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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김탁환, [노서아 가비], 살림, 2009.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잘 마시지 못한다. 누구는 하루 기준으로 커피 한 잔을 즐긴다고 하는데, 나는 일주일 단위로 서너 잔의 커피를 마신다. 가끔 피로를 덜어내기 위해, 때론 황홀한 맛에 빠져... 숫자를 넘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위경련과 어지럼이 몸을 괴롭힌다. 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쓴맛... 일주일에 서너 잔을 아무렇게나 허비할 수 없어서 점심 한 끼보다 까탈스럽게 고르는 것은 커피이다. 사랑보다 지독하다는 러시아 커피는 어떤 맛일까? 여기에는 한 여자의 커피 같은 일생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어둑새벽 눈을 뜨자마자 찾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담배 또 하나는 커피.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절반,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던 시절이 절반. 그렇게 흘러갔다고, 감히 인생을 요약해버리는 여자의 속삭임이다.(p.11)
몸에 밴 커피와 담배... 주인공의 인생에 작가의 삶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벌이는 여자와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 사이의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둘은 검은 액체와 하얀 연기를 들이켜며 하루를 시작하나 보다.
둘이 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안나'라고 불렀다.
걸음마와 함께 더듬더듬 뿌쉬낀이나 고골의 책을 밟고 다녔으며 러시아 인사법을 배웠다. 왜 하필 러시아어를 배워야 하느냐고 언젠가 물었더니, 아버지는 러시아가 청나라만큼 크고 힘이 세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고, 대신 청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오는 러시아 물품이 귀하고 비싼데 이것들을 러시아 상인과 직거래하면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p.19-20)
시대를 지배한 언어가 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수메르의 쐐기문자... 중세 가톨릭교회의 라틴어와 조선 시대 사대부의 한자...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를, 미국 중심의 세상에서는 영어를 할 수 있어야 권력의 엘리트로 진입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시대에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자가 권력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비싼 값을 내고 노서아 가비를 구해 마셨다. 그리고 급히 종이를 꺼내 끼적였다. 커피에 관한 단 한 줄의 깨달음은 이것이다.
내가 아닌 것들이 들어와서 나를 바꾸려 한다.(p.91)
대대로 역관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 안나라고 불리며,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자라난 아이는 아비의 누명으로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난 집안을 뒤로하고 국경을 넘는다. 이때부터 고단한 생활이 이어지는데... 좀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은 생존본능이고, 남을 속이며 사는 것 또한 그만큼 속았기 때문이다. 은여우로 악명을 떨치던 여자는 이반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더 대담한 일을 벌이는데, 조선 황실을 대상으로 거대한 사기극을 계획한다.
이반은 나를 흔든 첫 남자였다. 러시아를 질주하는 갈범무리의 보스 이반에게 어떤 여자가 끌리지 않을 수 있으리. 그러나 나는 남자의 사랑에 백이면 백 전부를 거는 여자가 아니다. 백 중 아흔아홉까지 마음을 준다 해도, 내게는 항상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최악을 대비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관주의자다.(p.188)
술판에서 떠도는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으리. 마찬가지로 커피 타임에 오가는 이야기 역시 절반은 거짓이다. 전하와 나는 커피 타임에만 만났으니 우리가 나눈 대화도 절반은 의심스럽다.(p.188)
역관 최홍의 딸 최월향... 안나는 조선에 들어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 황제의 커피 끓이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듣게 된 자신의 본명과 아버지의 죽음... 값비싼 한탕이냐, 국가를 위한 충성이냐...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남을 믿지 않는 습성은 황제에게도, 이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황제는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하려는 순간,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처음으로 읽은 김탁환의 소설이다. 영화 <가비>(장윤현 감독, 2012.)를 보았을 때의 아쉬움과는 다르게 소설의 빠른 전개는 활기가 있다. 커피가 가진 다양한 속성을 테마로 하고, 우리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창작의 살을 붙이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스토리텔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작품 안에 뭔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고집(?)에서 벗어나 이야기 자체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