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선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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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노진선 역, [미드나잇 선], 비채, 2016.

Jo Nesbo, [MERE BLOD](MIDNIGHT SUN), 2015.

  빨간색과 파란색의 대비... 요 네스뵈의 '오슬로 1970 시리즈' 첫 번째 [블러드 온 스노우](비채, 2016.)에 이어서 두 번째 [미드나잇 선]을 읽었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빨간 책은 강렬하고, 파란 책은 희망적이다. 빨간 책이 오슬로에서 조직을 배신한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라면, 파란 책은 오슬로를 떠나 노르웨이의 최북단으로 도망간 해결사의 이야기이다. 빨간 책과 파란 책은 일부 같은 조직원이 등장하는데, 모두 뱃사람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은 암살자와 해결사라는 일을 하지만, 이것과 어울리지 않게 순정적이고 쉽게 사랑에 빠지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전작이 형사 해리 홀레가 나오는 시리즈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약물에 의존하는 몽환적인 장면이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대기는 맑아서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력이 허락하는 한. 사람들은 핀마르크 고원이 아름답다고들 한다. 아름답기는 개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그냥 그렇게 돌려 말하는 거 아닌가? 약간 센 척하기 위해 혹은 남들보다 우월하고 무슨 통찰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나 어려운 문학 작품을 좋아한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때는 나도 그랬다. 그렇게 하면 나의 부족한 면들 중에서 적어도 서너 가지는 채워질 줄 알았다. 어쩌면 그 말은 여기 사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긴 정말 아름답네요." 왜냐하면 이 단조롭고 평평하고 황량한 풍경이 아름다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긴 마치 화성 같다. 붉은 사막. 사람이 살 수 없는 잔혹한 곳. 숨기에 완벽한 장소. 부디 그러하길.(p.7-8)

  낭만적인 휴가 여행이 아니라 목숨의 위협으로 긴박한 상황이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척박하고 황량할 뿐이다. 숨을 곳이 필요하다. 빨간 책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77년 8월,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이 접해있는 핀마르크 주의 코순이라는 마을에 낯선 외지인이 들어선다. 이름을 울프라고 하는 남자는 사냥을 하러 왔다고 하지만, 그의 품에는 권총과 거금이 들어 있는 전대를 차고 있다. 그는 뱃사람의 추적을 피해 도망 중이다.

  "아저씨는 레스타디우스교가 아닌가요? 그럼 지옥 불에 떨어질 거예요."(p.28)

  "코순 말이에요. 이 집들. 예전에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어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요. 하지만 1945년에 소련군이 도착하자 독일군은 도망쳤고, 후퇴하면서 마을을 모두 다 태워버렸어요. 교회만 제외하고요."

  "초토화 작전이군요."(p.34)

  본명은 욘한센으로 공원에서 대마초를 팔다가 우연히 뱃사람 조직에 들어갔다. 해결사로, 엄밀히 말해서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해결사로 일했다. 다행히(?) 뱃사람의 악명으로 그럭저럭 일 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공원에서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눈 여자의 임신으로(사실 친자인지 확실하지 않다) 딸의 생활비와 병원비를 부담한다. 그러다 결국 뱃사람의 돈을 빼돌려 뱃사람은 다른 해결사를 그에게 보낸다. 해결사를 피해 도망 중인 전직 해결사는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의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마을에 늦은 시간에 도착한다. 교회에서 밤을 보내는데, 잠시 눈을 붙인 후에 교회 관리인 레아와 그녀의 아들을 만난다.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어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에서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있다. 관리인은 그에게 외딴 오두막을 알려주는데, 거기에서 죽이러 오는 자를 기다려야 한다. 부디 추적자들이 그냥 지나쳐 가기를... 그런데 그전에 레아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또한 약점을 지닌 자였습니다." 그가 말했다. 약점. "우리 모두가 가진 그런 약점이죠. 죄를 지었을 때 그 죄와 대면하지 않으려고 달아날 수 있는 자였으며, 시간이 흘러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길 바라며 그냥 어딘가에 숨어버리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처벌로부터 숨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릴 찾아내십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예수의 잃어버린 양이기도 했습니다. 무리에서 이탈한 양이자,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비롭게 구원하고자 하는 양이었습니다."(p.101-102)

  자기가 찾는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는 뱃사람, 언제나 죄인을 찾아내시는 예수 그리스도... 조직에서 이탈한 자를 가차 없이 처리하는 악랄한 인간, 무리에서 이탈한 양을 자비로 구원하는 신... 울프는 무신론자이고, 뱃사람에게서 벗어나길 원한다. 하지만 복수의 칼과 은혜의 손길은 늘 그의 곁을 서성인다. 이러한 대비가 매우 흥미롭다.

  "화가 나요? 화가 난 정도가 아니라 부아가 치민다고요. 당신들이 말하는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왜 인간에게 그런 장난을 치는 겁니까? 왜 누구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받게 하고, 왜 누구는 풍족한 삶을 살죠? 대다수는 신에 대해 듣지도 못하는데 왜 누구든 자기를 구원해줄 믿음을 찾아내는 겁니까? 왜 신은...... 어떻게 그렇게......?"(p.161)

  태어나자마자 병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딸에 관한 기억은 신을 향한 불신으로 불공정함을 토로하게 한다.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받고, 누군가는 풍족한 삶을 사는데... 인간은 미리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인가? 그 또한 예정된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울프와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레아...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울프는 추적자를 따돌려야 하고, 레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 하지만 운명과 신앙의 족쇄는 이들의 발목을 움켜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흠. 단상에 올랐는데 그다지 확고한 믿음이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턱을 문질렀다. "그럴 때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믿는 수밖에. 금욕 생활을 하고 죄를 짓지 않는 건 이 속세에서도 가치 있는 일이오. 운동선수들도 훈련에서 얻는 통증과 노력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다 들었소. 설사 우승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오. 그것과 비슷한 이치라 할 수 있지. 설사 천국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안정되고 훌륭한 삶을 살고 있소. 열심히 일하고, 검소함을 실천하고, 하나님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보살피면서 말이오. 역시 성직자였던 우리 아버지께서 레스타디우스교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우리의 종교를 통해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고, 가정이 깨지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하는 일은 가치 있다고 하셨소. 설사 우리가 거짓을 설교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오. 대로는 성경에 따라 사는 것이 필요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있소. 레아의 경우처럼...... 내가 잠시 망상에 빠져 레아에게 강요한 삶처럼 말이오."(p.269-270)

  종교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어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삶을 바꾸기 위한 남자와 여자의 투쟁은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

  빨간 책과 마찬가지로 파란 책도 아주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어쩔 수 없이 보스의 돈에 손을 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세상의 끝으로 도망치지만, 여전히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 역사의 아픔과 함께 종교의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영화의 단골 소재라서 어디에선가 본듯한 기분으로 아주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사랑의 눈빛이 살아있는 진짜로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전하고 있다. 순응하는 것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바꾸는 것은 좀 더 짜릿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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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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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료, 권일영 역, [천사들의 탐정], 비채, 2016.

Hara Ryo, [TENSHI TACHI NO TANTEI], 1997.

  빗방울 떨어진 도시가 그려진 회색빛 표지는 마치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정통 하드보일드 작가로 알려진 하라 료의 단편 [천사들의 탐정]이다.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시리즈인데, 이전에 출간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오래된 블루버드 승용차를 몰고 24시간 전화 응답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소년이 본 남자

  자식을 잃은 남자

  240호실의 남자

  이니셜이 'M'인 남자

  육교의 남자

  선택받은 남자

  후기 - 탐정을 지망하는 남자

  얼핏 제목만으로는 무슨 남자라고 해서 남자와 관련된 연작인 것 같지만, 실제로 여섯 개의 단편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이런저런 사연으로 심각한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그 때문일까? 거리의 소년과 소녀를 천사로 표현하여 그들을 돕는 탐정이라는 의미를 가진 제목은 다소 낭만적이다. 한편으로 소년법과 함께 인생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미성년자를 사회적으로 배려하는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보디가드가 되어주세요."

  "뭐라고? ......너, 왕따 당하니? 다른 애들이 괴롭히지 못하도록 지켜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지?"

  "내 보디가드가 아니고요. 어떤 여자를 지키는 거예요."(p.15)

  장마철로 접어든 어느 금요일 오후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우연히 누군가를 살해하려 한다는 대화를 엿듣고 하루 동안 경호원이 되어달라는 의뢰이다. '소년이 본 남자'는 누군가를 죽이려는 음모를 막는 과정인데,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이가 모르는 어른의 세계는 자칫 순수함을 짓밟을 수 있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겪어야 했던 악몽에서 깨어난다.

  "옛날 여자에게 보낸 내 편지를 사라는 협박 전화가 왔는데 그 거래 현장에 당신이 함께 가주면 좋겠습니다."(p.65)

  부와 명성을 지닌 한국인 지휘자는 아주 오래전에 연인에게 보낸 편지를 사라는 연락을 받는다. '자식을 잃은 남자'는 편지를 가지고 있는 이는 누구인지, 왜 그 편지를 가지고 있는지, 편지의 수신인은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젊은 유학생 시절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그녀, 연락해온 이는 어쩌면 나와 그녀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의뢰인은 그녀에 대한 고마운 기억으로 요구한 금액을 순수히 준비한다.

  "다시 이야기하지. 난 당신을 미행하지 않았어. 당신 딸을 미행했지. 그런데 딸이 당신을 미행한 거야. 그러니 나는 당신 딸뿐 아니라 당신이 무얼 했는지도 알게 된 거지. 그뿐이야."(p.115)

  딸의 품행을 조사해 달라던 사업가는 일주일 동안 별다른 혐의가 없음을 알고 비용 지급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호텔 240호실에서 누군가와 불륜을 저지른 것과 딸이 자신을 미행하였음을 알고 놀란다. '240호실의 남자'는 결국 치정에 얽혀 호텔에서 교살당하는데, 누가 그를 죽였을까? 드러나는 그의 파렴치한 행적은 동정심마저 잃게 한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단 말이야. 당신에게 전화하는 것도 이제 이게 마지막이야. 누구든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난 이 세상과 작별할 테니!"(p.164)

  우연히 탐정 사무소로 잘못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여자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기 직전이라는 말을 남긴다. 장난으로 여기고 냉정하게 대응하자 그녀는 내일 신문을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다음 날 신문에는 십 대 아이돌 여가수가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경찰로부터 마지막 통화를 한 곳이 탐정 사무소라는 연락을 받고 그녀임을 알게 된다. 유서에 남은 '이니셜이 M인 남자'는 누구일까?

  "후시미 부인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의뢰를 받아들인 다음에 그 조사 결과는 우리 뜻에 따라 보고해주시면 좋겠다는 겁니다." 나루시마가 얼른 덧붙였다. "그게 후시미 부인을 힘들게 하지 않을, 가장 배려 깊은 선택이기 때문이죠."

  "호오...... 그러니까, 조사 보고를 거짓으로 하라는 소린가?"(p.212)

  '육교의 남자'는, 동종업계 종사자라고 밝힌 도쿄 제일흥신소에서 나온 여자는 무턱대고 조사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아니, 자신이 조사한 내용과 결과를 일치시킬 것을 말하며 이것이 의뢰인을 위한 최선이라는 주장을 한다. 의뢰인을 배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결과가 같은 결론에 다다르면 그때 가서 연락하기로 하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사와자키는 이전에 조사 의뢰를 받은 적이 없다.

  "슌이치가, 제 아들인 슌이치가 좀 전에 전화를 걸어 골치 아프게 되었다, 큰일났다고 했습니다. 흥분한 상태라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준이 죽었고 자기가 범인으로 몰릴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분간 집에 들어올 수 없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만 하고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습니다."(p.258)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살인범으로 몰릴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가 사라졌다. 아이를 찾아달라는 엄마의 의뢰는 간절하다. 선거기간, 청소년 선도위원과 사립탐정은 거리의 소년과 소녀를 만나며 사라진 아이의 흔적을 뒤쫓는다. '선택받은 남자'는 선거운동의 치열함과 행방을 알 수 없는 소년을 찾는 과정을 긴박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후기 '탐정을 지망하는 남자'에서는 평범한 회사원이던 사와자키가 전직 경찰인 와타나베를 만나 탐정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대의 반영이라고 할까? 거품경제의 붕괴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음울하게 그려진 회색빛 도심에서 천사로 묘사된 거리의 젊은이는 불투명한 미래로 암울하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당장 오늘의 문제가 숨통을 조여오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각각의 인물은 다가오는 시련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회피하고 도망치기도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무엇을 해도 괜찮으나 극단적인 선택만은 피하라! 그래야 천사들의 탐정이 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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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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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노진선 역, [블러드 온 스노우], 비채, 2016.

Jo Nesbo, [BLOD PA SNO](BLOOD ON SNOW), 2015.

  올봄에도 어김없이 반가운 소식, 강렬한 붉은색 표지가 인상적이다. 북유럽 스릴러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낸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의 신작 [블러드 온 스노우]를 읽었다. 그동안 잘 알려진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색채로 우리를 유혹하는데, 그는 점점 진화하는 것일까? 킬러를 주인공으로 짧으면서 묵직한 소설을 쓰다니... 이것은 정녕 같은 사람의 글인가 싶을 정도로 확연히 다른 개성을 보인다. 이번에는 '오슬로 1970 시리즈'라고 하는데,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975년의 겨울을 배경으로 눈과 얼음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누아르는 자극적이면서 관능적이고 냉혹하면서 섬세하다.

  남자의 셔츠를 타고 내려온 피가 눈 위로 뚝뚝 떨어졌다.(p.5)

  난 피가 눈 표면에서 얼어 그대로 남아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은 떨어지는 피를 빨아들이며 표면 아래로 끌고 가 감춰버렸다. 마치 어디 쓸 데가 있다는 듯이. 나는 집으로 걸어가며 눈 더미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람을 상상해보았다. 창백한 얼음 피부 아래로 혈관이 또렷이 보이는 눈사람.(p.7)

  어딘가 모르게 남과 다른, 평범하지 않은 남자 올라브 요한센은 마치 시인과 같아 천성이 유약하고 예민해서 아무 일이나 잘하지 못한다. 특별히 지독하거나 계산적이지 않고 심지어 아주 빠르게 사랑에 빠진다. 동화 속 왕의 이름을 가진 그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는 거물 마약상 밑에서 청부 살인을 한다. 올라브에 관해서 좀 더 언급하면, 그는 농아에 절름발이인 매춘부를 위해 그녀의 남자 친구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고, 경쟁 상대인 뱃사람이 보낸 해결사를 제거하면서 남은 가족을 도와준다. 그는 할 일을 하되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자신이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하는 것보다 어떻게 일을 그만둘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게 내 생각이다. 할 일을 하되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따라서 호프만이 새 일을 맡겼을 때 난 진짜 더럽게 걱정이 됐다.

  그는 자기 아내를 죽여 달라고 했다.(p.15)

  "강도사건으로 위장했으면 좋겠네, 올라브."

  "왜요?" 내가 물었다.

  "살인이 아닌 사고처럼 보여야 하니까. 선량한 시민이 죽으면 경찰은 늘 분노하지. 사건을 해결하려고 약간 지나칠 정도로 용을 쓴단 말이야. 그리고 바람피운 여자가 시신으로 발견되면 남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야. 물론 그런 사건의 90퍼센트는 실제로 남편이 범인이기도 하고."

  "74퍼센트예요, 어르신(sir)."(p.16)

  어쨌거나 이런저런 실패를 경험한 후에 나름의 재능(?)을 발견한 주인공은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한다. 하지만 더럽게 걱정되는 의뢰,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으로 보스는 자기의 아내를 죽여달라고 한다. 고독한 남자는 바람을 피우는 보스의 젊은 부인을 보고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데, 어쩌면 그녀는 꿈에 그리던 여인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난독증이 있어요."

  ...

  "하지만 글자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읽을 수가 있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가끔씩 잘못 보죠. 그래서 다시 봐야 해요." 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손은 아직 내 팔에 있었다.

  "하지만...... 잘못...... 잘못 봤다는 걸 어떻게 알죠?"

  "대개는 말이 안 되는 단어들을 보고 알아요. 하지만 가끔씩 한참 후에야 단어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죠. 그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책 한 권 값으로 두 개의 이야기를 읽는 셈이죠."(p.80-81)

  "바보 같은 자식."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신음하듯 말했다. "사람을 죽이려면 칼로 목을 긋는 거야. 이런 방법 말고......"

  "그럼 너무 빨리 끝나니까요."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웃었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입꼬리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래, 역시 내 아들이다."(p.93)

  불행한 가정환경으로 그래서 어리숙함과 전문성을,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암살자... 글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머릿속을 지배한 단어는 '양면성'이다. 세상에는 완전한 선인이 없듯이 절대 악인도 없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적정선에서 천사와 악마 모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추운 겨울에 쌓인 눈 위로 떨어진 붉은색 핏방울은 대비가 명확하지만, 그 순간 이미 둘은 한 몸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남자가 있고, 매를 맞고 가학에 시달리면서도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가 나온다.

  "못 믿겠어요."

  "뭐라고요?"

  "못 믿겠다고요. 내 생각에 당신은 그저 감추려는 것뿐이에요."

  "뭘 감춰요?"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날 사랑한다는 거요."

  나는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창문에서 떨어지는 달빛이 촉촉한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반짝거렸다.

  "당신은 날 사랑해요, 이 바보." 그녀는 힘없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해요, 이 바보.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요, 이 바보."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p.123)

  "아냐!" 난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들을 가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계속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었다. 말미잘처럼. 예전에 말미잘은 입이 곧 항문이고, 항문이 곧 입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왜 그녀는 계속 얘기하는 걸까? 원하는 게 뭘까? 다들 뭘 원하는 걸까? 이제 나는 귀가 먹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겐 더 이상 저들이, 일반인들이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저 음파, 산호초에 부딪혀 사라져버리는 저 음파를 해석할 도구가 없었다. 나는 뜻이 통하지 않는 세상, 일관성 없는 세상을 내다보았다. 다들 자기들에게 주어진 삶만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역겨운 욕망은 모조리 본능적으로 충족시키고,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과 외로움에 대한 걱정은 질식시켜버리는 세상.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게. 전부. 인가요?(p.178-179)

  오슬로의 거물 마약상, 죽이는 일을 하는 남자, 매일 바람피우는 여자, 여자를 찾는 수상한 남자... 이들은 잠시라도 사랑했을까? 행복했을까? 어긋난 만남의 끝은 크리스마스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블러드 온 스노우]는 짧지만, 제목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스릴러의 한계를 넘어서 문학적인 완성도를 보이는데, 결국 보스의 아내는 평생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하며 복종을 강요받은 엄마였고, 올라브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거리의 매춘부였다. 또한, 수학 공식처럼 짜임새 있는 구조를 자랑하는데, 앞에서 쓰인 문장 하나하나가 뒤에서 의미를 더해 폭발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볼 수 있다. 마지막의 반전은 난독증으로 두 권의 책을 읽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언어의 마술 같다는 생각이다. 번역서이지만, 따라서 써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최고의 스릴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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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지음, 윤병언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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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윤병언 역, [못생긴 여자], 비채, 2016.

Mariapia Veladiano, [LA VITA ACCANTO], 2011.

칼비노상

  이성으로 미모는 사회적 통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예쁜 여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된다. 이성과 본능 사이의 괴리라고 해야 할까? 때로는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보다. 외모에 관한 어느 외국인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합리적인 사고로 자신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절대 비판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령 인종, 국가, 부모의 재력, 외모... 등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양은 우리보다 외모에 관한 차별이 덜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조금 다른가 보다.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의 소설 [못생긴 여자]는 지독히 못생긴 여자를 주인공으로 그녀와 그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참고로 2010년 칼비노상을 받았는데, 이 상은 책을 출간한 적이 없는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

  나는 못생겼다. 진짜로 못생겼다.

  그렇다고 불구는 아니어서 남들이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내 몸에 붙어 있어야 할 것은 다 붙어 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영락없이 어딘가는 기준치보다 조금 더 짧거나 길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자학이라도 저지르자는 심산으로 가끔은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낡은 인형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쉼표 모양으로 구부러진 커다란 엄지발가락, 그리고 미소를 지으려 할 때마다 왼쪽으로 일그러지며 슬픈 냉소로 변하는 얇은 입술이 있다. 나는 냄새도 풍긴다. 마치 짐승처럼 온갖 종류의 냄새란 냄새는 다 안고 다닌다.(p.6)

  레베카는 태어날 때부터 못생겼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사내아이기만 했어도!", "내 딸이 아니고 네 딸이기에 망정이지.", "어쩜 이런 망신스러운 일이!", "저주를 피할 순 없어.", "이 집에는 너무 많은 아픔이 배어 있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애써 모른척하고 있지만, 엄마는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듯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둠이 내려와 얼굴과 몸을 가려주기 전에 집 밖을 나선 적이 없고, 남들처럼 부모로부터 친밀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자라며 학교에 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그런 아이이다. 레베카를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피아니스트인 에르미니아 고모이고, 남편과 아이를 잃고 보모로 들어온 마달레나였다. 학교에서는 괴물 취급을 당했지만, 루칠라는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준 친구이다. 알베르티나 선생님은 다른 학부모의 비난을 막아서며 그녀를 보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이러한 유전적 형질을 물려준 부모는 데면데면하다. 그래서일까? 친구의 이름은 있어도 엄마와 아버지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음악은 내 인생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새로운 사실은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로 나의 일상을 채워주었다. 나를 움켜쥐고 있었던 일종의 공허함, 그 막막하기만 했던 기다림의 시간들이 서서히 메워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장점이 있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아끼는 이유가 알 수 없는 보호 본능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p.22-23)

  못생긴 여자아이의 삶은 긴장의 연속이다. 외모가 주는 혐오감 외에 또 다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아이는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질문도 하지 않고, 빵을 흘리지 않고 먹는 법도 남들보다 먼저 배운다. 놀 때도 조용히 놀고 필요 이상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방 청소를 안 해서 잔소리를 듣는 법도 없고, 손톱을 물어뜯다가 들키는 법도 없고, 조심스럽게 걷기 때문에 양말이나 신발이 쉽게 닳는 법도 없고, 크게 말하는 법도 없고, 계단을 내려올 때 쿵쾅거리지도 않고,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지도 않는다.(p.59-60)

  못생긴 여자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에게 미래란 꿈이 아닌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말하는 미래의 꿈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모델이 되고 싶다든지 가수나 스튜어디스, 발레리나, 변호사, 의사, 비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다. 그건 다른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가끔씩 집이든 어둠 속에서든, 숨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다.(p.90-91)

  불현듯,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p.102)

  못생긴 여자를 주인공으로 어쩜 이렇게 예쁜 글을 쓸 수 있을까? 못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상처를 동반한다. 못생겼기 때문에 세상과 단절된 채 집 안에서만 머물러야 했고, 혐오감을 막기 위해 긴장된 삶을 살아야 했다. 미래와 꿈을 말하기 전에 숨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각자에게는 어울리는 삶이 있다는 아이답지 않은 생각을 품어야 했다. 못생긴 여자의 일상을 심리와 함께 아주 세밀하게 펼쳐 놓는다.

  "레베카는 원래 히브리 이름이란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지. 레베카는 이삭의 아내였어. 젊고 상당한 미인이었지. 말 그대로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란 뜻이야. 네 이름이 가진 뜻이란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엄마의 상처를 안고 다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p.147)

  "세상에는 모든 걸 남김없이 알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투성이야. 아내는 남편이 바람피웠는지 궁금해하잖아. 그런데 그걸 또 알고 나면 마음이 편한가? 절대로 아니거든. 게다가 연인들은 옛날 애인에 대해서까지 캐묻잖아. 천박한 짓이지! 사람이 매일, 매 순간 다시 태어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행동하거든.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거야. 성경 말씀 중에 옳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길거리 모퉁이마다 새로운 삶이 기다린다는 말씀이야. 인생이 끝났다는 말은 절대로 믿지 마, 절대로, 명심해두거라."(p.147-148)

  '인생이란 세월이 흐르는 것도 무시하고 간직하기만 해야 하는 귀중품이 아니야. 삶은 우리 손안에 망가진 채로 되돌아오기 일쑤야. 그리고 그걸 고칠 수 있는 부속품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그냥 부서진 채로 가지고 있어야 해. 어쩌면 없어진 걸 같이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삶이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 뒤에도, 위에도, 우리 안에도 있는 거야. 당신이 한쪽으로 물러서 있는다고 해서, 눈을 감는다고 해서,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해서 삶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우리와 다시 시작해. 우리가 여기 있잖아.'

  엄마는? 그리고 엄마는 눈을 감고 마치 로봇처럼 딱딱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본 건 신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 날 보내줘요."(p.197)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소녀... 어른들의 편견으로 아이는 상처를 입고 세상과 분리된다. 부모는 자신의 유전을 타고난 아이를 외면하지만, 치매를 앓는 노부인은 편견 없이 다가와 새로운 삶을 얘기한다. 어둠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소녀... 학교에서는 천박한 털투성이 괴물 취급을 당하지만, 그녀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못생긴 여자]는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특별한 교훈이나 형식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그저 못생긴 아이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일과 철없는 어른의 잘못된 생각을 일깨울 뿐이다. 엄마와 아버지가 가진 집안에 얽힌 사연... 모든 것이 자기의 잘못이 아님에도 세상의 경멸을 받아야 하는 여자의 인생... 레베카, 그녀가 행복했으면 하고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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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버리스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7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제프리 디버, 최필원 역, [옥토버리스트], 비채, 2014.

Jeffery Deaver, [THE OCTOBER LIST], 2013.

  한 마디로 거꾸로 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 역순 구성으로 화제가 되었던 제프리 디버의 소설 [옥토버리스트]를 읽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2000.)가 연상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1999.)이 떠올랐다. 기-승-전-결이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전통적인 구조를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에 작가는 수많은 장치와 함정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며 두뇌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구성이 약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하겠지만, 새로운 시도이기에 충분히 눈여겨볼 만하다. 간혹 거꾸로 읽는 소설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난 꿈의 직장을 가진 평범한 엄마였어요. 대니얼을 처음 만났고...... 뭔가 통하는걸 느꼈죠.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봐요. 딸은 유괴당했고, 대니얼과 당신 사장님은 협상하다가 총에 맞을 수도 있어요. 경찰은 날 쫓고 있고, 난 오늘...... 오늘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요. 오, 하느님......"(p.15)

  결말부터 시작하는 소설이라서 처음에는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관계 그리고 선과 악의 개념을 잡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중반부터 독서의 궤도에 올랐을 때는 그 이전은? 그 이전은? 이라는 궁금증으로 선행 사건에 관한 호기심을 유발하여 끊임없이 책을 읽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소설은 정확히 72시간을 역행하는데... 일요일로부터 토요일로, 금요일로 거슬러가는 3일간의 내용이다. 번역자는 한 번은 앞에서부터, 두 번째는 뒤에서부터 읽는 것을 추천하는데... 이미 이것을 의도한 편집이 눈에 띈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표지가 마음에 든다.

  "옥토버리스트 말이에요, 샘." 그녀가 <뉴욕타임스>를 샘의 앞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샘이 다가와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말이 계속됐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단서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고요. 단지 제대로 끼워 맞추지 못했을 뿐이지."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샘. 우리에게 곧 벌어질 일 말이에요."(p.17)

  사건의 중심에는 가브리엘 맥킨지라는 30대 중반의 여자가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딸 세라는 납치된 상태이고, 유괴범은 몸값으로 옥토버리스트와 미화 50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다. 겨우 이틀 전에 만난 남자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협상하러 갔고...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서 시간과 분 단위로 거슬러가며 36개의 단계를 거친다. 옥토버리스트는 무엇인지? 누가 선인이고, 악인인지? 왜 여자는 모든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앤드류가 물었다. "그러니까 '옥토버(October)'라는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얘기죠?"

  가브리엘라가 대니얼을 흘끔 쳐다보자 그가 대신 답했다. "10월에 벌어진 어떤 일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말이죠. 모임이나 사건. 아니면......"

  대니얼이 어두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다음 달에 벌어질 일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뭔지는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잘못 짚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회사나 사람 이름이 기록된 단순한 명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혹은 암호인지도 모르고요. 숫자 10. 열 번째 달."

  "어쩌면......"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대니얼은 애너그램"의 가능성을 얘기했어요."

  "옥토버(October)'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가 꽤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리부트(Reboot)', 부트(boot)', '핵심(core)', '강도질(rob)'. 뭐 추측일 뿐입니다만."(p.28-29)

  "일종의 맥거핀*입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독자나 관객의 주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속임수(p.326)

  그녀가 카르판코프에게 설명했다. "맥거핀은 서스펜스 영화에서 모든 등장인물이 쫓는 물건이에요.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 사라진 성궤, 첩보원들의 신분을 위장한 정보원 명단, 실재하지는 않지만 스토리에 추진력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죠. 나도 폭탄 테러 같은 황당한 아이디어를 한 번 떠올려볼까 해요. 은행이나 증권거래소를 날려버리는 계획 같은. 문제의 명단엔 그 테러로 크게 이득을 보는 이들의 이름이 담겨 있는 걸로 해야겠어요."(p.352)

  "여기서 한 가지 얘기해둘 게 있어요. 영화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 같은데, 메소드 연기법*이 뭔지 알죠?"

  "들어본 적 있어요. 정확히 뭔지는 모릅니다만."

  "배우가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와 정신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해요."

  *배우가 극중 배역에 몰입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방법(p.357)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 [옥토버리스트]는 영화적인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맥거핀과 메소드 연기라는... 이것은 모든 이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심지어 책을 읽는 독자까지 포함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개는 36장에서부터 역순으로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 2장과 1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실을 만날 수 있다. 이 과정은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게 하는데, 그래서인지 하드보일드 서스펜스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고, 독자를 속이기에 서술 트릭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듭되는 반전은 최고의 매력이다.

  [도로변 십자가](비채, 2012.) 이후에 오랜만에 만나는 제프리 디버의 스릴러이다. 그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그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기에 오히려 과거의 작품을 찾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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