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파노라마 - 정식 계약본
테리 홀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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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홀, 배응준 역, [성경 파노라마], 규장, 2008.

Terry Hall, [BIBLE PANORAMA], 1983.

  지금까지 살면서 두 번 읽은 책을 말하라고 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어도 책장에 꽂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다시 손이 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성경을 책이라고 하면, 나는 여러 번 읽었다. 바쁨을 이유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어떤 의무감으로 꾸준히 읽으려고 한다. 목표를 세우고 매일 일정량을 정해서 읽으려고 하고...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다. 나에게 깨달음의 은혜(?)가 있어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누구는 성경이 쉽다고 하는데, 나는 어렵다!

  구판과 신판을 전부 가지고 있으니... 처음 책을 구매하고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매번 읽으려고 시도했지만, 인내력의 한계로 1~3장을 왕래하다가 멈추었다.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끝을 보았는데, 나름의 뿌듯함으로 밀린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다. 제목 그대로 성경이라는 심오하고 방대한 경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하는데, 상당히 마음에 든다. 물론 이 한 권으로 성경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좋은 출발은 될 수 있다.

  성경의 세 골격... 역사(과거), 체험(현재), 예언(미래)

  성경의 여덟 기둥...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

  성경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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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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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다카히사, 이선희 역, [리턴], RHK, 2017.

Igarashi Takahisa, [RETURN], 2013.

  악녀의 공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커다란 키에 마른 몸매, 흐릿한 눈빛과 괴이한 웃음, 시큼털털한 역겨운 냄새... 소설 [리카](RHK, 2016.)에서 혼마 다카오를 스토킹하고 납치해서 도주한 리카는 [리턴]에서 1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전작이 2000년대 초반 인터넷 환경을 배경으로 서서히 밀려오는 공포를 묘사했다면, 이번에는 2010년대 초반 모바일과 CCTV 환경을 배경으로 다시 등장한 악녀의 활동을 긴장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시신을 해부한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이 시신은 살해된 게 아니다. 사인은 목에 음식이 막혀서 죽은 질식사, 즉 살인이 아니라 사고사이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시신에는 눈도 없고 코와 혀, 귀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지. 본인에게 살아 있다는 감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남자는 살아 있었다. 아마 끼니때마다 식사를 주었을 거다. 부검한 결과, 영양 상태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동시에 몸의 어디에서도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생리적으론 완전히 건강한 상태였다는 뜻이다."(p.30)

  한 남자를 향한 여자의 왜곡된 집착은 매우 끔찍하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그토록 남자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일까? 게이마 산허리에서 등산객에 의해 여행 가방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10년 전에 실종된 혼마 다카오의 시신이 들어 있다. 팔과 다리를 정교하게 절단하고, 눈과 귀와 코를 잘라 놓은 채 납치되었던 사람이다. 부검 결과 사인은 목에 음식물이 걸린 질식사, 그는 최근까지 머리와 몸통만으로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혼마는 리카라는 이름의 여성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리카는 자칭 28세, 직업은 간호사, 독신이라고 했다. 혼마는 리카와 몇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호감을 가졌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만남 사이트의 최종 목적은 결국 만남이다. 두 사람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리카가 조금 이상해졌다. 두 사람은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했는데, 그 이후 리카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오게 되었다."(p.32)

  10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오랜 세월이다. 리카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혼다 다카오의 몸통과 함께 살았다. 숨은 붙어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남자... 리카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남자를 소유했다. 하지만 이제 그 남자는 죽고 없다. 아마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예전의 방법, 인터넷 만남 사이트를 사용할지 모른다. 미해결 사건을 전담으로 하는 수사 1과 콜드케이스 수사반은 과거의 기록을 다시 꺼내 목격자를 찾아 나선다. 소설은 아주 친절하게 전작의 내용을 요약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난 10년간 리카는 혼다와 같이 살았어. 분명히 행복했을 거야. 지금은 그 시간을 믿는 수밖에 없어. 리카는 여성성이 한계까지 왜곡된 사람으로, 비틀어지고 일그러지긴 했지만 누구보다 여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여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잊을 수 없을 거야."

  "하긴 10년...... 10년을 사랑한 남자는 잊을 수 없겠지."(p.211)

  경찰은 리카를 체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지만, 그녀의 광기를 잠재우기란 쉽지 않다. 소설 [리카]가 호러의 성향이었다면, [리턴]은 서스펜스의 요소가 있다. 리카를 잡기 위한 여자 수사관의 기지가 돋보이고... 전작의 분위기를 충실히 이어간다. 문득 악녀의 탄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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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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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다카히사, 이선희 역, [리카], RHK, 2016.

Igarashi Takahisa, [RIKA], 2002.

제2회 호러 서스펜스 대상

  '악녀'라는 말은 있어도 '악남'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단순히 범죄의 통계만 보더라도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나쁜 짓을 벌이는데, 왜 여자에게만 이러한 칭호가 붙는 것일까? 일본에서 제2회 호러 서스펜스 대상을 받은 소설 [리카]는 리카라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기괴한 악녀의 활약(?)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큰 키에 삐쩍 마른 몸, 역겨운 체취, 멍한 눈빛, 괴이한 웃음으로... 망상에서 허우적거리며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의 집착은 매우 끔찍하다.

  "오늘 아침에 쟀더니 85킬로그램이더군요. 하지만 선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니까요. 어차피 누가 알겠어요? 이건 놀이예요, 놀이. 일종의 게임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공의 자신이 되는 게임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돼요."(p.30)

  지금은 모바일 세상이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컴퓨터를 기반으로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늘 그렇듯이 이성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다. 혼마 다카오는 후배의 소개로 인터넷 만남 사이트에 관해서 알게 된다. 아내와 딸이 있지만, 생활의 활력이라고 해야 하나? 호기심과 함께 가벼운 놀이로 여기고 일탈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그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해 가는데, 상상 이상의 일이 일어난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내의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리카예요.

  올봄에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 행복한 만남이 없었어요.

  매일 병원과 집만 왔다 갔다 하니까 가끔 숨이 막힐 것 같더라고요.

  밖에서 노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집에서 느긋하게 있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이런 저를 누가 바꾸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괜찮으시면 메일 교환부터 시작해보시지 않을래요?

  내성적이고 말주변도 없고 이런 건 처음이라서 재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기다릴게요. 인연을 즐겁게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잘 부탁합니다. 리카.(p.64-65)

  혼다라는 가명으로 나이와 직업을 적당히 바꾸어 소개 글을 올린다.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어 답장이 오면, 대화를 이어가며 조금씩 인연을 만든다. 여기에는 약간의 스킬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모든 게 서툴고 어색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익숙해졌다. 그러다가 리카라는 여자를 알게 되는데... 스쳐 지나간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남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눈이 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하다.

  "인터넷이 어떤 곳인지 알아?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느냔 말이야? 요즘엔 누구나 인터넷, 인터넷 노래를 부르지만, 그게 악마의 소굴이란 걸 왜 모르는 거지?"

  ...

  "인터넷은 역사가 생긴 이래 인간이 처음으로 가지는 개인 미디어야. 전 세계로 정보를 내보낼 수 있는 미디어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듣기는 좋지만 실체는 무섭기 짝이 없지."

  ...

  "미디어는 본래 책임과 공공성이 없으면 존재해서는 안 돼. 그런데 인터넷은 그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어. 그게 인터넷의 본질이야. 인쇄업자니까 이런 부분은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p.152-153)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성은 보호막인 줄 알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점투성이이다. 한번 올린 글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족쇄가 되고, 개인 정보 유출은 사생활 침해는 물론이고 경제활동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휴대전화로 무차별적인 전화를 하고, 음성 메시지를 가득 채운다. 모르는 사이에 회사 컴퓨터를 건드리고, 뒤에서 미행한다. 심지어 집까지 찾아오는데, 딸과 아내가 걱정이다. 점점 거세지는 그녀의 스토킹은 읽을수록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한다.

  "범인은 여자입니다. 리카, 또는 아마미야 리카라고 하는데, 본명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자칭 28세. 겉으로 보기엔 30세에서 50세 사이. 간호사라고 합니다. 피해자가 의뢰한 탐정 사무소의 조사에 따르면 이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또한 2년 전에 의사를 토막 살해한 범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조사하던 하라다를 죽인 것도 그 여자고요."(p.358-359)

  작가는 [리카]라는 제목에서부터 범인을 드러내고 있는데, 호러 문학답게 해결의 과정보다는 범행의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실적이지 않은 다소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게 조금은 거슬리지만, 음울한 분위기에서 압도적인 긴장감을 주는 악녀 캐릭터를 잘 만들었고... 인터넷 세상에서 개인 미디어와 책임감이라는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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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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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키, 최은지 역, [데프 보이스], 황금가지, 2017.

Maruyama Masaki, [DEAF VOICE : HOUTEI NO SHUWA TSUUYAKU-SHI], 2011.

  일반적으로 '청각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은 '농인'(농아인)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고 한다. 성경은 시대의 옷을 입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라고 쓰인 것을 새롭게 맹인,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로 바꾸어 번역했다. 이것을 일상에서는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한센병자... 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이러한 것을 겪는 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장애라는 단어, 장애인과 일반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것부터 불쾌하게 여길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소설 [데프 보이스]는 법정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수화통역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청각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돕고 싶다든가 그들과 비장애인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맺어진 '동지'.

  그러나 아라이는 달랐다. 스스로 수화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봉사 정신도, 복지에 관한 관심도 전혀 없었다. 그가 수화 통역사 시험을 치른 건 그저 실리적인 이유에서였다.(p.13-14)

  듣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면, 자연스러운 소리를 낼 수 없고... 배움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과거 일본에서는 형법 40조 조항으로 농아자 불처벌 및 형 감경을 내용으로 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사회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전제는 뭔가 석연치 않다. 농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되는데... 아라이 나오토는 수화 통역 자격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시험은 처음이지만, 수화는 어렸을 때부터 사용해온 언어로 그에게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와 형제 사이에서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아이로 태어나 남들하고 확실히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아라이였다. 왜 가장 어린 자신이 그런 일을 해야 했던 걸까. 아라이는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p.22)

  <뭐, 아이일 때부터 싫을 만큼 통역을 해 왔으니까요.>(p.24)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아이... 그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가족 외의 사람들 사이를 잇는 역할을 했다. 병원에서 의사가 말한 아버지의 시한부 삶을 먼저 들었고, 이것을 어머니에게 통역해야 했다. 수화는 여러 가지 상처로 뼛속까지 배어있는 아픔이고, 또한 그에게는 원어민의 언어와 같다. 경찰서 사무직원의 일을 그만둔 지금은, 수화는 생계를 위한 벌이의 수단이다.

  쳐다보니 소녀의 손이 문득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p.88)

  그 주장의 핵심은 이제까지 '장애인'이라는 병리적 시점에서밖에 이야기되지 않았던 농인을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집단'으로서 다시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농인의 언어란 일본수화이고 일본어는 제2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도 마찬가지. 따라서 일본수화와 동시에 일본어도 이해하고 일본문화도 수용한 농인은 두 가지 언어를 갖고 두 가지 문화를 아는 '바이링구얼, 바이컬처럴'한 존재로서 정의된다.(p.134)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고, 이것은 강한 유대감으로 작용한다. 일반인과 농인 사이에서, 특히 법정에서 수화 통역을 하면서 어느 편이라는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농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만큼 농인은 불신을 키워왔다. 다시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코다, 즉 부모가 모두 농인이면서 들리는 아이의 경우 음성일본어보다 먼저 일본수화를 자연히 습득합니다. 농문화도 자신들의 문화입니다. 아무리 음성일본어를 이야기하는 '청인'이라도 본질적으로 그들은 '농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인 부모의 아이(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인 코다(CODA)라는 호칭은 14~15년 전 미국에서 들어온 단어이다.

  이제까지 '농인을 부모로 둔 들리는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는 없었다. 단어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대부분은 '들리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존재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이는 자신 외에 그런 아이와 만난 경험이 없었다.(p.139)

  [데프 보이스]는, 코다(CODA)... 농인을 부모로 둔 들리는 아이로 자라난 한 남자... 를 주인공으로 일본 사회의 농인 문화와 그와 연관된 사회 현상 그리고 이런저런 문제를 지적하며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완성한다. 배움의 혜택이 없어 저능한 취급을 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유전병으로 여겨 강제적으로 불임수술을 시행했던 인권침해의 사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단순히 오락적인 재미를 넘어서 사회 문제를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일본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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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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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노서아 가비], 살림, 2009.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잘 마시지 못한다. 누구는 하루 기준으로 커피 한 잔을 즐긴다고 하는데, 나는 일주일 단위로 서너 잔의 커피를 마신다. 가끔 피로를 덜어내기 위해, 때론 황홀한 맛에 빠져... 숫자를 넘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위경련과 어지럼이 몸을 괴롭힌다. 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쓴맛... 일주일에 서너 잔을 아무렇게나 허비할 수 없어서 점심 한 끼보다 까탈스럽게 고르는 것은 커피이다. 사랑보다 지독하다는 러시아 커피는 어떤 맛일까? 여기에는 한 여자의 커피 같은 일생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둑새벽 눈을 뜨자마자 찾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담배 또 하나는 커피.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절반,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던 시절이 절반. 그렇게 흘러갔다고, 감히 인생을 요약해버리는 여자의 속삭임이다.(p.11)

  몸에 밴 커피와 담배... 주인공의 인생에 작가의 삶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벌이는 여자와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 사이의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둘은 검은 액체와 하얀 연기를 들이켜며 하루를 시작하나 보다.

  둘이 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안나'라고 불렀다.

  걸음마와 함께 더듬더듬 뿌쉬낀이나 고골의 책을 밟고 다녔으며 러시아 인사법을 배웠다. 왜 하필 러시아어를 배워야 하느냐고 언젠가 물었더니, 아버지는 러시아가 청나라만큼 크고 힘이 세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고, 대신 청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오는 러시아 물품이 귀하고 비싼데 이것들을 러시아 상인과 직거래하면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p.19-20)

  시대를 지배한 언어가 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수메르의 쐐기문자... 중세 가톨릭교회의 라틴어와 조선 시대 사대부의 한자...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를, 미국 중심의 세상에서는 영어를 할 수 있어야 권력의 엘리트로 진입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시대에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자가 권력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비싼 값을 내고 노서아 가비를 구해 마셨다. 그리고 급히 종이를 꺼내 끼적였다. 커피에 관한 단 한 줄의 깨달음은 이것이다.

  내가 아닌 것들이 들어와서 나를 바꾸려 한다.(p.91)

  대대로 역관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 안나라고 불리며,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자라난 아이는 아비의 누명으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난 집안을 뒤로하고 국경을 넘는다. 이때부터 고단한 생활이 이어지는데... 좀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은 생존본능이고, 남을 속이며 사는 것 또한 그만큼 속았기 때문이다. 은여우로 악명을 떨치던 여자는 이반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더 대담한 일을 벌이는데, 조선 황실을 대상으로 거대한 사기극을 계획한다.

  이반은 나를 흔든 첫 남자였다. 러시아를 질주하는 갈범무리의 보스 이반에게 어떤 여자가 끌리지 않을 수 있으리. 그러나 나는 남자의 사랑에 백이면 백 전부를 거는 여자가 아니다. 백 중 아흔아홉까지 마음을 준다 해도, 내게는 항상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최악을 대비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관주의자다.(p.188)

  술판에서 떠도는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으리. 마찬가지로 커피 타임에 오가는 이야기 역시 절반은 거짓이다. 전하와 나는 커피 타임에만 만났으니 우리가 나눈 대화도 절반은 의심스럽다.(p.188)

  역관 최홍의 딸 최월향... 안나는 조선에 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 황제의 커피 끓이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듣게 된 자신의 본명과 아버지의 죽음... 값비싼 한탕이냐, 국가를 위한 충성이냐...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남을 믿지 않는 습성은 황제에게도, 이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황제는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하려는 순간,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처음으로 읽은 김탁환의 소설이다. 영화 <가비>(장윤현 감독, 2012.)를 보았을 때의 아쉬움과는 다르게 소설의 빠른 전개는 활기가 있다. 커피가 가진 다양한 속성을 테마로 하고, 우리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창작의 살을 붙이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스토리텔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작품 안에 뭔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고집(?)에서 벗어나 이야기 자체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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