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다산책방, 2019.

1. 진보가 패션이고, 페미니즘을 옹호해야 깨어있는 시민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내가 아는 여성주의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1%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에서이다. 여성, 페미니즘이 돈 되는 시대라서 출판사에서도 이것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듯하다. 문은강 작가의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는 아무런 정보 없이 읽은 국내소설이다. 일본소설 특유의 가벼움과 유쾌함 그리고 서정성을 좋아하는데, 비슷하다. 아니, 스웨덴소설 [오베라는 남자](다산책방, 2015.)하고 비교해야 할까... 어쨌든, 시작은 아주 좋다. 웹툰을 보는 것처럼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과 사연을 하나씩 펼쳐내는 방식은 익숙하면서 흥미롭다.

2. 고복희는 50세 중년으로 지난 25년간 중학교 영어 교사였다. 지금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여섯 개의 객실을 가진 호텔(민박에 가까운) 원더랜드의 주인이다. 괴팍한 성격... 그녀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다. 성격이 반영되어서인지 호텔에는 손님이 없다. 직원 린의 제안으로 한 달 동안 호텔에 머무르는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고복희는 이해할 수 없다.(p.7)

  지금 고복희는 남쪽 나라에 있다. 태평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적도 부근의 이 나라는 연중무휴 후끈후끈한 열대기후를 자랑한다. 인생이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 그녀 자신도 이런 곳에서 살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p.13)

  "타깃을 확실히 해야 해요. 한국인으로요."

  린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있다. 원더랜드는 한국인이 쓰기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서양인들은 한국인에게 당연한 것, 예를 들면 객실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객실 바닥을 밟아야 하는, 사소한 것들에 불편을 느꼈다. 소통의 문제도 있었다. 이십오 년간 중학교 영어 선생으로 근무했던 고복희는 너무도 정확한 한국식 영어를 구사한다. 특유의 딱딱한 말투까지 더해진 영어 발음은 외국인 손님에게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p.20-21)

3. 박지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부모를 잘 만나 카페를 차리고, 외국으로 여행하며 SNS에 사진을 올리는 친구를 보며 충동적으로 원더랜드의 결재 버튼을 눌렀다. 처음으로 해보는 외국 여행이다.

  은근한 마음으론 이렇게 그냥저냥 살고 싶다. 소비 활동이 없으니까 생산 활동에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제로의 상태로 살면 되잖아. 하지만 부모님이 용납하지 않는다. 사소한 불만이라도 내뱉으면 "그래, 그럼 제발 독립해서 네 맘대로 하고 살어." 하고 핀잔을 준다. 친구들마저 한심하게 여기는 게 느껴진다. 대학 동기는 자격증이라도 따는 게 어떠냐고 채근한다. 같이 스터디 모임을 하는 언니는 취업의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p.24)

4. 이야기는 고복희와 박지우 외에 프놈펜의 교민 모임 만복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격의 인물이 등장한다. 각각의 사연으로 우리의 1970~80년대에 머무는 사회에 정착한 이들은 나름의 고뇌와 갈등이 있다. 무엇보다 호텔 원더랜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늘 고복희를 무시하고, 호텔이 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를 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장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대화도 그럴 것이었다. 아무리 바보 같은 말을 해도 누군가 훔쳐 듣고 비웃을 수 없었다. 이방의 언어를 가졌다는 게 처음으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불행해지는 노동을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멋지게 살고 싶다고요."(p.93-94)

5. 주변 인물보다 줄거리와 사건에 더 집중하면 어땠을까? 각자의 입장에서 내는 소리를 진솔하게 담았더라면... 공권력이 무력한 사회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행패 부리는 남자와 당하는 여자의 대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와 화해로 전개했더라면... 고복희와 박지우의 케미가 더 빛났더라면... 그리고 박지우의 성장이 드라마처럼 구성되었더라면... 현재 우리와 동떨어진 장소에서 남자와 여자의 다툼은 비현실적이다. 단지, 고복희의 개성 있는 성격만 돋보인다.

  고복희는 이영식을 이해한다. 그는 그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할 뿐이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는 약하다. 힘을 합치면 강해진다. 교민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발맞춰 걸어야 했다. 한마음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 속에서 고복희는 리듬을 깨는, 이기적인 이탈자였다. 고복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원더랜드가 먼지투성이인 공간이 돼선 안 된다. 린의 월급이 밀려서 안 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하루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고복희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의 질서가 그런 것이라면, 언제나 그랬듯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복희의 선택이었고 기꺼이 감당해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p.229)

6. 고복희는 춤을 추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구라치 준, 김윤수 역,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작가정신, 2019.

Kurachi Jun, [TOFU NO KADO NI ATAMA BUTSUKETE SHINDESHIMAE JIKEN], 2018.

  작년 여름 책을 출간하자마자 읽었는데, 뒤늦게 쓰는 서평이다. 일본 속담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재수 없는 상황을 떠올렸지만, 시원치 않은 사람을 빈정댈 때 하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 속담으로는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다"가 비슷한 의미이다.

  ABC 살인

  사내 편애

  피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밤을 보는 고양이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딛혀 죽은 사건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각기 다른 장르로, 작가의 센스가 돋보이는 6개의 단편 모음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

  누구든 상관없다.

  이유도 딱히 없다.

  그냥 죽이고 싶다.

  속이 후련해질지도 모르니까. 그게 다다.(p.9)

  'ABC 살인'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을 오마주하고 있다. 추리와 블랙코미디의 결합으로 묻지마식 범죄를 다루고 있다. 짧은 분량으로 짜임새 있는 글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은데, 시작은 아주 좋다!

  마더컴이란 '마더컴퓨터'의 줄임말이다. 정식으로는 '종합식 기업인사 관리운용총괄시스템'이라는 명칭이 있지만(영어의 직역이라서 길다) 아무도 이처럼 어려운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모든 일을 맡아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마더컴퓨터'이고, 그것도 길어서 '마더컴'이라고 줄여 부른다. 부르기 쉬운 탓인지 어느새 사회에 정착되었다.(p.44)

  '사내 편애'는 제일 재미있게 읽었는데, 가까운 미래 컴퓨터가 인사 관리를 포함해서 회사를 총괄 운용한다는 설정의 SF이다. 마더컴으로 불리는 인공지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인공을 끔찍이 아낀다. 하지만 당사자는 부담스러움을 넘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결국 이직을 결심하게 되고...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 백미이다.

  마쓰미야 마유의 시체는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었다. 당연히 얼굴도 천장을 행해 있다. 거기까지는 딱히 이상한 점이 없는 타살 시체이다. 나카모토 경부에게는 특별히 새롭지도 않다. 물론 천장을 향한 피해자의 입에 그런 것이 꽂혀 있지 않았을 때 이야기지만......(p.83-84)

  '피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기이한 살인사건 현장을 이야기하는데, 피해자의 입에 파가 천장을 향해서 꽂혀 있다. 기분 나쁘다고 해야 할지, 엉뚱하다고 해야 할지,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지... 범인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였을까? 진실은 호러에 가깝다.

  미코가 앉아 있다. 나와 할머니의 이불 사이에. 머리맡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다다미 위에 흑백의 고양이가 덜렁 앉아 있었다. 달빛만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오도카니. 그런데 미코는 그저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p.126)

  '밤을 보는 고양이'는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감각을 지닌 고양이를 소재로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달빛이 내리는 어둠 속을 계속해서 응시하는 고양이 미코... 정말 고양이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앞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주변에 흩어진 두부. 게다가 시체의 후두부에는 사각 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닥쳐 죽은 것으로 보인다. 1944년 12월 초순. 제국육군특수과학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일어난 일이다.(p.157)

  두부 모서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문득 언 두부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딛혀 죽은 사건'은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의 실험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밀실 공간에서 시체의 머리 옆에는 두부가 흩어져 있다. 장황한 설명과 비교해서 다소 황당한 결말이다.

  네코마루 선배는 하마오카의 학창 시절 선배다. 대학을 나온 뒤 취직도 안 하고, 서른이 넘어서도 어슬렁어슬렁 놀며 지내고 있다. 자유인이라고 할지. 한량이라고 할지. 괴짜로 할지. 무책임한 언동으로 학생 때부터 눈에 띄었던 유명인이다. 호기심이 가는 대로 촐랑촐랑, 태평하게 살아가는 길고양이 같은 인물이다. 그 선배가 왜 이런 곳에?(p.231)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본격 추리이다. 연구소에서 개발한 첨단 신소재를 본사로 안전하게 가져와야 한다. 엄중한 보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네코마루 선배를 만난다. 학창 시절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한 그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6개의 단편은 호불호가 확실히 갈렸다. 어떤 것은 짧으면서 기발함이 있고, 어떤 것은 길면서 지루함이 있다. 그래도 일본소설 특유의 가벼움과 추리소설 특유의 센스가 돋보여서 좋았다. 역시 단편은 짧고 가볍고 기발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가시노 게이고, 권일영 역, [편지], RHK, 2006.

Higashino Keigo, [TEGAMI], 2003.

  요즘은 군대에서도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메일과 휴대전화 같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 연말에 주고받는 소수의 연하장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편지는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교도소뿐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편지]는 범죄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제는 고군분투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다. 형은 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일을 벌이다가 강도 살인의 가해자가 되어 감옥에 간다. 그리고 동생에게 편지를 쓴다.

  몇 번째인가 경찰서에 나가 조사를 받을 때 수사관에게서 들은 '진짜 동기'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나오키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생의 대학 진학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였다.(p.36)

  "그래?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기보다 너하고 나 사이의 약속이지."

  "뭔데요?"

  우메무라 선생은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형 이야기는 하지 말자. 갑자기 부모님을 잃은 거로 이야기해뒀어."(p.62)

  다케시마 츠요시는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지바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속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오키는 형이 체포된 순간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쓰나미가 몰아친다. 연일 계속되는 언론 보도는 형을 냉혹한 살인마라고 하고, 학교에 사건이 알려져 친구들과의 관계는 서먹해지고, 취재 기자들은 초인종을 누르며 따라붙는다. 무엇보다 형의 빈자리가 크다. 혼자서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한다. 다행히 선생님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지만, 곧이어 곤란한 일이 일어난다.

  드디어 악몽에서 해방된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음악과 만나면서 닫혀 있던 모든 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과 자신을 가로막는 싸늘한 벽이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그 벽을 넘어서려 해봐야 더욱더 차가워질 뿐이다.(p.183)

  "너희들한텐 집이 있잖아. 가족이 있잖아. 하지만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있는 것이라곤 교도소에 있는 형뿐이야."

  그 유일한 가족이 늘 발목을 잡아.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p.185-186)

  유일한 혈육인 형의 존재는 늘 나오키의 발목을 잡는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처럼, 교도소에 있는 강도 살인범의 망령은 어디서나 숨통을 조여온다.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취업을 가로막고, 좋아하는 노래를 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해야 했다. 그는 형의 존재를 부정하며, 대학에 가고, 취업하고, 다시 사랑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이다.

  "어딜 가더라도 넌 형 문제로 힘이 들 거야. 그 때문에 모든 걸 빼앗기겠지. 전에는 음악. 이번엔 애인.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이제 됐어, 그런 건. 별수 없지."(p.302)

  "바로 그걸세. 사람에게는 관계라는 게 있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것 말일세. 누구도 그런 걸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살인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걸세. 그런 의미로 보면 자살 또한 나쁜 거지.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기를 원한다 해도 주위 사람들까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는 할 수 없지. 자네 형은 말하자면, 자살을 한 셈이야. 사회적인 죽음을 선택한 거지.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남겨진 자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이 벌을 받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닐세. 자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자네 형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란 말일세."(p.362)

  범죄자 가족이 집 근처로 이사 온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들과는 절대 어떤 교류도 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를 외면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유심히 감시할 것이다... 작가는 범죄자 가족이 겪는 사회적 고통을 형벌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이 겪는 삶의 고통은 감수해야 하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쉽지 않은 문제이다. 편견과 억울함이 있을 수 있다.

  사장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골판지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형하고는 그 뒤 어떻게 되었나?"

  나오키는 잠시 망설이고 나서 대답했다.

  "인연을 끊었습니다."

  호오, 하듯이 히라노 사장이 입을 오므렸다.

  "그걸 본인한테 알렸나?"

  "편지에 썼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그런가? 범죄자인 형하고는 인연을 끊고, 자네 과거를 아는 사람들한테서는 도망을 치는 거로군."

  히라노 사장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자네가 선택한 길이군."

  "옳은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p.442-443)

  동생을 부양하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형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나오키에게는 양심이 저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토록 사회적 고립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형의 편지를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가족이 생겼다. 아내와 딸을 보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형과 절연한다. 옳은 것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꼭 해야 하는 선택이다.

  "<이매진>이야."

  나오키의 말에 뭐? 하며 데라오가 눈을 크게 떴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 그런 건 상상에 불과해. 인간이란 차별과 편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이지."(p.448)

  저는 편지 같은 걸 써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게 아니야, 형.'이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편지가 오지 않으면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테지만 길을 모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p.474)

  속죄의 삶, 편견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 누군가는 심하다고 하겠지만, 피해자가 입은 상처는 아무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의 편지와 동생의 고단한 삶은 최고의 갈등을 일으키고 화해한다. 작가는 미묘한 문제를 나름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수기식으로 쓰여서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야베 미유키, 권일영 역, [용은 잠들다], RHK, 2006.

Miyabe Miyuki, [RYU WA NEMURU], 1991.

제45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이런 발칙한 상상은 멜 깁슨 주연의 영화 <왓 위민 원트>(2000.)로 만들어졌다. 광고 기획자로 일하는 주인공은 어느 날 욕실 바닥에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뒤에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는 설정이다. 그는 회사에서 아이디어를 훔쳐 승진하고, 또 좋아하는 여자를 유혹한다. 현실에서 실제로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것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영화보다 훨씬 먼저 출간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용은 잠들다]는 마음을 읽는 두 초능력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범인, 잡힐까요?"

  신지가 물었다. 고개를 들고 경찰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범인이라니?"

  "당연하죠. 맨홀 뚜껑을 열어둔 사람이요. 설마 수도국 직원이 닫는 걸 깜빡했을 리는 없잖아요."(p.31)

  고사카 쇼고는 주간지 <애로 Arrow>의 기자이다. 폭풍우 몰아치던 날에 길가에 펑크 난 자전거를 세워둔 이나무라 신지라는 소년을 차에 태워주는데,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둘은 얼마 가지 않아서 도로 한복판에 빗물이 거센 물살을 이루며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맨홀 뚜껑이 열려 있었고, 곧이어 한 아이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다. 소년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맨홀을 열어 놓았고, 지나가던 아이가 빠져 죽었다는... 그래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아니,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야. 능력은 누구나 갖고 있어. 잠재적으로는 말이야. 다만 대부분 그걸 밖으로 끌어낼 능력이 없는 거지. 밖으로 끌어내는 능력도 함께 갖고 태어나는 아이는 적다고 바로잡아야겠네. 그 양쪽의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사람이 초능력자, 사이킥이지. 그리고 말이야, 내 경우에도 그랬지만 초능력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 것은 열한두 살쯤부터인 모양이야. 2차 성징이라던가? 다른 능력도 마찬가지지. 예술적인 재능이나 운동 능력 같은 것 말이야. 나이가 그쯤 되면 아이 스스로도 알게 되지. 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스케치를 더 잘한다, 달리기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진 적이 없다. 몇 번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잘해 낼 수 있구나. 그런 것들이 재능이겠지? 어른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나? 이 애는 그림에 재주가 있다. 친척 가운데 누구누구를 닮았다, 분명히 재능이 있어, 유전이야, 라고."(p.77-78)

  "사이킥의 능력도 다른 재능과 마찬가지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어. 연습하지 않으면 그 재능은 잠들어 버리지. 연습을 하면 좋아져. 대개는 말이야. 그리고 어느 사이킥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 크지 않을 경우 본인이 기분 나빠하거나, 주변 환경이 좋지 않거나 해서 그 힘을 잠들게 해 버린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을 만큼 그림에 큰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본인이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다면 평생 그림 한 장 그리지 않고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 하지만 사이킥의 경우 그리 쉽게 잠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클 때는 그렇지가 않아. 간단치가 않지. 본인이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치명적으로 위험해지는 거야!"(p78)

  어처구니없는 대화였다... 신지는 상대방의 기억을 스캔해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초능력자, 사이킥(Psychic)이라고도 하는 남과 다른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부분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한다. 능력은 성장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재능처럼 개발하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기자는 눈속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는 아주 잘 어우러진 형태로 공존한다.

  영원히 교차할 일이 없는 철길과도 같다. 우리는 그 양쪽에 바퀴를 얹고 달리고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가가 무당에게 점을 보거나, 현실을 초월해야 할 종교가가 세금을 안 내려고 머리를 쥐어짠다. 인텔리전트 빌딩을 지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고사를 지낸다. 합리의 레일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냉혈한이 되고, 불합리의 레일로 기울어지면 광신도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선가 탈선하게 되어 있다.(p.88-89)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합리와 불합리 사이에서... 그가 본 것은 전부 사실일까? 남의 기억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드러낼 방법은 없다. 누구나 속마음을 부인하고 거짓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감정으로만 치우치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세상 경험 없는 소년은 맨홀 뚜껑을 열어 놓은 범인을 찾았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초능력이 무기력하고, 오히려 정신세계를 갉아먹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모두 보고, 듣는다면... 이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속마음, 속마음, 속마음의 홍수. 거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컨트롤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감정까지 자제해야 한다. 속된 말로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말이나 태도로 표현하지 않는 한 주위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전부 들린다면? 듣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듣지 않아야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과연 그 호기심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까? 그리고 상대방의 진심을 알게 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p.144-145)

  오다 나오야라는 소년이 편집부를 찾아온다. 신지의 능력을 전면 부정하면서 그가 속임수를 썼다고 주장한다. 초능력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니 더는 만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신지와 나오야는 어떤 관계일까? 초능력을 말하는 소년과 이것을 부인하는 소년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눈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진짜 사이킥이라면, 그에 걸맞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조사하면서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청취하기로 한다.

  오다 나오야는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기에 그런 결론에 다다른 것일까. 툭하면 다투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 인생의 목적을 잃고 술에 빠져든 아버지. 그들의 속마음과 고뇌 그리고 꿈과 희망. 그런 것들이 빤히 보이면서도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모든 걸 단절하고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p.392-393)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신비한 모습의 용을 말이죠. 그 용은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함부로 움직이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하죠."(p.469)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것일까?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런저런 여건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용이 깨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런데 특별한 능력은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 상처로 결국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고사카 쇼고에게 의문의 편지가 배달되고, 누군가 과거의 기억을 건드리며 협박을 한다. 진실을 알기에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고, 또 누군가는 그만큼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초능력의 명과 암을 확실히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나토 가나에, 심정명 역, [여자들의 등산일기], 비채, 2019.

Minato Kanae, [YAMA ONNA NIKKI], 2014.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지난 3월 말에 깜짝 방한한 미나토 가나에를 만났다. 이번에는 살인이 없고, 등산하는 여자들에 관해서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늘 놀라움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치유 이야기라니... 이전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매우 자연스럽고, 치밀한 글솜씨는 색다른 감동을 연출한다. 남자인데도 여자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정도로 심리묘사는 대단하다. 여성주의든 뭐든 소설은 일단 재미부터... 이러한 공식(?)을 잘 따르고 있다.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8개의 단편 모음이다.

  묘코 산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리시리

  시로우마다케

  긴토키 산

  통가리로

  가라페스에 가자

  이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산을 찾는다. 결혼에 관해서, 과거의 틀에서, 가족 관계에서, 자매 사이에서, 삶의 변화에서, 옛사랑을 추억하며, 산에서 등산 친구 사귀기... 등 현실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산을 오르며 하나같이 대자연 속에서 고민을 잊고 자아를 성찰하는데,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에는 관계의 문제인가? 등산의 여정은 매우 사실적이고, 당장 주말에 산에 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백화점을 그만두는 것? 편리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겨가는 것? 시부모와 동거하는 것? 치매에 걸린 할머니 병시중을 거들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은 누구나 받아들일까? 이 정도 일로 결혼을 망설이기 시작한 나는 이제까지 내가 경멸해온 제멋대로인 여자들과 같은 부류인 걸까?(p.20-21)

  마루후쿠 백화점에 근무하는 리쓰코는 시댁의 부담감으로 결혼을 고민한다. 약혼자는 결혼 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업을 잇고, 부모를 모실 생각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시부모를 모시고, 병시중을 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하필이면, 같이 산에 오르는 동기 유미는 상사와 불륜을 벌이고 있다. 이런 그녀가 괜히 못마땅하다!

  - 또 그러신다, 거품경제 시대의 분위기가 미쓰코 씨한테는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요.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참으면서 고하나에게 어디가 그 시대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 머리 모양이라든지, 화장이라든지, 옷이라든지, 가방이라든지, 시계라든지, 구두라든지......

  그만 됐어, 하고 말을 끊었다.(p.63-64)

  독신으로 거품경제 시절의 화려한 이미지가 남은 미쓰코는 맞선 파티에서 간자키를 만났다. 수수한 남자는 등산 데이트를 제안하고, 꼼꼼한 준비로 그녀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런데 남자가 알지 못한 게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여자가 도쿄의 대기업에 들어가서 지낸 세월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했다. 자신을 속이는 생활, 결국 여자는 본색(?)을 드러낸다.

  어머니도 실은 산에 오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갑자기 높은 산에 가려면 저항감이 들겠지만, 정년퇴직해서 시간이 생긴 아버지가 느긋하게 오를 수 있는 산에 데려가 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가고 싶은 사람에게 집에서 기다려달라고만 하다니, 생각해보면 엄청 제멋대로 아닌가. 딱히 아버지라고 시험을 쳐서 산에 올라갈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p.127-128)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등산을 했던 마키노는 정상 도전이 이번이 세 번째이다. 대학 동아리에서 함께 오르다가 부상자가 나와서 실패, 아버지와 함께 오르다가 기상 악화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 뒤로 혼자하는 산행을 즐기게 되었고, 이번에는 꼭 정상에 설 것이다. 산 중턱에서 우연히 중년의 남녀를 만나는데, 그들은 같이 동행할 것을 제안한다. 초보자를 안내하는 압박감과 가족에 관한 생각이 교차한다.

  분명 비가 올 것이다.

  욕탕에 들어가 있던 언니도 저녁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니 똑같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십오 년 동안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사모님으로 살다 보니 농갓집 딸의 감은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고 자란 집에서 만들어진 징크스는 잊지 않았으리라.

  미야가와 집안에 이벤트가 있으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p.148)

  미혼으로 여전히 고향에 머무는 노조미는 출가한 언니와 오랜만에 등산을 하게 된다. 자매가 모이면 어김없이 내리는 빗방울은 이번에도 변함없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감정의 골은 빗길 산을 오르며 더 고조되고... 서로가 알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 아니,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술김에 했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서.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서 텔레비전을 끄더니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 이혼해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세 번 반추한 뒤에 나온 것은 왜라는 한마디였다.

  - 자유로워지고 싶어.(p.203-204)

  십오 년의 결혼생활을 이제 끝내야 하는가? 남편의 이혼 이야기는 청천벽력이었다. 살면서 남편을 간섭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식사와 청소 전반적인 가사는 깔끔하게 했다. 육아에서도 성실했고... 완벽한 전업주부였다. 그런데 남편은 자유롭고 싶다며 이혼을 말한다. 이혼한 여자로 딸을 데리고 고향집에 돌아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짐이 무겁다.

  결국 일본 제일은 되지 못했다. 완료형인 이유는 배구를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겨울에 발을 삐어 왼쪽 다리의 인대를 다쳤다. 배구를 하다 다쳤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을 텐데, 취업 활동 설명회에 가던 도중에 넘어지다니 농담 같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5센티미터 힐의 험프스를 신고 비틀비틀 걷는데 뒤에서 자전거가 달려왔다. 황급히 피하려다 도랑에 빠졌고 결국 이 꼴이 되었다.(p.252)

  마이코는 부상으로 배구를 그만두고,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선수였을 때 하지 못한 일을 하는데... 머리를 기르고, 패션 브랜드를 연구하고, 메이크업의 달인이 되고, 독서를 하고, 혼자 외식을 한다. 하지만 배구와는 다르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다. 연극을 보고, 사인을 받으러 가고, 고백을 하고, 등산을 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배구화를 사기로 한다.

  자유여행의 반대말이 패키지여행이라면 나는 단연코 자유여행파다. 여행의 즐거움은 반이 계획을 세우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취미를 파다 보니 여행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자유여행도 두 가지 패턴이 있다고 요시다는 말한다. 하나는 출발하기 전에 직접 계획을 짜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내가 생각하는 자유여행. 또 하나는 세세한 것은 무엇도 정하지 않고 맨 처음 목적지로 가서 거기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요시다가 생각하는 자유여행.(p.280)

  여행사에서 일하는 유즈키는 요시다와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난다. 유즈키는 자유롭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자유여행을, 요시다는 무엇 하나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여행을 추구한다. 서로 같은듯하면서 다른 둘의 스타일은 연애와 여행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기에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한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한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크고 작든 고민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p.361-362)

  등산이 주는 즐거움... 고민 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결혼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시댁 식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일본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는듯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덧칠해진 내 모습은 실제가 아니고,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 채 타인이 기대하는 옷을 입고 있다. 혼자서 다 해낸 줄 알았는데, 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와 자매는 경쟁자가 아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지기보다는, 때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 다른 방향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일은 적응하기가 어렵다. 인생에서 결단의 순간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산을 마주하고 등산 친구 사귀기... 이런저런 메시지가 가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