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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떠나는 서양 미술 기행 - 세계 최고 명화 컬렉션을 만나다
노유니아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노유니아, [일본으로 떠나는 서양 미술 기행], 미래의창, 2015.
일본소설을 좋아해서 즐겨 읽고 이와 관련된 블로그를 하다 보니 가끔 어떤 이는 내가 일본을 무작정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공격적으로 대놓고 친일파가 아니냐는 비난 어린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에 여전히 흑백논리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어 대화가 잘되지 않을 때가 있다. 흔히 일본을 가까우면서 먼 나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나에게도 해당한다. 알면 알수록 아리송한 민족성, 특유의 장인정신, 민감한 역사문제, 그리고 미스터리 소설...
미술사를 전공하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의아해했던 것이 기억난다. "일본에서 미술사를 공부한다고요?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니고요?"라는 질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미술'이나 '회화'라는 용어도 일본에서 들어온 번역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 더 놀라실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서양화도 동양화도 조각도 공예도 디자인도 모두 미술이라는 범주에서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미술 분야의 개념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글씨와 그림을 합쳐 '서화(書畵)'라고 불렀다.(p.6)
일본으로 세계 최고의 서양 미술을 감상하러 떠나자! 지금까지 여행에 관한 몇 권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최근의 대부분은 감성과 힐링이라는 단어의 늪에서 모호한 감상이나 불투명한 사진으로 페이지를 채워 넣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르다. 일본과 서양 미술이라는 독특한 시각으로 미술관을 탐방하는 기발한 발상... 사실 일본은 전국에 5,000여 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의 숫자만이 아닌 그 안을 채우는... 유명한 거장의 작품을 꾸준히 모으고 있어서 우리가 알만한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서양 미술사를 전공할 경우, 한국에서는 연구의 바탕이 될 작품을 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유학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유학해서 모네나 르누아르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다고 해도, 그 이후의 연구를 국내에서 이어가기란 정말 힘들다. 우선 연구 대상이 되는 작품이 없는 데다가, 그 말인즉슨 결국 그와 관련된 일자리도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컬렉션은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서양 미술사 입문서 중 상당수의 책들이 일본인의 저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p.11)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한 저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데리고 문화생활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다행히 미술관은 동반할 수 있어서) 어린 딸과 함께 방문한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다. 크게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술관의 성격을 구분해서 간략한 역사와 소장하고 있는 서양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Part 1. 컬렉터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도쿄), 오하라미술관(구라시키), 야마자키마작미술관(나고야), 브리지스톤미술관(도쿄)
Part 2. 자연과 함께해 더 아름다운 전원형 미술관
폴라미술관(하코네),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하코네),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나리타), 나카무라 키스 해링 미술관(고부치자와)
Part 3.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지방의 공립미술관
요코하마미술관(요코하마), 야마나시현립미술관(야마나시), 나고야시미술관(나고야)
Part 4. 발상의 전환, 개성 가지가지 미술관
미쓰비시1호미술관(도쿄), 히다다카야마미술관(히다다카야마), 오츠카국제미술관(도쿠시마)
그밖에 놓치면 아까운 미술관들...



일본에 있는 미술관과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서양 미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은 기대 이상이다. 도쿄를 향하는 신칸센의 종착역인 우에노는, 내가 읽은 소설에서는 도시에서의 새로운 희망과 떠나온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한데 뭉쳐있는 복잡한 감정의 도시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도쿄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집결지이고, 여기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은 서양에서 들여온 회화와 조각을 위한 장소이다. 오퀴스트 로뎅의 조형물과 르누아르, 밀레, 루벤스, 쿠르베...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기업들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메세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미술관들과 차이가 있다면, 기업의 소유주 자신이 미술을 좋아하고 즐기던 수집가였고, 일생을 통해 모은 작품을 공개하기 위한 미술관을 지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업 경영자 = 수집가'라는 공식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고, 대개 경영과는 거리가 있는 재벌가의 안주인들이 예술 분야를 도맡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해서 시작하게 된 (비록 나중에는 자신의 손을 떠나보낼지라도) 문화 사업과, 기업 경영에 몰두하느라 바빠서 타인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는 문화 사업은 그 이해도에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p.82-83)








오하라미술관은 1930년에 설립한 일본 최초의 서양 미술 중심의 사립 미술관이다. 야마자키마작미술관은 최근에 생긴 신생 미술관이지만, 인상파 이전의 작품을 상당히 가지고 있다. 브리지스톤미술관은 인상파를 비롯해 근대 회화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폴라미술관은 대자연의 숲 안에서 자연과 공생하는 건축이 돋보인다.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은 리조트형 미술관으로 휴식을 즐기며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DIC가와무라기념미술관은 나리타 공항 근처에서 사계절의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나카무라 키스 해링 미술관은 미국의 팝 아트 작가인 키스 해링이라는 단 한 명의 작가를 위한 미술관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조각 작품을 접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대형 건축물의 미술 장식품 설치 규정'이 있어서 문화예술진흥법상 전체 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는 의무적으로 건축비 중 일부 금액을 미술에 할당해서 작품을 설치해야 한다. 삭막한 도시에 예술 작품들을 설치해서 문화 환경을 개선하고, 미술계에는 현실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법이다. 그러나 건축주의 이해 부족 등으로 졸속적인 작품의 설치, 리베이트 관행, 사후 관리나 보수가 잘 되지 않아 작품이 흉물화되는 등 여러 가지 폐해를 낳았다. 반드시 조각 작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옥외에 설치하는 작품의 특성상 훼손이 잘 되지 않는 대리석 조각이 주로 설치되었고, 그렇게 설치된 알 수 없는 의미의 돌조각들이 오히려 도심 속의 공해가 되어 조각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기도 하는 것 같다.(p.112-113)






요코하마미술관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거장을 만날 수 있다. 야마나시현립미술관은 70여 점의 밀레 작품을 보유한 전문 미술관이다. 나고야시미술관은 멕시코 르네상스의 작품과 일본에서 더 유명한 이우환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미쓰비시1호미술관은 2007년에 과거 1894년에 준공했던 건물을 현대의 건축기준법에 따라서 복원한 건물이다. 히다다카야마미술관은 세계 최고의 여행 정보지 [미슐랭 가이드]가 최고 등급인 별 세 개를 부여한, 이른바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오츠카국제미술관은 복제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데, 종이나 캔버스가 아닌 도자기 판에 그려 오랫동안 보존한다.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이 두 그림은 각각 화가가 두 가지 버전씩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두 버전의 운명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나머지 한 버전은 모두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이토는 그림을 구입한 후 "다다미방에서 보는 고흐와 르누아르는 참 좋아. 죽으면 관에 넣어달라고 할 생각이야."라는 망언을 내뱉었고, 세계의 미술계로부터 "귀중한 문화유산을 한 줌의 재로 만들 생각인가!"(일본은 화장 문화임)라는 맹렬한 비난을 초래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p.176)






미술관의 천국 일본에서 서양 미술을 감상하자! 이것은 결코 허황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했다. 수도와 지방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문화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시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되는 것이 미술관이다. 우리와는 다르게 오래전부터 지방 도시마다 나름대로 특색있고 색채가 뚜렷한 미술관을 세워 지역 주민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 또한 이것으로 외지의 관광객을 끌어모은다고 하니... 그들의 사회 문화 인프라의 구축이 정말 부럽다.
정치적 로비를 위해, 금전적 이윤을 남기기 위한 투자로, 비자금 조성이나 자금 세탁을 위한 불손한 목적의 미술품 수집이 아니라... 성공한 실업가의 순수한 문화적 관심은 세계의 명작을 모으고, 이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 미술관을 세우는 과정... 우리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세계의 명화를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