐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알던 그녀는 누구인가?

  나는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 35년을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인생이라는 뭔가 대단한 것을 사는 게 아니라 나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침을 살고 낮을 살고 밤을 사는 것뿐이다.

  어려운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아마 그뿐이리라.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버팀목이었다. 그녀는 사라지고 난 후 그것을 직접 제 손으로 쌓아올렸다.(p.549)

  나와 만났을 때 그녀는 고독했다. 그전부터 계속 고독했고, 나와 만났을 때도 고독했고,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내고 있어도 또한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몇 분의 1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만을 밀어붙이려 했을 뿐.

  나는 대체 그녀에게 뭐였을까? 잃고 나서 계속 그것을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만나서 묻고 싶었다. 나는 네게 뭐였지? 그렇게 문고 싶다고 계속 바랐다. 그러나 대답은 아마 그녀가 사라진 것 자체로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다만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을 뿐이다.(p.549)

  [환상의 여자]는 시종일관 비밀스러운 한 여인의 진짜 정체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세키네 쇼코의 정체를 찾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박영란, 시아, 2000.)(이영미 역, 문학동네, 2012.)가 연상된다. 또한, 기묘한 행적을 보이는 기스기 교코의 행방을 뒤쫓는 모치즈키 료코의 [신의 손](김우진 역, 황금가지, 2014.)이 떠오르기도 하고... 하지만 비슷한 설정이라고 해도 사회파 메시지가 강조되거나 문학성의 경계에 놓인 이전의 작품과는 다르게 여기에서는 하드보일드의 글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남자의 순정 그리고 가족의 상처를 포괄적으로 다루어 인생의 의미를 뒤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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