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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ㅣ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평점 :
리사 프라이스, 박효정 역, [스타터스], 황금가지, 2012.
Lissa Price, [STARTERS], 2012.
마야 달력이 끝나는 2012년 12월 21일 이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일까? 이전의 소설이 어떠한 위협(예를 들면 핵무기, 테러, 정치권력, 자연재해, 돌연변이, 정신이상자, 외계생명체... 등)으로부터 지구를 구해내는 세계였다면, 요즘에 나오는 소설은 종말을 전제로 하고 멸망 이후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자연을 즐기며 함께 살아가는 리사 프라이스는 이렇게 뒤숭숭한(?) 때에 정확한 타이밍으로, 그리고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관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베벌리 힐스에서 멀어질수록 길거리의 사람들은 점점 거칠어 보였다. 이미 버려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쓰레기 수거차를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 더미를 피해 걸었다. 올려다보니 붉은 천막으로 덮인 건물을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오염 구역이었다. 마지막 생물학 포자 미사일들이 떨어진 지 벌써 1년도 넘게 지났건만, 위험 물질 전담반의 관심이 아직 이 집에까지는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p.23)
가까운 미래, 의학과 의료 체계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200세까지 늘어난다. 수명의 연장은 곧 노동 인구의 증가를 의미했는데, 부족한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경제활동이 금지된다. 미국은 태평양 연안국과 긴장관계였는데, 생물학적 위협을 받고 있었다. 부족한 예방 백신은 노약자(노년과 미성년자)를 우선순위로 했고, 급작스런 전쟁 발발과 함께 생물학 포자 미사일의 공격으로 20-60대 사이의 사람들은 모두 감염되어 죽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사회는 '스타터'라 불리는 십 대와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로 새롭게 재편된다. 한순간에 중장년층이 사라지자 은퇴한 엔더는 다시 옛 직장으로 복귀하여 사회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고, 고아가 된 스타터는 보호소에 강제 수용되거나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도망자가 된다. 투표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된 엔더는 사회 중심층이 되어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하지만, 법적으로 경제활동이 금지된 스타터는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뒤지거나 이탈자(약탈자)가 된다. 작가가 만들어낸 미래는 극단적인 양극화가 이루어진 세상이다. 회색빛의 은발로 상징되는 엔더는 기득권을 충분히 누리지만, 젊음으로 상징되는 스타터는 주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작품에서 이러한 나이와 빈부에 대한 충돌은 화려함은 더욱 밝게, 어둠은 더욱 음산하게 만들고 있다.
"당신은 일종의 무감각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전혀 고통도, 어떤 해도 없어요. 당신은 약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하지만 분명히 훨씬 부자가 되어 일주일 뒤에 깨어나는 거죠."
그는 다시 하얀 치아들을 번쩍였다. 나는 움찔 놀라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 한 주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그녀가 당신이 되는 겁니다."
(중략)
"그녀가 바로 당신 몸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당신 몸을 이용해서 여기서 나가고, 그렇게 다시 한번 젊어지는 겁니다. 아주 잠시만."(p.15-16)
스타터와 엔더가 극단적으로 대립한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엔더는 스타터의 젊음을 갈망하고, 스타터는 엔더의 안정적인 생활을 원한다. 그리고 이들의 욕망은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이라고 불리는 바디 뱅크에서 불법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16세의 캘리 우드랜드는 보호소로 강제 수용하는 집행관의 눈을 피해 숨어서 살고 있다. 다른 스타터와 마찬가지로 전쟁 전에는 안락한 생활을 하였으나,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캘리는 아픈 동생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그리고 고가의 금액을 약속받고 자신의 젊은 몸을 대여하는 계약서에 서명한다. 사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젊고 강한 10대의 몸과 100년이 넘는 경험과 지혜를 함께 가진 엔더가 감으로써 이득이 발생할 곳이라면 어디든, 무엇이든지. 스파이 활동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더구나, 하지만 그런 건 아마 단지 시작에 불과할 거야.(p.227)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저희가 상상했던 것보다 매우 빨리 획기적인 발전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시청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잠시 멈췄다. "영구 렌탈입니다."(p.301)
작가가 본 미래는 인간의 욕망이 가득한 사회이다. 나눔과 상생보다는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내는 분열된 사회이다. 스타터는 기본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빈곤에 시달리지만, 엔더는 넘치는 물질을 소유하고 이것을 더 누리기 위해 젊음을 산다. 그리고 끝없는 욕망은 기술 발전과 결합해 젊음을 제한 없이 소유하는 '영구 렌탈'로 확장된다.
도리스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지. 난 행복을 느껴 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그저 립글로스, 댄스, 음악, 그리고 가벼운 여자 친구들로 이루어져 있던 때가 얼마나 예전인지도. 지금의 나는 안전, 자유, 그리고 생존 같은 것들을 신경 쓰기에도 벅찼다.(p.71)
행복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디스토피아의 어두운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현재 우리가 누리는 일상적인 것이 행복임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돈과 물질로 대변되는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도대체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떻게? 중장년층이 전멸하고, 젊은 신체를 렌탈한다는... 이런 기발하고도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소재, 논리적인 구성, 흡입력 있는 문체는 읽는 눈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작품의 도입과 전개의 필력과는 대조적으로 위기와 절정에서의 박진감이 조금은 부족한듯했다. 확실한 끝맺음을 좋아하는데, 여운을 남기는 듯한 결말도 조금은 취향에 맞지 않아 매끄럽지 못한 느낌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