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
서효인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효인,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다산책방, 2011.

  '어느 젊은 시인의 야구 관람기'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책을 펼치면서 야구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기 이전에,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야구 에세이라니... 먼저 반가움이 앞선다. 그러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 나오는 야구장 풍경과 오쿠다 히데오가 쓴 야구장 유람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래! 이제는 나올 때가 되었지... 아니, 뒤늦게 읽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는 젊은 시인의 야구 감성 에세이이다. 마치 마감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작가의 핑계 아닌 변명을 늘어놓은 듯한 제목이 흥미롭다. 더불어 예쁜 편집이 마음에 든다.

  내가 태어난 이듬해 프로야구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야구처럼 커왔다.(p.7)

  해가 높이 떠 있을 때만 활약하는 투수가 있다. 그는 배팅 볼 투수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그는 자기 팀 타자의 컨디션을 높이기 위해 적당한 위치와 알맞은 속도로 공을 던진다. 그의 손에서 놓인 공이 진행 방향을 급하게 틀어 경기장 바깥으로 뻗어나갈 때, 투수는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맞으면서 그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 나도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p.8)

  야구에 관한 추억은, 어린 시절에 프로야구의 탄생과 함께 아침에 일어나면 종일 야구를 했다. 골목 바닥에 선을 긋고 전신주를 베이스 삼아 주먹으로 공을 치면서 놀았다. 우리는 매번 최동원이나 선동열로 빙의했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아웃이니 세이프이니 소리를 지르며 시비를 가렸다. 성인이 된 후에 우연히 예전에 살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운동장 같았던 곳이 지금은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이었다. 마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우주가 쪼그라든 느낌이다. 도시가 아닌 외가의 섬마을에서 자라난 작가는 라디오 중계로 처음 야구를 만났다고 한다.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상상하며 소리로 들은 야구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나 보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간 야구장에서 고향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애정이 있었고...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야구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야구를 마지막으로 했던 게 언제였더라...;;

  그들은 팀이라는 조직 속에서 몸과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러니 팀원의 편에 서서 상대편과 맞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벤치클리어링은 경기의 일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팀의 동료들이 나를 위해 다이아몬드 복판으로 나와주었다는 것.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다이아몬드처럼 깨지지 않을 약속.(p.31)

  두 번까지는 스트라이크 카운트라는 벌칙을 받고, 세 번부터는 무한대로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이상한 규칙. 야구에서의 파울은 기회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대부분 방망이에 제대로 맞히지 못한 타구이지만, 그것이 규격 바깥으로 나가버렸으므로, 타자는 한 번만 더,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갖는다. 당신이 살거나, 죽을 때까지.(p.56)

  프로야구는 통상 6시 30분에 시작해 10시를 전후해 끝이 난다. 해가 저무는 시간의 야구장은 무엇보다 아름답다. 해는 뉘엿뉘엿 제 몸을 기울이고, 조명탑에 불이 하나둘 켜질 때다. 밤과 낮의 아스라한 경계가 야구장 위 하늘에서 서로의 손목을 맞잡는다. 어두워지는 하늘과 밝아지는 조명탑이 교차하는 순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공기의 이동). 야구장에 가야 하는 가장 근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p.95)

  희생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야구에서는 희생을 강요받는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강한 사내들이다. 희생을 아는 남자니까... 번트는 공을 달래야 한다. 자신을 숙여야 한다. 주자를 살려야 한다. 파울라인을 살펴야 한다. 주위를 배려해야 한다. 조용하면서 굳건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껴야 한다. 세상을 두루두루 살펴야 한다.(p.161-162)

  야구를 흔히 투수 놀음이라고 한다. 잘 던지는 한 명이 상대 타선을 무너뜨리고 경기를 지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 팀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점수를 올려야 하고, 그것은 타자의 몫이니깐. 제대로 된 포수를 키우는 데 1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매번 쪼그려 앉아 강속구에 몸을 드러내고, 상대 선수의 데이터를 모두 숙지해서 수비를 지휘해야 한다. 수비의 핵심인 유격수가 있고... 야구에는 다양한 작전이 있고, 무엇보다 상대를 제압해서 땅을 빼앗거나 공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홈으로 돌아와야 1점을 얻는 경기이다. 기록보다 선행 주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유일한 스포츠... 그래서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자 이제 시집을 꺼내자."

  시 쓰는 일 말고는 할 일이라고는 없는 잉여인간들이었다. 그래서 야구장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 한 연씩 돌아가며 정갈한 목소리로 낭송했다.(p.166)

  그들이 주술에 기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야구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 30퍼센트 이하의 성공률을 가진 타자가, 전 타석에서 빗맞은 안타라도 때렸으면, 수치상 또 안타를 때릴 확률은 적다. 방어율이 3점대인 투수가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으면, 수치상 3이닝째엔 1점 이상은 실점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 안타를 때린 선수는 안타의 감각이 남아, 비슷한 타구를 날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반대로, 3할 3푼을 때리는 타자가 오늘 3타수 무안타이고, 4타석째 들어왔을 때는 어떤가. 야구는 최악의 결과를 상정해놓고 그에 대비하는 게임일지도 모르겠다.(p.181)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요기 베라(포수, 뉴욕 양키즈)(p.197)

  그리고 얼마 후 찾아간 병실에서, Y형은 놀랍게도 야구를 보고 있었다. 주말 오전에 메이저리그를 틀어놓고, 왼손에는 야구공을 든 채로. 그렇지 않아도 왼손으로 바꿔볼까 생각했는데, 이 기회에 연습을 좀 해야겠어. 이 사람은 진정 야구에 미친 것인가. 당신은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라 일개 직장인이란 말이오. 이렇게 말은 하지 않았다. 팀에 왼손이 부족하긴 해요. 이런 대답을 하다니, 바보 같았다.(p.247)

  직접 본 것이든 아니면 경험한 것이든 여기에는 야구와 관련된 대부분이 들어 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하는 야구, 아버지와 함께 간 야구장, 지금은 없어진 쌍방울 레이더스의 기억과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경기, 퍼펙트게임의 조건, 올림픽의 야구 결승전과 맥주,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어리둥절한 상황 본헤드, 한국시리즈를 보는 남자와 여자, 드래프트와 우리 사회의 자화상, 기회를 기다리는 불펜, 야구 분노, 우천 경기 취소, 징크스, 심판, 야구장에서 연애하는 방법, 프로 못지않은 아마추어의 열정, 런다운, 군대에서의 야구, 가을 야구, 유부남의 야구, 사인, 시인들의 야구 관람기 그리고 잊지 못할 그 날들... 저자와 비슷한 세대라면,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를 읽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밤새는 줄 모르고 들려주는 야구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아, 그때는 정말 그랬는데... 시공을 초월한 마음의 공감이 형성된다. 야구와 함께 드러나는 젊은 시인의 감성은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센스 있는 문장은 웃음과 재미를 준다. 책에서 답을 구하라! 토크 버라이어티 <비밀독서단> 7회에서 "무언가에 푹 빠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도서로 소개되었는데, 정말로 주제와 딱 어울리는 작품이다. 우리 모두 야구의 세계에 빠져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티븐 킹, 장성주 역, [별도 없는 한밤에], 황금가지, 2015.

Stephen King, [FULL DARK, NO STAR], 2010.

브람 스토커상

  의도하지 않았으나 우연히 스티븐 킹의 첫 소설 [롱 워크](황금가지, 2015.)와 최근에 소개된 [별도 없는 한밤에]를 함께 읽었다. 한 마디로 킹에게 푹 빠져들었는데,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왜 호러의 제왕인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지,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지... 단 두 권의 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은 4개의 중,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르소설의 벽을 넘어서 문학성(혹은 예술성)이 느껴질 정도로 죄의 확장과 복수의 집념, 상대적 박탈과 상황 윤리에 관한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어서 아주 흥미롭다. 특히 글을 읽을 때는 시각적인 잔상이 오래 남았는데, 영화와 TV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30&contents_id=6049

  1922

  빅 드라이버

  공정한 거래

  행복한 결혼 생활

  [별도 없는 한밤에]를 쓰면서 나는 어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 또 그들이 선택할지도 모르는 행동 방식을 기록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등장인물들은 희망을 아예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니지만, 우리의 가장 간절한 희망조차도 (그리고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또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하여 품고 있는 가장 간절한 소망조차도) 때로는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런 경우는 빈번하다. 그럼에도 내 생각에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싶다. 고결함이란 성공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깃드는 것이며...... 우리가 그 노력을 다하지 않을 때, 또는 그러한 도전으로부터 일부러 고개를 돌릴 때, 바로 그때 우리 앞에 지옥문이 열린다고.(p.600)

  처음 쓴 소설이 상당히 거칠다면, 저자는 이 소설을 가리켜 독하다고 한다.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드와 같은 전통적인 서사를 멀리하고 여기에서는 꾸밈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절박한 위기에 처한 인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가 선인이든 아니면 악인이든 오직 처절한 생존 본능에 사로잡혀 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자는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다른 남자와 함께 살아가게 마련이다. 자기가 모르는 낯선 남자, 즉 '음흉한 남자'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1922년 3월, 헤밍퍼드 카운티의 하얀 하늘 아래 밭들이 온통 눈 덮인 진창으로 바뀌었던 그 무렵, 농부 윌프리드 제임스의 마음속에 사는 음흉한 남자는 자기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리고 그녀의 최후를 결정했다고.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사형 판결이기도 했다. 성서 말씀에 따르면 은혜를 모르는 자식은 독사의 이빨과 같다지만, 은혜를 모르고 잔소리만 해대는 아내는 그보다 훨씬 더 사악한 것이니까.(p.13-14)

  독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법이니까.(p.216)

  '1922'는 사건이 일어난 연도이다.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8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고백문을 남기고 있다. 그해 여름, 그는 땅 문제로 아내와 심하게 다투었다. 상속받은 땅을 팔고 도시로 가기를 원하는 아내와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하기를 원하는 남편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는데... 그는 아들과 공모하여 술에 취한 아내의 목을 잘라 외양간 뒤의 오래된 우물에 암매장한다. 가출로 일을 꾸미고 변호사, 이웃, 보안관을 차례로 속인다. 극성맞은 아내가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현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짧은 에피소드를 모아서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구조인데, 처음에는 잘 될 것 같은 일이 조금씩 뒤틀려서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낸다. 처음 살인을 저지른 후에 얻은 마음의 상처와 이것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은 또 다른 범행으로 이어지고... 멈출 수 없는 죄의 연속성과 확장성은 마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아서 펜 감독, 1967.)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를 보는 듯하다.

  공포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의 규칙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는 유혈극도 없고 시체도 달랑 한 구밖에 안 나와서 테스의 팬들이 좋아하는 코지 미스터리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테스는 휴대전화 창을 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소설이라면 전화가 안 터지겠지.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면, 테스가 노키아 휴대전화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표시창에 통화권 이탈이라는 글자가 떴으니까. 당연한 수순이었다.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너무 간단해지니까.(p.244-245)

  테스는 몇 걸음 더 다가가서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올려다보았다. 정을 주세요 정을 드릴게요. 무슨 상품 광고 문구일 텐데, 도대체 뭘까?(p.247)

  '빅 드라이버'는 전형적인 스릴러이다. 테사 진(테스)은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작가로 가끔 독자 강연회를 한다. 이날도 책과 관련된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진다. 곧이어 낡은 픽업트럭을 타고 나타난 덩치 큰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폐건물로 끌려가 강간을 당한다. 한껏 욕망을 채운 무자비한 손길은 그녀를 다른 두 시체와 함께 배수로 파이프에 유기하는데... 떨리는 심장으로 죽은 척 숨죽이던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다.

  정말로 우연이었을까? 난처한 상황에서 친절하게 다가와 돌연 야수로 변한 거구를 만난 것은 어쩌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파놓은 함정은 아닐까? 그날의 행적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복수를 시작한다. 영화 <리턴 투 센더>(포아드 미카티 감독, 2015.)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일을 진행하며 고양이와 내비게이션을 의인화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영화 <더 보이스>(마르얀 사트라피 감독, 2014.)를 보는 듯하다.

  차로 돌아온 스트리터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간판을 보았다. 토하느라 흘린 눈물이 아직 덜 마른 탓인지, 간판의 문구가 처음에는 헤어 익스텐션(Hair Extension, 붙임머리)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눈을 깜박거리고 다시 보니 페어 익스텐션(Fair Extension, 공정한 연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조그맣게 적힌 문구는 이러했다. 공정한 가격.(p.411)

  "인생은 공정한 거야.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 동안 주사위 두 개를 굴리다가 어느 날 휙, 던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어떤 사람은 7이 연달아 나오기도 하지.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도 1이 두 개씩 나오기도 하고.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곳이야."(p.460)

  '공정한 거래'는 미드 <환상특급>이나 일드 <기묘한 이야기>와 같은 분위기이다. 데이브 스트리터는 암 환자로 항암치료 중이다. 공항으로 이어진 연장도로에서 운전하다가 토하기 위해 잠시 멈춘 곳에서 페어 익스텐션이라는 간판을 발견한다. 적절한 대가를 지급하면, 무엇이든 연장이 가능하다는 이곳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생명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자신의 무게를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야 한다.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는 자신의 죽마고우를 지명한다.

  인생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친구와의 관계에서 늘 손해를 보았다고 여기는 그는 공정한 거래를 통해 생명을 연장하고 대신 서서히 몰락하는 친구를 지켜본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는 인과응보로 마지막에 병에 걸린 친구가 페어 익스텐션을 찾아가 불행을 되돌려주는 결말을 기대했다. 마치 아웅다웅 다투는 인간을 풍자한 전래동화처럼,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방에 고양이 털이 보이면 근처 어딘가 고양이가 있다는 뜻이야. 의식이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속삭이는 그 말이 꽤나 타당하게 들렸다.(p.516)

  다아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깨 너머를, 열려 있는 욕실 문 저편의 침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침실이 아니었다. 거울 저편의 어두운 침실이었다. 밥의 슬리퍼가 보였지만, 밥의 것이 아니었다. 밥이 신기에는 너무 컸다. 거인의 슬리퍼로 보일 만큼 커다랬다. 그 슬리퍼의 임자는 어두운 남편이었다. 그리고 주름진 침대보와 헝클어진 이불로 덮인 더블베드는? 어두운 침대였다. 다아시는 눈을 돌려 거울 속의 여인을, 헝클어진 머리에 겁에 질린 충혈된 눈을 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어두운 아내였다. 상처뿐인 영광을 품에 안은, 여인의 이름은 다아시였지만, 성은 앤더슨이 아니었다. 어두운 아내는 브라이언 델러핸티의 부인이었다.(p.544)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영화 <굿 메리지>(피터 아스킨 감독, 2014.)로 제작되었다. 다아시 매드센 앤더슨은 결혼 생활 27년째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에는... 차고에서 TV 리모컨에 넣을 건전지를 찾다가 남편이 숨겨 놓은 물건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뜻밖의 물건을 통해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다. 남편은 흉악한 연쇄살인범이고 지난 세월 동안 이것을 철저히 숨겨온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해서 세상의 손가락질을 함께 받을 것인가? 모르는 척 외면하고 결혼 생활을 지켜갈 것인가? 사업하는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의 앞날을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자 곁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 수는 없다.

  별이 없는 캄캄한 한밤은 매우 처절하다. 작가는 살인의 과정, 폭행의 과정, 몰락의 과정, 복수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비극의 상황에서 살기 위한 투쟁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철저히 자신을 우선시한다. 생존이 먼저이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스릴러의 범주에서 상당히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살라 시무카, 최필원 역, [피처럼 붉다], 비채, 2015.

Salla Simukka, [PUNAINEN KUIN VERI(AS RED AS BLOOD)], 2013.

  또 한 권의 북유럽 스릴러를 만났다.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하는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에 이어서 이번에는 핀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살라 시무카의 소설 [피처럼 붉다]이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라고 해서 백설공주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17세 소녀 루미키 안데르손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 어덜트 픽션이다. 십 대 후반으로부터 이십 대 초반의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그래서인지 정통 스릴러의 묵직함보다는 가벼움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녀의 부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딸에게 붙여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었고,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빛나지 않았으며, 입술도 도드라지게 빨갛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에게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핀란드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 '루미키'이지만 설령 그녀가 그림 동화 속 캐릭터라 해도 이건 옳지 않았다. 그냥 친가 쪽의 이름을 따서 스웨덴식으로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름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염색약과 화장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었다.(p.26)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동화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했다고 해서 문득 떠오른 것은 남과 다른 가족사, 특히 새엄마(아빠)를 상대로 하는 대결구도를 예상했다. 숲 속의 일곱 난쟁이에 버금가는 친구들의 도움과 독 사과의 위기 그리고 백마를 탄 왕자까지... 하지만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이어지는 속편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가 나오면 명확해지겠지만, 처음 시작은 단지 이름이 백설공주일 뿐, 뚜렷한 이미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p.34)

  속단하지 마라.(p.36)

  자신의 영리함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자신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생각은 버려라.(p.51)

  모르는 번호에는 응답하지 마라. 절대로.(p.67)

  악몽으로 자꾸만 되새겨지는 기억,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십 대 소녀는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기에 나름의 규칙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일까? 리히매키에서 온 스웨덴계 핀란드인 루미키는 독립해서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탐페레의 명문 예술학교에 재학 중인데, 또래와는 다르게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성격이다. 그녀는 우연히 학교 암실에서 피를 씻어 말리는 3만 유로 지폐 다발을 발견한다. 휘말리지 마라, 참견하지 마라, 자기 일만 걱정하면 된다는 좌우명을 어기고 돈의 이동을 뒤따른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우리가 찾아내고 말 테니까. 도망쳤다가 걸리면 우린 널 죽일 거야.

  널.

  죽일 거야.(p.142)

  루미키는 그런 걸 원치 않았다. 낯선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기억하는 게 싫었다. 지인들에게조차 자신의 기억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투명하게, 그리고 무취 상태로 살고 싶었다.(p.186)

  상대가 쓰는 향수로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소녀는 왜 무색무취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일까? 피 묻은 돈뭉치는 누구의 것일까? 처음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는 두 가지는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돈의 출처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심리 압박은 과거의 사연을 궁금하게 하는데, 결론은 집단 따돌림과 이별에 관한 기억 때문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은돈의 유혹은 결국 십 대를 곤경에 빠뜨린다. 여기에서 나오는 눈처럼 흰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 흑단처럼 검은 머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백설공주라는 동화적인 상상보다는 범죄조직의 비밀파티에 잠입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민 매혹적인 모습이다.

  살면서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단지 생각이 어리고 세상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남몰래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아니 어쩌면 현재에도, 내가 과거를 돌아보듯이 미래의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장하는 인간에게 두려울 것은 없다. 그리고 미리 겁먹어 실패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친구들의 따돌림, 연인과의 이별, 검은돈의 유혹... 속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백설공주를 만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롱 워크 밀리언셀러 클럽 143
스티븐 킹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처드 바크만(스티븐 킹), 송경아 역, [롱 워크], 황금가지, 2015.

Richard Bachman(Stephen King), [THE LONG WALK], 1979.

  가난한 러시안 이민자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30여 년간 문학상을 휩쓸며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진 로맹 가리(Romain Gary)는 어느 순간 평론가로부터 "그는 이미 끝난 작가다!"라는 혹평에 시달린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젊은 작가 에밀 아자르(Emile Ajar)는 문단과 대중으로부터 "새롭고 엉뚱하고 기발한 언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후에 출간한 로맹 가리의 소설은 매번 에밀 아자르의 글과 비교되고 심지어 표절까지 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5년간 계속된 두 작가의 창작활동은 어느 날 동시에 멈추는데, 1980년 12월 2일 로맹 가리의 죽음과 함께 에밀 아자르도 사라진다. 인생의 깊이를 원숙하게 표현한 노작가와 젊고 신선한 영감으로 가득했던 신인 작가는 사실 같은 인물이었다([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로맹 가리, 1981.).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유서에서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zSwd2L7QQY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데에 어떤 비밀이 있기에 본명이 아닌 필명을 그것도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스티븐 킹도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책이 작품성으로 평가되는지 아니면 작가의 이름에 의존하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시도는 책을 읽는 것 외에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58660&memberNo=19935397&vType=VERTICAL

  바크만이 된다는 것의 중요성은 언제나 나 자신의 것과는 조금 다른 훌륭한 목소리와 유효한 시점을 찾아내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진짜로 다른 것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믿을 정도로 심한 분열증 환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시각과 인식을 바꾸기 위해 쓰는 속임수들이 있다고 믿는다. 다른 옷을 차려입고 헤어스타일을 다르게 바꿔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는 것 같이. 그리고 그런 속임수들은 삶을 살아가고, 삶을 관찰하고, 예술을 창조할 때 익숙한 전략들에 새로운 활력과 원기를 주는 방법으로 매우 쓸모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언급은 내가 바크만 책으로 어떤 위대한 일을 했다고 암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고, 예술적 장점이 있다는 논거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그것이 낡아빠지게 만들고 싶지 않다. 바크만은 내 기술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 내가 너무 편안하고 느즈러지지 않게 만들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p.14-15)

  기록을 경신하거나 순위를 매기기 위한 경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승자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 경주라면, 아무리 막대한 보상이 따른다고 해도 선뜻 참가를 결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절박한 사연을 가진 100명의 십 대 소년이 모여 죽음의 레이스를 펼친다. 모두가 쓰러질 때까지 이어지는 처절한 생존 경쟁은 영화 <배틀 로얄>을 보는 기분이고, 자기가 속한 지역의 참가자를 열렬히 응원하는 군중의 모습을 통해서 영화 <헝거 게임> 시리즈가 연상된다. 소설 [롱 워크]는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걷는 투쟁과 절망의 기록이다.

  힌트 13번 : 언제든 가능할 때 에너지를 아껴둬라.(p.32)

  힌트 6번 : 느리고 편하게 가야 해낸다.(p.47)

  힌트 3번 : 스니커즈를, 반복한다, 스니커즈를 신지 마라. 롱 워크에서 스니커즈보다 빨리 물집을 잡히게 만드는 것은 없다.(p.66)

  힌트 12번 : 선수용 양말을 추천한다.(p.76-77)

  힌트 10번 : 숨을 아껴라. 보통 때 담배를 피운다면 롱 워크 도중에는 피우지 않도록 노력해라.(p.81)

  8번 규칙 : 동료 워커들에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p.102)

  삶에서 롱 워크에 참여하는 것이 최선인 상황... 개러티 레이먼드 데이비스 47번, 피터 맥브라이스 61번, 행크 올슨 70번, 아트 베이커 3번, 바코비치 5번, 스테빈스 88번... 주어진 번호를 가슴에 붙이고 출발 선상은 공포와 긴장이 감돈다. 모두 고열량 농축 페이스트 튜브를 배급받은 후, 오전 9시 통령의 신호와 함께 출발이다. 하프트랙을 타고 따라오는 군인들은 참가자 한 명, 한 명을 주시한다. 물은 요청하면 수시로 공급받을 수 있다. 최저 제한 속도는 시속 6.5킬로미터이다. 경로를 이탈하거나 제한 속도를 어기면 세 번의 경고를 한다. 네 번째에는 경고 없이 바로 총살이다. 한 시간을 제대로 걸으면 한 번의 경고가 취소된다. 이제 쉼 없이 걸어야 한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용변을 보는 것도... 걸으면서 해결해야 한다. 이기면 남은 평생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전에 멈추면 죽는다!

  "만약 내가 여기서 벗어나면 뭘 할지 알아?"

  맥브라이스가 갑자기 말했다.

  "뭔데?" 베이커가 물었다.

  "좆이 퍼래질 때까지 섹스할 거야. 5월 1일 여덟 시 십오 분, 지금 이 순간만큼 내 생에서 호색적인 때가 없었어."(p.106-107)

  "그럼 너는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확신한다면,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야?"

  개러티는 그에게 물었다.

  "우리 모두 이걸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지."

  스테빈스가 말했다. 그는 부드럽게, 거의 애정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그의 입술은 햇빛으로 바싹 말랐다. 그것을 빼면 그의 얼굴은 여전히 주름 하나 없고 천하무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죽고 싶어, 그래서 우리가 이걸 하고 있는 거야. 달리 무엇이겠어, 개러티? 달리 무엇이겠어?"(p.215)

  "당연하지. 우리는 모두 미쳤어. 아니면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그 문제는 다 논의한 줄 알았는데, 우리는 죽고 싶은 거야, 레이. 머리가 아프고 흐려서 그 생각을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어? 올슨을 봐. 막대기 위에 얹은 해골바가지잖아. 그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해 보시지. 넌 못해. 준우승? 우리 중 한 명이 속아서 진짜로 원하는 것을 빼앗기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빠."(p.258)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유는 그저 사소하기 때문이야. 알겠어? 우리는 사소한 것에 우리를 팔고 우리 영혼을 거래했어. 올슨, 그는 시시했어. 웅장하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상호 배제하는 게 아니야. 그는 웅장하고 시시해. 어느 쪽이든, 혹은 둘 다야. 그는 현미경 아래의 벌레같이 죽었어."(p.300)

  "납으로 틈을 댄 거." 베이커가 말했다.

  ...

  "군인들이 내게 그걸 하는 걸 보지 마. 그것도 약속해 줘." 베이커가 말했다. 개러티는 말을 할 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마워. 넌 내 친구였어, 개러티."(p.430)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는 참가자의 수를 하나둘 줄여간다. 다리에 쥐가 나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난다.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낙비... 어둠의 두려움과 언덕길의 고행, 졸음과 싸워야 하고 배고픔을 견뎌야 한다. 총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고 그때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폭풍우와 우박, 일사병, 소화 경련, 감기, 근육통, 신발 뒤축이 떨어져 나간다. 이제는 쉬고 싶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본능은 어떤 모습일까? 혈기 왕성한 십 대는 성욕에 불타오르고 육체의 한계에 다다를수록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마치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영혼을 판 것처럼... 통령과 군인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대열을 이탈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전부 허사이다. 날카로운 신경과 반쯤 마비된 이성으로 자기만의 논리를 펼치기도 하고, 드러내지 않은 과거의 일을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기대한 것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해냄출판사, 2002.)처럼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긴박한 상황에서 서로를 챙기고 남은 자는 먼저 간 자를 배려하는데, 몇몇은 짧은 시간에 친구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 롱 워크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자신감과 함께 뭔가 준비를 단단히 해서 출발하는 것 같지만, 인생 여정은 절대 만만치 않다. 사소한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몇몇은 일찍 낙오하지만, 커다란 대열의 흐름은 어느 정도 유지된다. 결국,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건 어떨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상당히 거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러스트 창가의 토토 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고향옥 옮김 / 김영사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구로야나기 테츠코 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고향옥 역, [일러스트 창가의 토토], 김영사, 2015.

Kuroyanagi Tetsuko, Iwasaki Chihiro, [EHON MADOGIWA NO TOTTO-CHAN], 2015.

  책을 출간하자마자 바로 읽어야 하는데, 유행이나 흐름에 민감하지 않아서 뒤늦게 읽은 어른을 위한 동화 [창가의 토토]이다.

  토토는 초등학교 1학년이에요.

  그런데 퇴학을 당했어요. 겨우 1학년인데 말이에요!

  지난주에 엄마는 토토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갔답니다.

  선생님은 딱 잘라 말했죠.

  "댁의 따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학교로 전학시켜 주세요! 정말이지 곤란합니다!"(p.6)

  조기교육과 선행학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실제로 대부분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 읽기와 쓰기는 물론 사회성까지 잘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흔히 말하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렇지 못했는데... 일본이 전쟁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자라난 세대는 지금과 비교해서 많은 것이 결핍되었을 것이다.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괴상한(?) 행동으로 자퇴를 권유받고 전학을 가야 한다면, 아이와 부모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까? 그러나 엄마는 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선생님을 찾아 다른 학교로 간다.

  도모에 초등학교

  바로 그때,

  토토의 눈에 꿈 같은 광경이 들어왔어요.

  토토는 몸을 구부려 교문 옆 나무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봤어요.

  "엄마! 저게 진짜 기차예요?

  운동장에 나란히 서 있는 거 말이에요!"

  토토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답니다.

  '기차 교실이라......'(p.20-21)

  배우이자 오랫동안 인기 토크쇼 <테츠코의 방>을 진행한 구로야나기 테츠코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우리에게 자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창가의 토토]는 남과 다른 행동으로 처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초등학교 1학년 토토가 대안학교인 도모에 초등학교에서 꿈을 꾸며 친구를 사귀고 성장해 가는 내용이다. 기차를 가져다가 교실로 만든 이 별난(?) 학교는 이전의 학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교장 선생님은 토토에게 말했어요.

  "자, 선생님에게 뭐든지 말해 보려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든 좋다."

  토토는 뛸 듯이 기뻐서 곧바로 이야기를 쏟아 냈답니다.(p.31)

  교장 선생님은 토토가 하는 말에 관심을 두고 끝까지 들어준다. 수업은 그날의 시간표에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먼저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글을 쓰고,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뒤에서 실험한다. 바다에서 나는 것과 산에서 나는 것을 반찬으로 점심 도시락을 먹고, 식사 후에는 유채꽃밭에서 산책한다. 여름에는 모두 벌거벗고 수영을 하고, 아무리 흙이 묻고 찢어져도 상관없는 가장 허름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간다. 혹시 더러워질까, 찢어질까? 신경 쓰지 않고 맘껏 놀 수 있도록...

  화장실에서 퍼낸 것이 꽤 수북이 쌓였을 때였어요.

  때마침 교장 선생님이 화장실 뒷길을 지나갔어요.

  "얘야, 뭐 하고 있니?"

  "지갑을 화장실에 빠뜨렸어요."

  "그래."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답니다.

  다시 시간이 한참 흘렀어요. 지갑은 여전히 찾지 못했죠.

  화장실에서 퍼낸 똥오줌은 점점 산더미같이 높아졌어요.

  다시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며 물었어요.

  "찾았니?"

  "아니요."

  선생님은 토토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친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다 끝나거든 원래대로 해 놓으렴."(p.64-65)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화장실에서 오줌똥을 퍼내어 입구에 쌓아놓고 있다. 지나가다가 이런 해괴망측한 행동을 본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나무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갑을 빠뜨린 아이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대한다. 훗날, 아이는 자라나 유명인이 되어 그날을 회상하는데... 나를 믿어 주고 어엿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대해 준 것에 지갑을 찾지 못해도 만족감을 얻었다고 한다. 토토는 이런 선생님들 틈에서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게 된다.

 

 

 

 

 

 

  도모에 초등학교는 야스아키나 다카하시처럼 몸에 장애가 있거나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아이가 몇 명이나 있었지만 고바야시 교장 선생님은 한 번도 "도와주렴."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모두가 똑같단다. 함께해야 하는 거야."라고만 했지요. 그래서 토토와 아이들은 무엇이든 함께했습니다. 도와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토토가 야스아키를 나무에 데리고 올라간 것도 올라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p.182)

  어린이는 단순히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토토는 절대 이상한 아이가 아니었다. 조금 생각이 많고 행동이 앞설 뿐, 모두가 똑같다.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 이것이 교장 선생님의 교육철학이다.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람을 가리며 차별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더불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따뜻함이 있다.

  수묵화와 수채화의 장점을 살려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