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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하라 료, 권일영 역, [천사들의 탐정], 비채, 2016.
Hara Ryo, [TENSHI TACHI NO TANTEI], 1997.
빗방울 떨어진 도시가 그려진 회색빛 표지는 마치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정통 하드보일드 작가로 알려진 하라 료의 단편 [천사들의 탐정]이다.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시리즈인데, 이전에 출간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오래된 블루버드 승용차를 몰고 24시간 전화 응답 서비스를 이용하는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소년이 본 남자
자식을 잃은 남자
240호실의 남자
이니셜이 'M'인 남자
육교의 남자
선택받은 남자
후기 - 탐정을 지망하는 남자
얼핏 제목만으로는 무슨 남자라고 해서 남자와 관련된 연작인 것 같지만, 실제로 여섯 개의 단편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이런저런 사연으로 심각한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그 때문일까? 거리의 소년과 소녀를 천사로 표현하여 그들을 돕는 탐정이라는 의미를 가진 제목은 다소 낭만적이다. 한편으로 소년법과 함께 인생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미성년자를 사회적으로 배려하는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보디가드가 되어주세요."
"뭐라고? ......너, 왕따 당하니? 다른 애들이 괴롭히지 못하도록 지켜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지?"
"내 보디가드가 아니고요. 어떤 여자를 지키는 거예요."(p.15)
장마철로 접어든 어느 금요일 오후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우연히 누군가를 살해하려 한다는 대화를 엿듣고 하루 동안 경호원이 되어달라는 의뢰이다. '소년이 본 남자'는 누군가를 죽이려는 음모를 막는 과정인데,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이가 모르는 어른의 세계는 자칫 순수함을 짓밟을 수 있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겪어야 했던 악몽에서 깨어난다.
"옛날 여자에게 보낸 내 편지를 사라는 협박 전화가 왔는데 그 거래 현장에 당신이 함께 가주면 좋겠습니다."(p.65)
부와 명성을 지닌 한국인 지휘자는 아주 오래전에 연인에게 보낸 편지를 사라는 연락을 받는다. '자식을 잃은 남자'는 편지를 가지고 있는 이는 누구인지, 왜 그 편지를 가지고 있는지, 편지의 수신인은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젊은 유학생 시절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그녀, 연락해온 이는 어쩌면 나와 그녀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의뢰인은 그녀에 대한 고마운 기억으로 요구한 금액을 순수히 준비한다.
"다시 이야기하지. 난 당신을 미행하지 않았어. 당신 딸을 미행했지. 그런데 딸이 당신을 미행한 거야. 그러니 나는 당신 딸뿐 아니라 당신이 무얼 했는지도 알게 된 거지. 그뿐이야."(p.115)
딸의 품행을 조사해 달라던 사업가는 일주일 동안 별다른 혐의가 없음을 알고 비용 지급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호텔 240호실에서 누군가와 불륜을 저지른 것과 딸이 자신을 미행하였음을 알고 놀란다. '240호실의 남자'는 결국 치정에 얽혀 호텔에서 교살당하는데, 누가 그를 죽였을까? 드러나는 그의 파렴치한 행적은 동정심마저 잃게 한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단 말이야. 당신에게 전화하는 것도 이제 이게 마지막이야. 누구든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난 이 세상과 작별할 테니!"(p.164)
우연히 탐정 사무소로 잘못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여자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기 직전이라는 말을 남긴다. 장난으로 여기고 냉정하게 대응하자 그녀는 내일 신문을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다음 날 신문에는 십 대 아이돌 여가수가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경찰로부터 마지막 통화를 한 곳이 탐정 사무소라는 연락을 받고 그녀임을 알게 된다. 유서에 남은 '이니셜이 M인 남자'는 누구일까?
"후시미 부인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의뢰를 받아들인 다음에 그 조사 결과는 우리 뜻에 따라 보고해주시면 좋겠다는 겁니다." 나루시마가 얼른 덧붙였다. "그게 후시미 부인을 힘들게 하지 않을, 가장 배려 깊은 선택이기 때문이죠."
"호오...... 그러니까, 조사 보고를 거짓으로 하라는 소린가?"(p.212)
'육교의 남자'는, 동종업계 종사자라고 밝힌 도쿄 제일흥신소에서 나온 여자는 무턱대고 조사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아니, 자신이 조사한 내용과 결과를 일치시킬 것을 말하며 이것이 의뢰인을 위한 최선이라는 주장을 한다. 의뢰인을 배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결과가 같은 결론에 다다르면 그때 가서 연락하기로 하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사와자키는 이전에 조사 의뢰를 받은 적이 없다.
"슌이치가, 제 아들인 슌이치가 좀 전에 전화를 걸어 골치 아프게 되었다, 큰일났다고 했습니다. 흥분한 상태라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준이 죽었고 자기가 범인으로 몰릴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분간 집에 들어올 수 없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만 하고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습니다."(p.258)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살인범으로 몰릴지 모른다는 말을 남기가 사라졌다. 아이를 찾아달라는 엄마의 의뢰는 간절하다. 선거기간, 청소년 선도위원과 사립탐정은 거리의 소년과 소녀를 만나며 사라진 아이의 흔적을 뒤쫓는다. '선택받은 남자'는 선거운동의 치열함과 행방을 알 수 없는 소년을 찾는 과정을 긴박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후기 '탐정을 지망하는 남자'에서는 평범한 회사원이던 사와자키가 전직 경찰인 와타나베를 만나 탐정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대의 반영이라고 할까? 거품경제의 붕괴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음울하게 그려진 회색빛 도심에서 천사로 묘사된 거리의 젊은이는 불투명한 미래로 암울하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당장 오늘의 문제가 숨통을 조여오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각각의 인물은 다가오는 시련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회피하고 도망치기도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무엇을 해도 괜찮으나 극단적인 선택만은 피하라! 그래야 천사들의 탐정이 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