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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평점 :
스티븐 킹, 장성주 역, [별도 없는 한밤에], 황금가지, 2015.
Stephen King, [FULL DARK, NO STAR], 2010.
브람 스토커상
의도하지 않았으나 우연히 스티븐 킹의 첫 소설 [롱 워크](황금가지, 2015.)와 최근에 소개된 [별도 없는 한밤에]를 함께 읽었다. 한 마디로 킹에게 푹 빠져들었는데,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왜 호러의 제왕인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지,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지... 단 두 권의 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은 4개의 중,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르소설의 벽을 넘어서 문학성(혹은 예술성)이 느껴질 정도로 죄의 확장과 복수의 집념, 상대적 박탈과 상황 윤리에 관한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어서 아주 흥미롭다. 특히 글을 읽을 때는 시각적인 잔상이 오래 남았는데, 영화와 TV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30&contents_id=6049
1922
빅 드라이버
공정한 거래
행복한 결혼 생활
[별도 없는 한밤에]를 쓰면서 나는 어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 또 그들이 선택할지도 모르는 행동 방식을 기록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등장인물들은 희망을 아예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니지만, 우리의 가장 간절한 희망조차도 (그리고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또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하여 품고 있는 가장 간절한 소망조차도) 때로는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런 경우는 빈번하다. 그럼에도 내 생각에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싶다. 고결함이란 성공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깃드는 것이며...... 우리가 그 노력을 다하지 않을 때, 또는 그러한 도전으로부터 일부러 고개를 돌릴 때, 바로 그때 우리 앞에 지옥문이 열린다고.(p.600)
처음 쓴 소설이 상당히 거칠다면, 저자는 이 소설을 가리켜 독하다고 한다.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드와 같은 전통적인 서사를 멀리하고 여기에서는 꾸밈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절박한 위기에 처한 인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가 선인이든 아니면 악인이든 오직 처절한 생존 본능에 사로잡혀 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자는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다른 남자와 함께 살아가게 마련이다. 자기가 모르는 낯선 남자, 즉 '음흉한 남자'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1922년 3월, 헤밍퍼드 카운티의 하얀 하늘 아래 밭들이 온통 눈 덮인 진창으로 바뀌었던 그 무렵, 농부 윌프리드 제임스의 마음속에 사는 음흉한 남자는 자기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리고 그녀의 최후를 결정했다고.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사형 판결이기도 했다. 성서 말씀에 따르면 은혜를 모르는 자식은 독사의 이빨과 같다지만, 은혜를 모르고 잔소리만 해대는 아내는 그보다 훨씬 더 사악한 것이니까.(p.13-14)
독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법이니까.(p.216)
'1922'는 사건이 일어난 연도이다.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8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고백문을 남기고 있다. 그해 여름, 그는 땅 문제로 아내와 심하게 다투었다. 상속받은 땅을 팔고 도시로 가기를 원하는 아내와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하기를 원하는 남편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는데... 그는 아들과 공모하여 술에 취한 아내의 목을 잘라 외양간 뒤의 오래된 우물에 암매장한다. 가출로 일을 꾸미고 변호사, 이웃, 보안관을 차례로 속인다. 극성맞은 아내가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현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짧은 에피소드를 모아서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구조인데, 처음에는 잘 될 것 같은 일이 조금씩 뒤틀려서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낸다. 처음 살인을 저지른 후에 얻은 마음의 상처와 이것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은 또 다른 범행으로 이어지고... 멈출 수 없는 죄의 연속성과 확장성은 마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아서 펜 감독, 1967.)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를 보는 듯하다.
공포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의 규칙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는 유혈극도 없고 시체도 달랑 한 구밖에 안 나와서 테스의 팬들이 좋아하는 코지 미스터리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테스는 휴대전화 창을 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소설이라면 전화가 안 터지겠지.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면, 테스가 노키아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표시창에 통화권 이탈이라는 글자가 떴으니까. 당연한 수순이었다.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너무 간단해지니까.(p.244-245)
테스는 몇 걸음 더 다가가서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올려다보았다. 정을 주세요 정을 드릴게요. 무슨 상품 광고 문구일 텐데, 도대체 뭘까?(p.247)
'빅 드라이버'는 전형적인 스릴러이다. 테사 진(테스)은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작가로 가끔 독자 강연회를 한다. 이날도 책과 관련된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진다. 곧이어 낡은 픽업트럭을 타고 나타난 덩치 큰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폐건물로 끌려가 강간을 당한다. 한껏 욕망을 채운 무자비한 손길은 그녀를 다른 두 시체와 함께 배수로 파이프에 유기하는데... 떨리는 심장으로 죽은 척 숨죽이던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다.
정말로 우연이었을까? 난처한 상황에서 친절하게 다가와 돌연 야수로 변한 거구를 만난 것은 어쩌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파놓은 함정은 아닐까? 그날의 행적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복수를 시작한다. 영화 <리턴 투 센더>(포아드 미카티 감독, 2015.)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일을 진행하며 고양이와 내비게이션을 의인화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영화 <더 보이스>(마르얀 사트라피 감독, 2014.)를 보는 듯하다.
차로 돌아온 스트리터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간판을 보았다. 토하느라 흘린 눈물이 아직 덜 마른 탓인지, 간판의 문구가 처음에는 헤어 익스텐션(Hair Extension, 붙임머리)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눈을 깜박거리고 다시 보니 페어 익스텐션(Fair Extension, 공정한 연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조그맣게 적힌 문구는 이러했다. 공정한 가격.(p.411)
"인생은 공정한 거야.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 동안 주사위 두 개를 굴리다가 어느 날 휙, 던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어떤 사람은 7이 연달아 나오기도 하지.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도 1이 두 개씩 나오기도 하고.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곳이야."(p.460)
'공정한 거래'는 미드 <환상특급>이나 일드 <기묘한 이야기>와 같은 분위기이다. 데이브 스트리터는 암 환자로 항암치료 중이다. 공항으로 이어진 연장도로에서 운전하다가 토하기 위해 잠시 멈춘 곳에서 페어 익스텐션이라는 간판을 발견한다. 적절한 대가를 지급하면, 무엇이든 연장이 가능하다는 이곳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생명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자신의 무게를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야 한다.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는 자신의 죽마고우를 지명한다.
인생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친구와의 관계에서 늘 손해를 보았다고 여기는 그는 공정한 거래를 통해 생명을 연장하고 대신 서서히 몰락하는 친구를 지켜본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는 인과응보로 마지막에 병에 걸린 친구가 페어 익스텐션을 찾아가 불행을 되돌려주는 결말을 기대했다. 마치 아웅다웅 다투는 인간을 풍자한 전래동화처럼,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방에 고양이 털이 보이면 근처 어딘가 고양이가 있다는 뜻이야. 의식이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속삭이는 그 말이 꽤나 타당하게 들렸다.(p.516)
다아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깨 너머를, 열려 있는 욕실 문 저편의 침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침실이 아니었다. 거울 저편의 어두운 침실이었다. 밥의 슬리퍼가 보였지만, 밥의 것이 아니었다. 밥이 신기에는 너무 컸다. 거인의 슬리퍼로 보일 만큼 커다랬다. 그 슬리퍼의 임자는 어두운 남편이었다. 그리고 주름진 침대보와 헝클어진 이불로 덮인 더블베드는? 어두운 침대였다. 다아시는 눈을 돌려 거울 속의 여인을, 헝클어진 머리에 겁에 질린 충혈된 눈을 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어두운 아내였다. 상처뿐인 영광을 품에 안은, 여인의 이름은 다아시였지만, 성은 앤더슨이 아니었다. 어두운 아내는 브라이언 델러핸티의 부인이었다.(p.544)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영화 <굿 메리지>(피터 아스킨 감독, 2014.)로 제작되었다. 다아시 매드센 앤더슨은 결혼 생활 27년째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에는... 차고에서 TV 리모컨에 넣을 건전지를 찾다가 남편이 숨겨 놓은 물건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뜻밖의 물건을 통해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다. 남편은 흉악한 연쇄살인범이고 지난 세월 동안 이것을 철저히 숨겨온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해서 세상의 손가락질을 함께 받을 것인가? 모르는 척 외면하고 결혼 생활을 지켜갈 것인가? 사업하는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의 앞날을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자 곁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 수는 없다.
별이 없는 캄캄한 한밤은 매우 처절하다. 작가는 살인의 과정, 폭행의 과정, 몰락의 과정, 복수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비극의 상황에서 살기 위한 투쟁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철저히 자신을 우선시한다. 생존이 먼저이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스릴러의 범주에서 상당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