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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 권일영 역, [편지], RHK, 2006.
Higashino Keigo, [TEGAMI], 2003.
요즘은 군대에서도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메일과 휴대전화 같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 연말에 주고받는 소수의 연하장을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편지는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교도소뿐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편지]는 범죄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제는 고군분투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다. 형은 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일을 벌이다가 강도 살인의 가해자가 되어 감옥에 간다. 그리고 동생에게 편지를 쓴다.
몇 번째인가 경찰서에 나가 조사를 받을 때 수사관에게서 들은 '진짜 동기'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나오키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생의 대학 진학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였다.(p.36)
"그래?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기보다 너하고 나 사이의 약속이지."
"뭔데요?"
우메무라 선생은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형 이야기는 하지 말자. 갑자기 부모님을 잃은 거로 이야기해뒀어."(p.62)
다케시마 츠요시는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지바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속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오키는 형이 체포된 순간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쓰나미가 몰아친다. 연일 계속되는 언론 보도는 형을 냉혹한 살인마라고 하고, 학교에 사건이 알려져 친구들과의 관계는 서먹해지고, 취재 기자들은 초인종을 누르며 따라붙는다. 무엇보다 형의 빈자리가 크다. 혼자서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한다. 다행히 선생님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지만, 곧이어 곤란한 일이 일어난다.
드디어 악몽에서 해방된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음악과 만나면서 닫혀 있던 모든 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과 자신을 가로막는 싸늘한 벽이 여전히 눈앞에 있었다. 그 벽을 넘어서려 해봐야 더욱더 차가워질 뿐이다.(p.183)
"너희들한텐 집이 있잖아. 가족이 있잖아. 하지만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 있는 것이라곤 교도소에 있는 형뿐이야."
그 유일한 가족이 늘 발목을 잡아.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p.185-186)
유일한 혈육인 형의 존재는 늘 나오키의 발목을 잡는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처럼, 교도소에 있는 강도 살인범의 망령은 어디서나 숨통을 조여온다.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취업을 가로막고, 좋아하는 노래를 하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해야 했다. 그는 형의 존재를 부정하며, 대학에 가고, 취업하고, 다시 사랑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사치일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이다.
"어딜 가더라도 넌 형 문제로 힘이 들 거야. 그 때문에 모든 걸 빼앗기겠지. 전에는 음악. 이번엔 애인.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이제 됐어, 그런 건. 별수 없지."(p.302)
"바로 그걸세. 사람에게는 관계라는 게 있네. 사랑이나 우정 같은 것 말일세. 누구도 그런 걸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살인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걸세. 그런 의미로 보면 자살 또한 나쁜 거지.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기를 원한다 해도 주위 사람들까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는 할 수 없지. 자네 형은 말하자면, 자살을 한 셈이야. 사회적인 죽음을 선택한 거지.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남겨진 자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이 벌을 받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닐세. 자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자네 형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란 말일세."(p.362)
범죄자 가족이 집 근처로 이사 온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들과는 절대 어떤 교류도 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를 외면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유심히 감시할 것이다... 작가는 범죄자 가족이 겪는 사회적 고통을 형벌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이 겪는 삶의 고통은 감수해야 하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쉽지 않은 문제이다. 편견과 억울함이 있을 수 있다.
사장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골판지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형하고는 그 뒤 어떻게 되었나?"
나오키는 잠시 망설이고 나서 대답했다.
"인연을 끊었습니다."
호오, 하듯이 히라노 사장이 입을 오므렸다.
"그걸 본인한테 알렸나?"
"편지에 썼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그런가? 범죄자인 형하고는 인연을 끊고, 자네 과거를 아는 사람들한테서는 도망을 치는 거로군."
히라노 사장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자네가 선택한 길이군."
"옳은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p.442-443)
동생을 부양하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형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나오키에게는 양심이 저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토록 사회적 고립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형의 편지를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가족이 생겼다. 아내와 딸을 보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형과 절연한다. 옳은 것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꼭 해야 하는 선택이다.
"<이매진>이야."
나오키의 말에 뭐? 하며 데라오가 눈을 크게 떴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 그런 건 상상에 불과해. 인간이란 차별과 편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물이지."(p.448)
저는 편지 같은 걸 써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게 아니야, 형.'이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편지가 오지 않으면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테지만 길을 모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p.474)
속죄의 삶, 편견과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 누군가는 심하다고 하겠지만, 피해자가 입은 상처는 아무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의 편지와 동생의 고단한 삶은 최고의 갈등을 일으키고 화해한다. 작가는 미묘한 문제를 나름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수기식으로 쓰여서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