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 워 Civil War 프로즈 노블 - 그래픽노블 <시빌 워> 소설판 마블 프로즈 노블
스튜어트 무어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스튜어트 무어, 임태현 역, [시빌 워], 시공사, 2015.

Stuart Moore, [CIVIL WAR PROSE NOVEL], MARVEL, 2015.

  개인적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그래픽 노블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문외한이었다. 단지 할리우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슈퍼 영웅 시리즈의 원작이라는 것과 희귀본은 수집가에 의해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블로그 이웃인 유마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약간의 통찰(?)을 얻게 되었는데, 소설 [시빌 워]를 통해 알게 된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마님 고맙습니다...^^

1. 왜 어벤져스에는 배트맨이 없을까? 그 이유는 소속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그래픽 노블 제작사는 마블과 DC가 있다.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는 월트 디즈니의 자회사로 어벤져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엑스맨, 디펜더스, 판타스틱 포, 쉴드... 등 다양한 팀으로 폭넓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마블 유니버스라는 하나의 세계관 안에 존재한다. http://marvel.com/

  DC 코믹스(DC Comics)는 워너 브라더스의 자회사로 저스티스 리그가 있다. 주요 캐릭터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그린랜턴, 아쿠아맨... 등이 있다. http://www.dccomics.com/ 이들은 모두 영웅 이외에 이들이 상대하는 숙적, 악당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블과 DC는 각기 다른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데, 팬들은 서로 좋아하는 캐릭터의 우위를 비교하거나 대결 구도를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는 아이언맨과 배트맨이 서로의 기술과 능력을 뽐내며 연합하는 날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2. 마블 유니버스 프로즈 노블 [시빌 워]는 마크 밀러와 스티브 맥니븐의 그래픽 노블을 스튜어트 무어가 소설로 각색한 작품이다. 2016년에 개봉 예정인 영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안소니 루소, 조 루소 감독)의 원작으로, '시빌 워'는 내전을 의미한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확장판으로 마블의 웬만한 캐릭터는 모두 등장하는데, 아이언맨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군과 캡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저항군으로 나뉘어 싸운다. 어제의 동료와 친구가 오늘의 적이라니... 상당히 충격적이면서 흥미로운 설정이다. *참고로 DC의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을 그린 영화 <배트맨대 슈퍼맨 :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잭 스나이더 감독)도 2016년에 개봉 예정이다.

3. 소설 [시빌 워]는 이전의 그래픽 노블이나 슈퍼 영웅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하고 있는데, 작품의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특징을 적절히 풀어가며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어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슈퍼 휴먼, 초인, 슈퍼 히어로, 슈퍼 빌런. 뭐라고 부르건 간에, 그들의 수가 지난 10년 사이 엄청나게 급증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남들에게는 없는 특수한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고 태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우연한 기회로 그런 능력을 얻습니다. 또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특수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도 코스튬을 입고 목숨을 걸며 남들 앞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외계 혈통을 지닌 이들도 있습니다. 완전히 외계인인 경우도 있지만, 최근에는 지구인과의 혼혈도 심심찮게 볼 수 있지요."(p.162)

  토니 스타크와 캡틴 아메리카 역시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들인 것은 맞지만, 각자의 강점과 약점이 확연했다. 캡틴은 인간의 본성과 정신력에 의존했고, 토니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게 강했다. 어벤저스 결성 이래로 캡틴과 토니가 부딪힌 적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급박한 순간이 닥치면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살릴 것인가에 대한 둘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p.30)

4. 십 대로 구성된 뉴 워리어즈(나이트 트래셔, 스피드볼, 나모리타, 마이크로브)는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고 있다. 슈퍼 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TV 프로그램인데, 이들은 능력을 과시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촬영 중에 슈퍼 빌런인 나이트로는 "아가야. 미안하지만 나는 그동안 너희가 상대했던 얼빠진 애송이가 아니란다... 너희는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든 거야."라는 말과 함께 자살 폭발을 일으킨다. 대폭발로 뉴 워리어즈와 방송국 촬영 관계자는 물론이고 코네티컷 스탬포드의 주민 900여 명이 사망하게 된다.

  "앞으로 일반 대중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려거든 반드시 다음의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온라인으로 국토안보부에 등록을 해야 합니다. 아주 쉬운 일이죠. 전혀 힘들 게 없습니다. 이때 입력해야 하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청자가 그동안 사용했던 이름과 함께 본명, 거주지, 24시간 비상연락처, 경력, 그리고 슈퍼 휴먼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 그렇게 접수된 등록 신청서는 즉시 저와 국토안보부 장관님이 함께 심사하게 됩니다."(p.163)

  이 사고로 슈퍼 휴먼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상원에서는 초인의 능력 오남용을 견제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한 규제와 기준을 확립할 목적으로 조사 위원회를 구성한다.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는 정부의 슈퍼 휴먼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고... 그 결과 초인등록법을 제정한다. 모든 초인은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인등록법은 슈퍼 휴먼 커뮤니티를 분열시키는데, 쉴드에서는 대응팀을 꾸려 반대자들을 강력하게 제지한다.

  "50개 주 이니셔티브 계획에 대해 들어봤겠지? 그거 그냥 소문이 아냐. 정부에서 이미 진행하고 있어. 이제 곧 각 주마다 하나씩 슈퍼 히어로 팀을 창설할 거야. 모든 맴버들은 당연히 중앙에서 훈련시키고 자격 심사를 한 뒤 대중에게 공개돼. 생각해 봐. 이렇게 되면 우리 슈퍼 휴먼은 진일보하는 거야."(p.243)

  정부의 규제와 통제를 받게 된다면 더욱 체계적인 관리 속에서 진일보하게 될 것이라 믿는 아이언맨과는 달리 캡틴 아메리카는 자유를 위한 싸움을 선택한다. 이로써 저항군은 신분을 감추고 수면 아래에서 위장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기회를 엿보고, 정부군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 반대자 추적을 시작한다.

5. 초인등록법에 등록한 정부군 어벤져스는 아이언맨(앤서니 스타크), 미즈 마블(캐럴 댄버스),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 스파이더맨(피터 파커), 쉬 헐크, 행크 핌(앤트맨, 자이언트맨, 옐로재킷), 닥터 샘슨, 센트리, 그리고 판타스틱 포의 미스터 판타스틱(리드 리처즈), 인비저블 우먼(수잔 리처즈), 씽(벤 그림), 휴먼 토치(조나단 스톰)이다. 여기에 새로운 맴버로 원더맨, 캡틴 마블, 스파이더우먼, 헤르메스가 합류한다.

  초인등록을 반대하는 저항군은 캡틴 아메리카(스티븐 로저스), 호크아이(클린트), 루크 게이지, 팔콘, 데어데블, 골리앗(빌 포스터), 타이그라(그리어 넬슨), 영 어벤져스의 패트리어트(일라이), 헐클링, 위칸, 스태처(캐시 랭), 스피드(토미)이다. 여기에 클록, 대거, 발키리, 나이트호크, 포톤, 스팅레이, 퍼니셔(프랜시스 캐슬), 허큘리스, 그리고 와칸다의 국왕 블랙 팬서(트찰라)와 왕비 스톰(엑스맨 뮤턴트)이 개인 자격으로 합류한다.

  울버린과 엑스맨 뮤턴트는 중립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공간에서 나오지 않는다. 해저도시 아틀란티스의 군주 네이머는 지원을 거절하고...

6. 빌런을 제외하고라도 이 얼마나 방대한 캐릭터의 등장인가! 여기에서 결정적인 심경의 변화로 진영을 옮기기도 하고, 상대편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잠입한 스파이도 있다. 이들은 점점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승부에 다가서는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도 돌이킬 수 없게 됐어. 서로 악감정은 있을지언정 그래도 상처를 털고 악수하며 끝낼 수 있는 시기도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 불가능해. 닥터 둠이 쳐들어와도, 캘럭투스가 침공한다 해도, 우리가 손잡고 싸우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다시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일은 없는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토니는 더욱 절망스러웠다.(p.442)

  오늘 전투가 어떻게 마무리되든 스파이더맨에게 남은 건 암울한 미래뿐이었다. 캡틴이 승리한다면 피터는 앞으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토니가 이긴다면 피터는 그 즉시 기소되어 네거티브 존에 갇힐 것이다. 어느 쪽도 그에게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었다.(p.446-447)

  서로에게 남은 건 상처와 암울한 미래뿐이다.

7. 당신은 누구 편인가? 서로 한 치의 양보를 할 수 없는 극단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논리와 대의를 가진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대결은 그들이 갖춘 화려한 능력과는 다르게 내적인 갈등과 고뇌의 어둠을 포함하고 있다. 그림을 글로 옮기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지만, 극적인 묘사는 책을 읽는 동안 마치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학의 글맛보다는 이야기의 글맛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앞으로 개봉할 영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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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떠나는 서양 미술 기행 - 세계 최고 명화 컬렉션을 만나다
노유니아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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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니아, [일본으로 떠나는 서양 미술 기행], 미래의창, 2015.

  일본소설을 좋아해서 즐겨 읽고 이와 관련된 블로그를 하다 보니 가끔 어떤 이는 내가 일본을 무작정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공격적으로 대놓고 친일파가 아니냐는 비난 어린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에 여전히 흑백논리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어 대화가 잘되지 않을 때가 있다. 흔히 일본을 가까우면서 먼 나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나에게도 해당한다. 알면 알수록 아리송한 민족성, 특유의 장인정신, 민감한 역사문제, 그리고 미스터리 소설...

  미술사를 전공하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의아해했던 것이 기억난다. "일본에서 미술사를 공부한다고요?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니고요?"라는 질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미술'이나 '회화'라는 용어도 일본에서 들어온 번역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 더 놀라실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서양화도 동양화도 조각도 공예도 디자인도 모두 미술이라는 범주에서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미술 분야의 개념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글씨와 그림을 합쳐 '서화(書畵)'라고 불렀다.(p.6)

  일본으로 세계 최고의 서양 미술을 감상하러 떠나자! 지금까지 여행에 관한 몇 권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최근의 대부분은 감성과 힐링이라는 단어의 늪에서 모호한 감상이나 불투명한 사진으로 페이지를 채워 넣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르다. 일본과 서양 미술이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미술관을 탐방하는 기발한 발상... 사실 일본은 전국에 5,000여 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의 숫자만이 아닌 그 안을 채우는... 유명한 거장의 작품을 꾸준히 모으고 있어서 우리가 알만한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서양 미술사를 전공할 경우, 한국에서는 연구의 바탕이 될 작품을 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유학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유학해서 모네나 르누아르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다고 해도, 그 이후의 연구를 국내에서 이어가기란 정말 힘들다. 우선 연구 대상이 되는 작품이 없는 데다가, 그 말인즉슨 결국 그와 관련된 일자리도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컬렉션은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서양 미술사 입문서 중 상당수의 책들이 일본인의 저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p.11)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한 저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데리고 문화생활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다행히 미술관은 동반할 수 있어서) 어린 딸과 함께 방문한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다. 크게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술관의 성격을 구분해서 간략한 역사와 소장하고 있는 서양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Part 1. 컬렉터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도쿄), 오하라미술관(구라시키), 야마자키마작미술관(나고야), 브리지스톤미술관(도쿄)

  Part 2. 자연과 함께해 더 아름다운 전원형 미술관

  폴라미술관(하코네),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하코네),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나리타), 나카무라 키스 해링 미술관(고부치자와)

  Part 3.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지방의 공립미술관

  요코하마미술관(요코하마), 야마나시현립미술관(야마나시), 나고야시미술관(나고야)

  Part 4. 발상의 전환, 개성 가지가지 미술관

  미쓰비시1호미술관(도쿄), 히다다카야마미술관(히다다카야마), 오츠카국제미술관(도쿠시마)

  그밖에 놓치면 아까운 미술관들...

 

 

 

  일본에 있는 미술관과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서양 미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은 기대 이상이다. 도쿄를 향하는 신칸센의 종착역인 우에노는, 내가 읽은 소설에서는 도시에서의 새로운 희망과 떠나온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한데 뭉쳐있는 복잡한 감정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도쿄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집결지이고, 여기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은 서양에서 들여온 회화와 조각을 위한 장소이다. 오퀴스트 로뎅의 조형물과 르누아르, 밀레, 루벤스, 쿠르베...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기업들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메세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미술관들과 차이가 있다면, 기업의 소유주 자신이 미술을 좋아하고 즐기던 수집가였고, 일생을 통해 모은 작품을 공개하기 위한 미술관을 지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업 경영자 = 수집가'라는 공식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고, 대개 경영과는 거리가 있는 재벌가의 안주인들이 예술 분야를 도맡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해서 시작하게 된 (비록 나중에는 자신의 손을 떠나보낼지라도) 문화 사업과, 기업 경영에 몰두하느라 바빠서 타인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는 문화 사업은 그 이해도에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p.82-83)

 

 

 

 

 

 

 

 

  오하라미술관은 1930년에 설립한 일본 최초의 서양 미술 중심의 사립 미술관이다. 야마자키마작미술관은 최근에 생긴 신생 미술관이지만, 인상파 이전의 작품을 상당히 가지고 있다. 브리지스톤미술관은 인상파를 비롯해 근대 회화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폴라미술관은 대자연의 숲 안에서 자연과 공생하는 건축이 돋보인다.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은 리조트형 미술관으로 휴식을 즐기며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은 나리타 공항 근처에서 사계절의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나카무라 키스 해링 미술관은 미국의 팝 아트 작가인 키스 해링이라는 단 한 명의 작가를 위한 미술관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조각 작품을 접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대형 건축물의 미술 장식품 설치 규정'이 있어서 문화예술진흥법상 전체 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는 의무적으로 건축비 중 일부 금액을 미술에 할당해서 작품을 설치해야 한다. 삭막한 도시에 예술 작품들을 설치해서 문화 환경을 개선하고, 미술계에는 현실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법이다. 그러나 건축주의 이해 부족 등으로 졸속적인 작품의 설치, 리베이트 관행, 사후 관리나 보수가 잘 되지 않아 작품이 흉물화되는 등 여러 가지 폐해를 낳았다. 반드시 조각 작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옥외에 설치하는 작품의 특성상 훼손이 잘 되지 않는 대리석 조각이 주로 설치되었고, 그렇게 설치된 알 수 없는 의미의 돌조각들이 오히려 도심 속의 공해가 되어 조각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기도 하는 것 같다.(p.112-113)

 

 

 

 

 

 

  요코하마미술관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거장을 만날 수 있다. 야마나시현립미술관은 70여 점의 밀레 작품을 보유한 전문 미술관이다. 나고야시미술관은 멕시코 르네상스의 작품과 일본에서 더 유명한 이우환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미쓰비시1호미술관은 2007년에 과거 1894년에 준공했던 건물을 현대의 건축기준법에 따라서 복원한 건물이다. 히다다카야마미술관은 세계 최고의 여행 정보지 [미슐랭 가이드]가 최고 등급인 별 세 개를 부여한, 이른바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복제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데, 종이나 캔버스가 아닌 도자기 판에 그려 오랫동안 보존한다.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이 두 그림은 각각 화가가 두 가지 버전씩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두 버전의 운명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나머지 한 버전은 모두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이토는 그림을 구입한 후 "다다미방에서 보는 고흐와 르누아르는 참 좋아. 죽으면 관에 넣어달라고 할 생각이야."라는 망언을 내뱉었고, 세계의 미술계로부터 "귀중한 문화유산을 한 줌의 재로 만들 생각인가!"(일본은 화장 문화임)라는 맹렬한 비난을 초래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p.176)

 

 

 

 

 

 

  미술관의 천국 일본에서 서양 미술을 감상하자! 이것은 결코 허황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했다. 수도와 지방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시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되는 것이 미술관이다. 우리와는 다르게 오래전부터 지방 도시마다 나름대로 특색있고 색채가 뚜렷한 미술관을 세워 지역 주민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 또한 이것으로 외지의 관광객을 끌어모은다고 하니... 그들의 사회 문화 인프라의 구축이 정말 부럽다.

  정치적 로비를 위해, 금전적 이윤을 남기기 위한 투자로, 비자금 조성이나 자금 세탁을 위한 불손한 목적의 미술품 수집이 아니라... 성공한 실업가의 순수한 문화적 관심은 세계의 명작을 모으고, 이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 미술관을 세우는 과정... 우리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세계의 명화를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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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스 스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5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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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노진선 역, [데빌스 스타], 비채, 2015.

Jo Nesbo, [MAREKORS](THE DEVIL'S STAR), 2003.

  집 안을 흐르는 물줄기와 벽 속에 갇힌 괴담, 떨어지는 핏방울... 시작부터 몰입을 보장한다!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 다섯 번째인 [데빌스 스타]이다. 세 번째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 네 번째 [네메시스](비채, 2014.)와 함께 오슬로 3부작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각각의 개별 사건 이외에 이어지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 - 강력반의 라이벌이자 프린스라고 불리는 불법무기 밀매상인 톰 볼레르와의 대결(이것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 을 다루고 있어서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볼레르의 휴가 기간을 적어 넣는 공간은 비어 있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가끔씩 묄레르는 톰 볼레르가 휴가를 내기는 하는지, 심지어 잠은 자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수사관으로서 볼레르는 강력반의 두 스타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늘 자리를 지켰고,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으며 맡은 사건마다 거의 다 해결했다. 또 한 명의 스타플레이어와 달리 톰 볼레르는 듬직했고 흠잡을 데 없는 전적을 가졌으며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 마디로 모든 상관이 탐낼만한 부하 직원이었다. 게다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뛰어난 리더십까지 있었으니 때가 되면 묄레르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p.24)

  해리 홀레.

  외톨이에 술고래, 톰 볼레르를 제외하고 경찰청 7층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 그가 그렇게 뛰어난 형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인 형사를 위해 지난 몇 년간 비아르네 묄레르가 병적일 정도로 자기 목을 걸지 않았더라면 해리 홀레는 진작 해고되었을 것이다. 평상시였다면 그는 제일 먼저 해리에게 전화해 수사를 맡겼겠지만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었다.(p.25-26)

  극명한 대비 서술... 금요일 오후에 스물세 살의 미혼 여성이 자기 집 욕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마치 거울에 반영된 서로 다른 인격처럼, 아니 빛과 어둠의 그림자라고 해야 할까? 서로 닮은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의 두 스타플레이어는 아이러니하게 한여름 휴가철로 부족한 인력 때문에 임시 파트너가 되어 사건 현장에 투입된다.

  지금까지 '사이코 살인마'나 '피 맛을 본 이웃'이라는 헤드라인이 달린 것으로도 모자라, 두 개의 단서가 더 밝혀지자 신문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대서특필되었다. '카밀라 로엔의 절단된 손가락', '눈꺼풀 속의 빨간 별 모양 다이아몬드'.(p.81)

  "아니, 스카레. 난 기억 안 할 거야. 하지만 자네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해두라고. 미리 작정한 살인, 그것도 이 사건의 경우처럼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살인사건이 터지면 범인이 형사보다 훨씬 유리하기 마련이야. 법의학적 증거들도 모두 없앴을 테고, 피살자의 사망 시간에 확실한 알리바이도 세웠을 거고, 살인 무기도 모두 버렸을 테니까. 그것 말고도 많아. 하지만 범인이 사실상 절대 없앨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지. 그게 뭘까?"

  ...

  "바로 동기야." 해리가 말했다. "너무 쉽지, 안 그래? 동기, 우리의 수사는 거기서 시작해야 해. 동기를 찾는 건 너무 기본적인 거라 가끔씩 잊어버릴 때도 있지. 그러다 어느 날 느닷없이 괴물 같은 놈이 나오는 거야. 모든 형사들의 가장 끔찍한 악몽에서 나온 살인마. 그 형사의 사고 회로가 어떻게 생겨먹었느냐에 따라 악몽일 수도 있고, 평생 고대하던 꿈일 수도 있어. 악몽이라고 하는 이유는 범인에게 동기가 없기 때문이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동기가 없지."(p.161-162)

  집 안의 욕실에서, 이웃이 있는 동네에서 연이어 살인과 실종이 일어난다.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절단되어 사라진 손가락과 오각형 별 모양의 붉은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근처에는 오각형 별 문양의 흔적이 있다. 같은 패턴으로 연쇄살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휴가 중인 형사들을 비상소집하여 수사팀을 꾸리지만, 아직 범행의 동기는 오리무중이다.

  "우선 FBI의 심리학 프로필이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지. 사이코패스는 종종 사회 부적응자들로 직장도 없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 전과가 있고 사회 문제도 많다네. 반면 소시오패스는 똑똑하고 겉보기에 정상적이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 사이코패스는 어디서나 눈에 띄고 쉽게 의심을 받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리지. 소시오패스의 정체가 발각되면 이웃이나 친구들은 늘 충격을 받기 마련이야. FBI에서 프로파일러로 활동했던 심리학자와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친구 말로는 자신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이 범행 시리라더군. 살인을 저지르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걸려. 하지만 이 친구에게는 살인이 평일에 일어났느냐, 아니면 주말이나 공휴일에 일어났느냐가 유용한 단서라는 거야. 후자일 경우에는 범인에게 직업이 있고, 따라서 소시오패스일 확률이 높다고 했어."(p.205-206)

  "세 건의 살인이 각각 같은 날짜만큼의 간격을 두고 발생했네. 세 건 모두 손가락 절단과 시신을 꾸미는 의식을 치렀고, 범인은 손가락 하나를 자르고, 그 보상으로 피살자에게 다이아몬드를 주었네. 이런 보상 행위는 잔인한 범죄에서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지. 어렸을 때 엄격한 도덕적 원칙에 따라 키워진 살인자들의 전형적 행동이라네. 그게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군. 노르웨이에는 그렇게 도덕적인 집안이 별로 없으니 말이야."(p.208)

  현장에 남은 수수께끼, 범인의 독특한 의식... 단서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더 있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수사는 어렵게 진행된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에 관한 심리학자의 묘사, 연쇄살인의 통계 분석, 알코올 중독으로 현실 감각을 잃어가는 해리 홀레, 그리고 악마의 은밀한 제안은 아주 흥미롭다.

  "펜타그램은 오랜 종교적 상징입니다. 비단 기독교에서만이 아니죠. 보다시피 이 오각형 별은 하나의 선을 계속 연장하여 몇 차례 자신과 교차하며 만들어집니다. 수천 년 전의 묘비에도 이 별이 새겨져 있었죠. 하지만 하나의 꼭짓점이 아래로 가고, 두 개의 꼭짓점이 위로 가면서 별이 뒤집어지면 그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됩니다. 데모놀로지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의 하나죠."

  ...

  "악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악령인 데몬이 존재하면서 악이 비롯되었다고 믿었던 시절의 용어죠."

  ...

  "초르트... 사탄이라고도 하죠."(p.222-223)

  "마레코쉬(Marekors), 악마의 별이죠."

  "마레코쉬?"

  "이고됴의 상징입니다. 마레(Mare)를 쫓아내기 위해 침대나 문간 위에 새겨 넣곤 했죠."

  "마레?"

  "네, 악몽(mareritt)이라는 단어가 거기서 파생됐죠. 잠든 사람의 가슴에 앉아 그 사람이 악몽을 꾸게 하는 여자 악령입니다. 이교도들은 마레가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레'의 어원이 인도게르만어족의 '메르(mer)'라는 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죠."

  ...

  "메르는 '죽음'을 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살인'이죠."(p.248)

  단서를 찾아 범인을 추적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매우 논리적이고 명확하다. 반대로 시종일관 인간적인 괴로움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술에 의존하는 또 다른 모습은 몽환적이고 때로는 절망스럽다.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과 사연 깊은 경쟁자와의 대결... 악마와의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시리즈 중에서 가장 하드보일드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양면성을 충분히 드러낸 문학성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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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0
토머스 미핸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토머스 미핸, 이재경 역, [애니], 미래인, 2014.

Thomas Meehan, [ANNIE], 1980.

  특별히 청소년 소설을 좋아하거나 즐겨 읽지는 않는다. 다만 무언가 읽을 것이 필요했고, 최근의 내 몸 상태가 별로라서...ㅜㅜ 약의 기운이 떨어지면 심한 어지러움에 시달리고, 약을 먹으면 온몸의 신경이 무감각해져서 집중할 수 없으니...ㅠㅠ 일부러 쉬운 책을 고른 것이 [애니]이다. 책으로는 조금 생소해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제목인데, 소설보다는 무대 공연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

  Tomorrow

  The sun'll come out tomorrow.

  (내일은 태양이 뜰 거예요.)

  Bet your bottom dollar that tomorrow there'll be sun!

  (내일은 태양이 뜬다는 데에 가진 돈을 몽땅 걸어도 좋아요!)(p.9)

  뮤지컬 극작가로 몇몇 영화와 드라마의 대본 작업에 참여한 토머스 미핸은 1972년에 처음으로 '애니'와 인연을 갖게 된다. <뉴욕 데일리 뉴스>에서 1924년부터 48년간 연재한 만화 [고아 소녀 애니]를 뮤지컬로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는데...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서 하나의 줄거리를 뽑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소녀와 가장 부자인 남자 그리고 샌디라는 이름의 개, 이렇게 세 가지 캐릭터를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 낸다.

  부디 불쌍한 우리 아기를 부탁드립니다. 아기 이름은 애니입니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너무나 사랑해요. 아기 생일은 10월 28일이에요. 얼른 다시 와서 데려갈게요. 우리가 아기를 데리러 왔을 때 우리가 부모인지 알 수 있도록, 가지고 있던 로켓 목걸이 반쪽은 아기 목에 걸어 주고 나머지 반쪽은 우리가 가져갑니다.(p.17)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정확히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33년 뉴욕의 허름한 보육원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는 가난한 소녀... 이것은 마치 19세기 찰스 디킨스가 쓴 [올리버 트위스트]의 20세기 미국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심각한 갈등과 위기의 상황을 마지막에 가서 명쾌하게 해결하는 권선징악의 구조로 거듭난다. 그리고 1977년 봄, 마침내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애니>의 막이 오르고 대성공을 거둔다. 여기에서는 두 시간 전후 분량의 무대 공연으로 삭제되어야 했던 장면을 다시 복원하여 서술 형태로 만든 것이다.

  "두고 봐. 이건 내가 이기냐 해니건 원장이 이기냐의 문제야. 일종의 전쟁이지." 애니는 다른 고아들한테 말했다. "난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p.25)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의 뉴욕 시립 고아원 여아 전용 별관, 키는 작지만 다른 누구보다 당차고 똘똘한 열한 살의 소녀는 추운 겨울 창밖을 바라보며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를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법적으로 사랑과 온정을 베풀어야 할 원장은 폭력과 억압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심지어 지하실에서 불법 아동 노동으로 뒷돈을 벌기도 한다. 공립학교에서는 고아라는 놀림과 차별을 당해야 하고... 애니는 하루빨리 부모가 자기를 데리러 오거나 아니면 이곳을 탈출해 부모를 찾아가는 것을 매일 꿈 꾼다.

  고아들이 쉬는 날은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요일이 가장 끔찍한 날이었다. 해니건 원장은 매주 일요일 아침 여덟 시에 아이들을 데리고 바워리 가의 세인트 마크 교회에 갔다. 고아들은 퀴퀴한 교회에 한 시간 넘게 앉아서, 죄지은 모든 이들에게 닥칠 끔찍한 최후에 대한 길고 지루한 설교를 들어야 했다. 죄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다. 거기다 해니건 원장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고아인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죄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너희 부모가 일찍 죽었겠어?"

  고아들은 예배가 끝나면 죄책감과 공포와 지겨움이 섞인 혼란스러운 감정에 시달리며 다시 교회에서 고아원으로 행진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고아원에 돌아오면 온종일 기도를 올리며 지난 한 주간 저지른 사악한 행동들을 반성해야 했다.

  "너희들의 더러운 영혼을 회개로 씻어내고, 하나님께 너희들의 허다한 죄들을 용서해주십사 빌란 말이야!"(p.28-29)

  1970년대 닉슨 대통령 시절,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다. 작가는 이것을 1930년대로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데, 여기저기 음울함과 절망감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주인공 애니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일의 태양을 기다린다. 그리고 극적으로 원장의 눈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지만, 대공황 시대의 겨울은 더 혹독하고 참혹하다.

  "내일은 태양이 뜰 거예요." 애니가 말했다. "내일은 태양이 뜬다는 데에 가진 돈을 몽땅 걸어도 좋아요."(p.93)

  오갈 곳이 없는 그녀를 이용하는 사람, 가난하지만 긍정적인 그녀에게 자기 것을 나눠주는 사람, 고아원 원장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경찰은 그녀를 위태롭게 하고, 떠돌이 개 샌디... 우연히 만난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 남자, 그리고 애니의 비밀을 아는 가짜 부모의 등장... 줄거리는 비단 [올리버 트위스트]뿐만 아니라 [소공자]와 [소공녀], 우리의 전래동화와 비슷한 패턴으로 예측할 수 있게 흘러간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색의 대비와 시각적인 표현이 확실해서 무대 위의 공연을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고, 암울한 분위기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들었으며, 결국에서는 선이 악을 이기고 행복하게 끝난다는 동화 같은 구성이 오랜만이라서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얼마 전에는 제이미 폭스와 쿠벤자네 왈리스 주연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는데,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보고 싶다. 물론 뮤지컬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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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톰 롭 스미스, 박산호 역, [차일드 44], 노블마인, 2009.

Tom Rob Smith, [CHILD 44], 2008.

  마음은 세계문학이나 모던 클래식에 가 있어도 몸은 일본 미스터리와 영미 스릴러에 와 있는 듯하다. [차일드 44]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인터넷 모 스릴러 카페에서 투표로 진행한 '2009년 10대 스릴러'의 상위에 자리매김하면서이다. 이후에 책을 구하고자 하는 독자의 성원으로 출판사에서는 절판한 책을 재출간하기도 했고, 몇 년 전에는 영화 <베를린>(류승완 감독, 2012.)의 표절 논란이 한동안 회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금까지 인연이 없다가 최근에 동명의 영화 개봉을 앞두고 드디어 읽게 되었다.

  좋은 작품은 세계가 열광한다. 톰 롭 스미스는 이 책을 29세에 첫 소설로 발표했는데, 그동안 36개국에서 500만 부 이상 팔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릴러 100위에 올랐다고 하니...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하나? 단아한 문체와 치밀한 구성은 최고의 번역가에 의해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되살아나 끝까지 몰입하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에 덫을 놓았고, 쥐까지도 모조리 잡아먹었다. 얼마 못 가서는 가축들마저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마리아는 이미 가죽 부츠를 가늘고 길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 쐐기풀과 근대뿌리 씨를 넣고 끓여 먹었다. 지렁이를 잡아먹으려고 흙을 파기도 했고, 나무껍질을 빨아먹은 적도 있다. 오늘 아침에는 열에 들뜬 혼미한 상태에서 부엌에 있던 걸상을 이빨로 갉아서 잇몸에서 나뭇조각이 튀어나올 때까지 씹어 먹었다.(p.8)

  1930년대 우크라이나 대기근 -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에서 재배한 농작물을 외국으로 수출해 외화를 벌고, 자영농의 전통이 강한 이곳을 집단농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예상 밖의 격렬한 저항으로 군인을 동원하여 외부와 격리하고 종자 씨앗까지 몰수하여 농민을 아사시킨다는 끔찍한 정책을 펼친다. 굶주린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기도 했다. - 시대를 배경으로 어린 형제는 누군가의 집에서 몰래 키우다 숲에 버린 고양이를 뒤따라 간다. 배고픔과 피폐함으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처절한 추격은 결국 사냥에는 성공하지만, 형 파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생 안드레이만이 돌아온다.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p.38)

  믿음을 잃는 것이 바로 죄다.(p.38)

  대의, 대의, 대의, 대의.(p.103)

  20년 후, 한 사내아이가 선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아이의 죽음은 가족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정점에 이르는 1950년대 소비에트 연방은 서방 세계와 비교하여 완벽한 사회주의 국가를 천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에 범죄란 존재하지 않고, 국가의 정책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인민은 국가적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

  공포는 필요하다. 공포가 혁명을 지켜주었다. 공포가 없었다면 레닌은 무너졌을 것이다. 공포가 없었다면 스탈린도 무너졌을 것이다... 공포는 키우는 것이다. 공포는 그가 하는 일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면 공포의 먹이가 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돼야 한다.(p.94)

  레오는 KGB의 전신인 국가안보부 MGB의 간부이다. 사건을 조사하며 죽은 소년의 부모는 잠시 살인을 의심하지만, 암묵적으로 이것은 모두가 곤욕을 치를 수 있는 문제이기에 곧바로 마음을 바꾸어 사고사로 마무리한다. 그는 다른 정치적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체육대학에 다니다가 대애국전쟁(1941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신체능력의 우월함으로 특수부대에 선발되어 큰 공을 세운다. 전쟁영웅으로 주요 신문을 장식하고 전쟁 후에는 자연스럽게 MGB에 배속된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체제 전복을 노리고 국가를 부정하며 외국에서 불순한 사상을 끌어들이는 자를 색출하는... 한마디로 공포를 조성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을 조사하라.(p.57)

  경찰은 냉혹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해야 한다.(p.132)

  "브로츠키는 여섯 명의 소비에트 시민과 한 명의 헝가리 남자를 댔어. 모두 외국 정부와 협력하는 이적 행위자들이야. 다른 요원들에게 여섯 명을 넘겼네. 일곱 번째 이름은 자네가 조사할 사람의 이름이야. 자네가 내 최고의 요원 중 하나라는 점을 참작해서 가장 힘든 사건을 맡겼네. 그 봉투 안에 우리가 한 예비 조사와 사진 몇 장과 그 인물에 대해 현재 알고 있는 모든 정보가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많지는 않아. 자네가 정보를 더 수집하고, 아나톨리의 말이 맞는다면, 이 사람이 정말 반역자라면 잡아서 여기에 데려오면 되네."

  레오는 봉투를 찢어서 몇 장의 커다란 흑백사진을 꺼냈다. 거리 맞은편에서 거리를 두고 찍은 감시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라이사가 찍혀 있었다.(p.134-135)

  임무를 완수한 그에게 또 다른 명령이 내려온다. 이번에는 그의 아내 라이사를 조사하라는 것이다.

  "네가 옳다. 내 충고는 그래도 변함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게 화내지 마라. 여기 올 때 뭘 기대하고 온 거니? 우리가 그래 좋아, 죽는 건 상관없어, 그럴 줄 알았니? 그리고 우리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니? 네 아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 너희 둘이 행복하게 계속 살 수 있는 거니? 그랬다면 너희 둘을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놨을 거다. 하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결국에 우린 죽겠지. 우리 넷 다, 하지만 넌 네가 옳은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죽겠지."(p.158)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눈이 멀 수도 있다.(p.175)

  아내가 진짜 스파이이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모함이거나, 아내가 정말로 불순분자이거나 아니면 국가를 향한 충성도의 시험이거나... 레오는 진퇴양난 속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학생들은 살인, 절도, 강간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라고 배웠다. 그리고 민병대의 위상 역시 엇비슷하게 등급이 매겨졌다. 공산 국가에서는 훔칠 필요도 없고,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시민들 간에 폭력을 쓸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경찰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민병대는 내무부의 하급 분과에 지나지 않았다. 박봉도, 대우도 시원찮아서 학교를 중퇴한 사람들, 집단농장에서 쫓겨난 농부들, 제대한 군인들과 보드카 반병이면 넘어가는 사람들로 꾸려가는 집단이 민병대였다. 공식적으로 소련의 범죄율은 제로에 가까웠다. 신문에서는 미국이 거리 곳곳에 보이는 빳빳한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반짝거리는 경찰차를 타고 다니면서 범죄를 예방한답시고 막대한 돈을 낭비하고 있지만 그나마 그런 것마저 없었더라면 미국은 금방 무너져버렸을 거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어쨌든 이곳에서는 절대 그런 일에 인재들을 낭비하지 않는다면서, 그런 일은 힘은 세지만 주정뱅이들이 벌이는 싸움을 말리는 것 말고는 별 쓸모가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을 시키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p.224-225)

  자신만은 올곧은 인간이었다는 확신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한 가지 냉엄한 사실만 남았다. 그는 라이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다가 다시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다...(p.235)

  "내가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을 때 당신은 날 증오했지. 이젠 옳은 일을 해도 증오하는군."(p.273)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입에는 나무껍질이 가득 차 있고, 시체에는 위장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시체는 아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는 곳에서 발견됐을 겁니다. 숲 속이나 강가나 기차역 부근 같은 곳에서요. 아이들의 발목에는 끈이 달려 있을 거고요."(p.319)

  네스테로브의 계산으로 지금까지 살해된 아이들은 43명이었다. 네스테로브는 박스에서 핀을 하나 더 꺼내어 모스크바 중앙에 박았다. 아카디를 44번째 아이로 표시한 것이었다.(p.339)

  살인자는 솜씨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살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 덕분에 완벽한 면책특권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인자는 계속하여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p.409)

  정치적 야망으로 시시콜콜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연상의 부관, 그가 파 놓은 함정에 레오는 보기 좋게 걸려들어 결국 모스크바 동쪽에서 800km 떨어진 우랄 산맥의 서쪽 부알스크 마을의 민병대 최하급 관리로 좌천된다. 그가 누리던 풍요로움, 사랑한다고 여기던 아내, 무소불위의 권력은 모두 비누 거품처럼 녹아내리고 참혹한 현실을 맞이한다. 그러던 중에 이곳에서 연이어 어린아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의 죽임이 떠오르는데... 공식적으로 범죄 없는 사회에서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차일드 44]라는 제목은 연쇄살인으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44명의 아이를 가리킨다. 이 소설은 1970년대 말에서 1990년대까지 대략 10년 동안 구소련에서 52명의 여성과 아이를 살해한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실화를 모티브로 해서 쓰인 것이다. 영국인 작가에 의해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재구성한 작품은 서로 감시하고 폭로하고 무지비한 폭력이 행해지는... 이러한 음울함이 매우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스릴러를 읽기보다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표절 의혹과 관련해서는 소설 [차일드 44]와 영화 <베를린>은 분명히 다른 내용이다. 하지만 1950년대 소련의 공포정치와 오늘날 북한의 철권정치의 유사성, 동명수(류승범)의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의심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라는 대사, 련정희(전지현)의 속옷을 노골적으로 만지며 장치를 심는 것, 그리고 심문을 하는 과정에서 노란색 약물을 주사하여 자백을 받는 장면은 쉽게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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