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살라 시무카, 최필원 역, [피처럼 붉다], 비채, 2015.

Salla Simukka, [PUNAINEN KUIN VERI(AS RED AS BLOOD)], 2013.

  또 한 권의 북유럽 스릴러를 만났다.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하는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에 이어서 이번에는 핀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살라 시무카의 소설 [피처럼 붉다]이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라고 해서 백설공주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17세 소녀 루미키 안데르손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 어덜트 픽션이다. 십 대 후반으로부터 이십 대 초반의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그래서인지 정통 스릴러의 묵직함보다는 가벼움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녀의 부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딸에게 붙여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었고,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빛나지 않았으며, 입술도 도드라지게 빨갛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에게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핀란드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 '루미키'이지만 설령 그녀가 그림 동화 속 캐릭터라 해도 이건 옳지 않았다. 그냥 친가 쪽의 이름을 따서 스웨덴식으로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름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염색약과 화장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었다.(p.26)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동화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했다고 해서 문득 떠오른 것은 남과 다른 가족사, 특히 새엄마(아빠)를 상대로 하는 대결구도를 예상했다. 숲 속의 일곱 난쟁이에 버금가는 친구들의 도움과 독 사과의 위기 그리고 백마를 탄 왕자까지... 하지만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이어지는 속편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가 나오면 명확해지겠지만, 처음 시작은 단지 이름이 백설공주일 뿐, 뚜렷한 이미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p.34)

  속단하지 마라.(p.36)

  자신의 영리함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자신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생각은 버려라.(p.51)

  모르는 번호에는 응답하지 마라. 절대로.(p.67)

  악몽으로 자꾸만 되새겨지는 기억,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십 대 소녀는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기에 나름의 규칙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일까? 리히매키에서 온 스웨덴계 핀란드인 루미키는 독립해서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 탐페레의 명문 예술학교에 재학 중인데, 또래와는 다르게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성격이다. 그녀는 우연히 학교 암실에서 피를 씻어 말리는 3만 유로 지폐 다발을 발견한다. 휘말리지 마라, 참견하지 마라, 자기 일만 걱정하면 된다는 좌우명을 어기고 돈의 이동을 뒤따른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우리가 찾아내고 말 테니까. 도망쳤다가 걸리면 우린 널 죽일 거야.

  널.

  죽일 거야.(p.142)

  루미키는 그런 걸 원치 않았다. 낯선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기억하는 게 싫었다. 지인들에게조차 자신의 기억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최대한 투명하게, 그리고 무취 상태로 살고 싶었다.(p.186)

  상대가 쓰는 향수로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소녀는 왜 무색무취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일까? 피 묻은 돈뭉치는 누구의 것일까? 처음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사로잡는 두 가지는 주인공의 트라우마와 돈의 출처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심리 압박은 과거의 사연을 궁금하게 하는데, 결론은 집단 따돌림과 이별에 관한 기억 때문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은돈의 유혹은 결국 십 대를 곤경에 빠뜨린다. 여기에서 나오는 눈처럼 흰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 흑단처럼 검은 머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백설공주라는 동화적인 상상보다는 범죄조직의 비밀파티에 잠입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민 매혹적인 모습이다.

  살면서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단지 생각이 어리고 세상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남몰래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아니 어쩌면 현재에도, 내가 과거를 돌아보듯이 미래의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장하는 인간에게 두려울 것은 없다. 그리고 미리 겁먹어 실패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친구들의 따돌림, 연인과의 이별, 검은돈의 유혹... 속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백설공주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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