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쿤룬 삼부곡 1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쿤룬, 진실희 역,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한스미디어, 2021.

Kun Lun, [獻給殺人魔的居家淸潔指南], 2018.

  처음으로 읽은 대만소설이다. 그래서 인명과 지명이 낯설었다.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매우 잔인한데, 그동안 일본 미스터리를 읽으며 단련한 정서인데도 소화하기에 버거웠다. 웹 소설? 인터넷 연재를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번역이 수려하다). 한마디로 '미소년 청소 살인마의 복수극'이라고 해야 하나... 잘생긴 주인공은 어린 시절을 암울하게 보냈다. 생사를 오가는 경험으로 결벽증과 복수심을 갖게 되었고, 연쇄 살인마를 찾아 제거하는 연쇄 살인마이다. 미드 <덱스터>가 떠오른다.

  "주기적으로 청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큰 실례입니다." 소년은 천보에게 그렇게 말하며 직접 제조한 얼룩 제거제를 배낭에서 꺼냈다. 가방 속에는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된 물건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전부 청소도구였다.(p.19)

  스녠(十年)이라고 불리는 소년은 지나치게 깨끗하다. 보육원 출신으로 이름과 호적은 없고... 대학생처럼 보이지만, 그는 살인마를 감별하는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정보제공자의 도움으로 살인마를 해치우는데, 죽어가는 상대에게 청소에 관해서 조언한다. 택배 배달원으로 위장한 시체청소부가 와서 시신을 가져가면, 남은 현장을 말끔히 청소한다.

  'WE ARE JACK'은 살인마 집단 '잭'의 슬로건이다. 이들은 유명한 살인마 잭 더 리퍼를 광적으로 숭배하는 살인마 조직으로, 세계 각지에 조직원이 분포되어 있다. 그들이 납치, 감금, 학살 등 범죄를 일삼는 이유는 오직 잭 더 리퍼를 본받아 신선한 피로 악명 높은 살인마의 전설을 계승하기 위해서이다.(p.81)

  잭(Jack)은 세계적으로 조직원을 둔 살인마 집단이다. 다크 웹을 운영하는데, 그들이 벌이는 살인은 고스란히 녹화되어 인터넷에 올라온다. 살인마 잭 더 리퍼를 광적으로 숭배하여 가슴에 J자 흉터를 새기고 있다. 스녠은 이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사냥 같은 살인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은 매우 뚜렷한데, 단순히 죽이고 죽는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의 사연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왜 살인마 집단을 증오하는지... 누구의 복수인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때로는 몽환적으로, 때로는 역동적으로 전개한다.

  배를 가르고 피의 의식을 치르는 살인마는 항상 사냥꾼의 역할만 하다가 자신이 사냥감이 되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당황해한다. 피의 굶주린 욕구를 채우던 기세는 사라지고, 청소에 관한 타박을 들으며 죽임을 맞이한다. 길거리 납치범, 영화관 영사 기사, 초등학교 선생님, 공장 기술자... 여기저기에 살인마는 본색을 감추고 있다.

  이 책은 웹 소설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준다. 간결한 문장, 명료한 전개, 화마다 호기심의 자극, 캐릭터의 매력, 사건의 충격, 현실의 반영, 블랙코미디의 요소... 등 적지 않은 분량인데도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세계관을 공유하는 시리즈로 [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폭력 일기]와 [판매상에게 잊힌 시체 보관 기록 노트]가 있다고 하는데, 꼭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바바라 오코너, 신선해 역,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다산책방, 2008.

Barbara O'connor, [HOW TO STEAL A DOG], 2007.

  악마 같은 아이가 나오는 [나의 아가, 나의 악마](RHK, 2021.)를 읽으며 감정의 소모가 커서 이왕이면 가볍고 따뜻한 책을 읽고 싶었다. 바바라 오코너의 소설 [개를 훔치는 방법]은 아동-청소년 문학이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극한에 몰린 어린 소녀의 성장기이며, 가족 소설이다. 국내에서 제작, 입소문 난 동명의 영화를 보아서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영화하고 다르게 주인공의 절친인 루앤의 역할은 빈약하고, 개를 훔치는 과정도 영화의 각색이 더 좋다. 아, 그동안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너무 물든 것일까? 10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내 평점은 달랐겠지...;;

  내가 개를 훔치기로 결심한 날은, 내 가장 친한 친구 루앤 고드프리가 내가 자동차에서 산다는 걸 알아챈 바로 그 날이었다.(p.7)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아빠는 가족을 버리고 사라졌다. 집세를 내지 못해 엄마와 남동생 토비 그리고 조지나 헤이즈는 고물 자동차에서 살게 된다. 불편함보다 친구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자존심이 상한다. 엄마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당장의 해결책은 없다. 이틀마다 주차 장소를 바꾸는데, 우연히 개를 찾는 전단지를 발견한다. 사례금 500달러... 어른의 세계하고는 다르게 금전 개념이 불명확한 소녀에게는 한줄기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 정도 돈이면 집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조지나는 개를 훔치기로 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란? 1단계, 개를 찾는다... 시끄럽게 짖지 않아야 하고, 물지 않아야 하고, 혼자 밖에 있어야 하고,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개 주인은 개를 위해 돈을 펑펑 쓸 수 있어야 한다. 2단계, 개를 발견하면, 얼마 동안 감시한다... 정말 짖거나 물지 않는지, 대문이 잠겨 있는지, 가죽끈이나 밧줄을 사용할지, 옆에 시끄러운 사람이 살고 있는지 확인한다. 3단계, 준비하기... 정말로 훔치기에 적당한지, 개 줄이 필요한지, 어디에 숨길지 결정한다. 4단계, 목록 점검하기... 딱 알맞은 개를 찾았다고 확신하는가? 마당 대문을 열 수 있는가? 밧줄이나 끈을 가지고 있는가? 개를 숨길만한 장소를 마련했는가? ... 모든 항목에 '그렇다'를 표시할 수 있으면 드디어 개를 훔칠 준비가 된 것이다.

  순수한 초등학교 저학년 소녀가 개를 훔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멍청한(?) 토비를 데리고 엄마 눈을 피해서 일을 저질러야 한다.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한 법이라는 거다. 너한테도 신조가 있냐?"(p.200)

  "때로는 말이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라고......"(p.203)

  쿵쾅대는 가슴으로 개를 훔치고... 덤불 속 낡은 옛집에서 만난 무키 아저씨는 현자와 같은 조언을 한다. 때로는 뒤에 남긴 삶의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하다는...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이라는... 조지나는 뒤틀리기 시작한 삶을 바로잡기로 한다. 집 없는 설움을 극복하기 위한 어린 소녀의 좌충우돌 성장기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깨닫게 한다. 어린 시절 개를 잃어버린 상실감 그리고 늘 진실하고 정직하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예 스테이지, 이수영 역, [나의 아가, 나의 악마], RHK, 2021.

Zoje Stage, [BABY TEETH], 2018.

  미스터리는 좋아하지만, 공포와 호러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연관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조예 스테이지의 소설 [나의 아가, 나의 악마]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읽었는데, 감정의 소모가 지나쳐서 견디기 어려웠다. 기분 나쁜, 소름 돋는 경험이다. 우리 속담에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다. 일곱 살을 전후로 제일 말썽을 많이 일으키는 때를 뜻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일곱 살 소녀는 영악함을 넘어서 사악함을 드러낸다. 눈에 띄는 것은, 모든 갈등을 심리적으로 서술한다.

  작가는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가정 내에서 공포에 압도당한 여자에 관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연장선이라고 해야 하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미국 문화에서 가정, 가족애는 중요한 화두이다. 아빠에게는 천사이고, 엄마 앞에서는 악마인 딸은 가족을 서서히 파괴한다. 부모는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이다.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결국 부모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시작부터 결말이 궁금하다.

  그들은 체벌을 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고함조차 지르지 않았다. 해나 앞에서 욕설을 할 때는 스웨덴어로만 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밀어붙이고 있었다. 수제트는 잠갔던 문을 확 잡아당겼다.

  "대체, 빌어먹을, 왜! 해나, 내 말을 왜 이렇게 안 듣는 거야?"

  소녀는 팔을 늘어뜨리고 서서 자신의 엄마를 찬찬히 보았다. 그러더니 눈이 뒤집어지며 흰자만 남았다. 눈동자가 있던 곳에 죽음과도 같은 허무만이 남았다.

  "왜냐하면 나는 해나가 아니니까." 소녀가 속삭였다.(p.58-59)

  해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언어 치료사와 청각 전문가를 만나 검사했을 때,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또래 다른 아이보다 똑똑하다. 해나는 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데, 아빠 알렉스는 유일하게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아빠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마녀이고, 아빠는 마녀의 주문에 걸려 있다. 그래서 엄마를 죽이고, 아빠를 구해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고 싶다.

  수제트는 어린 시절에 아빠가 죽고, 우울증에 걸린 엄마로부터 방치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크론병으로 수술을 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남편 알렉스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드디어 제대로 된 삶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누구보다 좋은 엄마가 되기를 원한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었지만 벌거벗고 있으니 무방비 상태가 된 기분이었다. 샤워하고 있을 때 해나가 커다란 가위를 휘두르며 들어와 찔러 죽일 것 같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끔찍하도록 신파적인 근심이었다. 더구나 마리앤 뒤포세는 지나간 역사 속의 아주 사소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1679년 열여덟 살 때 프랑스에서 마녀로 화형 당한 마지막 여성이었다. 이 10대 소녀가 조금이라도 마녀 비슷한 일을 했는가 하는 점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나가 이 여성을 알뿐 아니라 웬일인지 존경하게 되었다는 게, 아이의 정신을 일깨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였다.(p.98)

  해나는 엄마의 보석을 숨기고, 베이비시터를 괴롭히고, 마트에서 다른 아이를 때리고, 학교에 가기를 거부하며 으르렁거린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마녀사냥으로 화형 당한 마리앤 뒤포세를 흉내 내어 괴기스러운 말을 하고... 점점 수제트를 위협한다. 답답한 것은 알렉스의 태도인데, 그의 눈에 딸은 그저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일 뿐이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정말 똑똑한 아이야"라고 말한다. 역대급 고구마이다.

  "빌어먹을. 왜 나는 정상적인 딸을 가질 수 없는 거야?"(p.227)

  첫 주가 가장 힘들었다. 마시즈에서 작별을 고한 후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킥킥거림을 그럭저럭 혼자 있을 때만 할 수 있게 됐다. 안도감과 믿기지 않음, 수치심이 때로 터져 나왔다. '정말 이런 일이 내게?'라는 행복하고도 슬픈 감정이 북받쳤다. 둘째 주가 되지 부모로서의 번민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서 시간이 초현실적으로, 해나의 부재로 인한 간헐적 비탄의 기진맥진한 박자가 아닌, 정상적인 속도대로 흘러갔다.(p.407)

  동양적 사고에서는 효(孝)를 강조하며 부모가 우선인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 읽은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북플라자, 2017.)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크게 뒤덮은 멍 때문에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자라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좋은 부모, 사랑하는 가족, 특별한 아이를 강조하며 회복과 치료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것이 올무가 되어 숨통을 조여온다. 자녀를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인 부모의 심리를 아주 잘 묘사하고, 사이코패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케이도 준, 심정명 역, [일곱 개의 회의], 비채, 2020.

Ikeido Jun, [NANATSU NO KAIGI], 2012.

  작년, 2020년은 이케이도 준의 해였다는 생각이다. [한자와 나오키](인플루엔셜, 2019.) 시리즈에 이어서 [변두리 로켓](인플루엔셜, 2020.) 시리즈의 열풍(?)이었다고 할까... 독자의 호평 일색으로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다. 그래서 부담 없이 선택한 것이 소설 [일곱 개의 회의]이다. 기업 소설? 경제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도쿄겐덴이라는 중견기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곱 개의 회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이 있다. 문득 작가의 이력이 궁금한데... 기업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가 미스터리 못지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

  '八角'이라는 한자는 원래 '야스미'라고 읽지만 사내에서는 어쩐지 '핫카쿠'라 불렀다. 이유는 모른다. 나이는 하라시마보다 다섯 살 위인 쉰 살. 어디에나 있는 무기력한 회사원의 전형 같은 사람이었다. 회의만 열렸다 하면 좋다고 꾸벅대는 만년 계장이다.

  일단 출세가도에서 벗어나 옆길로 빠지고 나면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기타가와 앞에서도 당당하게 졸았다. 그 정도면 불량사원으로서 심오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잠귀신 핫카쿠'다.

  핫카쿠가 기타가와를 겁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핫카쿠는 기타가와 부장과 동갑인 데다 입사 동기였다.(p.12)

  대기업 소닉의 자회사인 도쿄겐덴은 영업부, 경리부, 제조부, 고객 관리실... 각 부서는 연일 회의의 연속이다. 영업부 정례회의는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영업부장은 매출 실적을 보고받으며 소리를 지른다. 목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법도이다. 영업2과의 형편없는 실적하고 비교해서 영업1과는 늘 승승장구이다. 모두가 긴장하는 회의 현장에서 매번 팔짱을 끼고 조는 사람이 있다. 만년 계장 야스미 다미오, 사내에서는 잠귀신 핫카쿠라고 불린다. 그는 영업부장과 입사 동기이다.

  "회사는 어디나 똑같아."

  핫카쿠가 단언했다. "기대하면 배신당하지. 대신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일도 없어. 나는 그걸 깨달은 거야. 그랬더니 희한한 일이 일어나더군. 그때까지는 그저 힘들고 괴롭기만 했던 회사가 아주 편안한 곳으로 보이더라고. 출세하려 하고 회사나 상사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하니까 괴로운 거지. 월급쟁이의 삶은 한 가지가 아니야.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게 좋지. 나는 만년 계장에 출셋길이 막힌 월급쟁이야. 하지만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 출세라는 인센티브를 외면해버리면 이렇게 편안한 장사도 없지."(p.47)

  영업부장하고 동갑에 입사 동기, 한때 엘리트 사원으로 이름을 날리던 남자가 이제는 출셋길에서 벗어나 아니 출세를 외면하고 만년 계장에 머물러 있다. 사자 같은 영업부장도 핫카쿠에게는 관대하고... 과거의 사연이 궁금하다. 회의가 끝나고, 최연소 과장 타이틀을 가진 영업1과장은 그동안 참았던 화를 터뜨리며 핫카쿠에게 폭언을 한다. 안하무인 핫카쿠는 이것을 직장 내 괴롭힘 방지 위원회에 제소하는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다음 영업부장의 물망에 오르던 영업1과장은 직위 해제되고, 인사부에서 발령대기 명령이 떨어진다.

  핫카쿠가 사카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했는지, 왜 기타가와가 사카도를 경질하려 했는지, 왜 임원회의가 그것을 승인했는지. 이제 전부 이해되었다.

  "꽃 같은 1과, 지옥 같은 2과라......"

  입 밖으로 내어보니 이 말에는 아무래도 허무한 울림이 있었다.

  화려한 실적은 과연 무엇으로 지탱되었던가.

  핫카쿠는 회사라는 조직의 추악한 무대 뒷면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제 그 무대 뒷면을 지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p.49)

  1화 마지막 장에서의 심한 충격! 핫카쿠는 새로 온 영업1과장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소설을 끝까지 끌고 가는 쟁점이자 힘이다. 누구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비밀... 화려한 영업실적의 이면에는 아주 추악한 민낯이 있었다. 영혼을 맞바꾸어야 하는 출세가도를 핫카쿠는 오랫동안 홀로 거부하고 있다. 밝혀지면 기업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되는... 작가는 현대의 기업윤리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마치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경합이라는 제도는 발주자 측에만 유리하게 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경쟁사가 저렴한 가격을 들고 오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네지로쿠 같은 영세기업은 통상보다 몇 할쯤 싸게 입찰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경합으로 가져가서 비용 절감을 노리는 사카도의 의도가 뻔히 보이지만, 이 일을 따내지 못하면 네지로쿠의 매출이 회복될 가능성은 없다.(p.69)

  원가 절감이라고는 하지만 나사는 원래 수주 단가가 싼 데다 오래 계속한다고 싸게 만들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결국 하청의 수익을 대기업이 빨아올리는 구조, 그저 한쪽의 이익을 다른 쪽의 이익으로 갈아끼울 뿐인 구조를 강요당하는 것 아닐까. 대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 하청은 적자가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제조업은 뿌리부터 무너져내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월급쟁이인 구매 담당자에게 이런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p.87-88)

  오 년 동안 도쿄겐덴이라는 회사에서 유이는 주체성 없는 부품이었다. 시키는 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눈에 띄는 일 없이 그저 한결같이 일에 매진하는 말 없는 부품이었다. 회사뿐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은 부품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사람의 기분을 만족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한 편리한 부품.

  부품이 되어버린 것은 의사나 감정은 있어도 상황에 맞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헛되게 지나버린 나날은 이제 되돌릴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p.128)

  핫카쿠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옳은 건 옳은 거야. 잘못된 건 잘못된 거고. 그 외에 뭐가 있어. 부정을 저지른 사람은 사카도이고, 너희는 그걸 은폐하고 있어. 나를 속여서 말이야. 넌 진심으로 네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해?"(p.324)

  그런 기타가와에게도 모회사가 설정한 목표를 완수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해 할당치를 달성하면 이듬해에는 소닉에서 더 높은 할당치가 내려왔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는 구조다. 부하를 질타할 뿐 아니라 자신도 밤늦게까지 뛰어다니던 기타가와조차 목표치 달성이 어려워졌다.(p.330)

  소닉 사장인 도쿠야마 이쿠오가 참석하는 회의를 임원들은 어전회의라고 불렀다. 중역이 대거 모이는 경우도 있고 필요한 최소 임원으로 진행될 때도 있다.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한 기동적인 회의인데, 회의록이 작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역회의와 결정적으로 달랐다. 여기서 논의되는 내용은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는다. 참석자의 기억에만 남는다.(p.361)

  아버지가 말했다. "일이란 말이지,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즐겁거든. 그렇게 하면 돈은 나중에 따라와. 손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장사는 망해."(p.365)

  "굳이 말하자면 체질일까요."

  핫카쿠는 그런 말을 했다.

  "체질?" 뜻밖의 말이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거죠."(p.386)

  일곱 개의 회의란? 영업부의 정례회의, (하청 중소기업의 임원회의), 근무 개선을 위한 환경회의, 경리부의 계수회의, 고객 관리실의 편집회의와 부서간 연락회의, 임원회의, 사장이 참석하는 어전회의이다. 이야기는 영업부를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처음에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던 부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중에는 회사를 위협하게 된다. 영업부와 경리부, 영업부와 제조부의 알력... 원청과 하청의 불합리... 생산 원가와 제품 품질의 상관성... 열심히 일할수록 목을 조여오는 구조... 변하지 않는 체질... 기업의 부조리는 아주 생생하다.

  최근 코로나 시국에 일본을 보면, 연일 대 환장(?) 파티를 하고 있다. 그동안 우러러보았던 장인정신과 책임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우리는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능력인데, 그들은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다. 성장 위주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기업문화... 이게 다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텐더니스 밀리언셀러 클럽 85
로버트 코마이어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로버트 코마이어, 조영학 역, [텐더니스], 황금가지, 2008.

Robert Cormier, [TENDERNESS], 1997.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면 큰 거부감이 있다. 나의 아동-청소년기가 그렇게 유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로버트 코마이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고, 청소년 문학가로 소설 [초콜릿 전쟁](비룡소, 2004.)이 유명하다고 한다. 소설 [텐더니스]는 부드러움을 소재로 가출 소녀와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서 적잖이 놀랐다. 그동안 읽은 청소년 성장 소설은 매우 건전했는데, 수영이나 달리기... 등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부드러움을 향한 집착과 갈망을 이야기한다.

  나는 다시 그 갈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은 아마 내게 부드럽게 대해주는 사람일 것이다.

  싱클레어 선생님은 언젠가 교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 가지 단어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정말로 아름답게 느껴졌던 유일한 단어는 부드러움(tenderness)이었다.(p.22-23)

  로라(로렐라이 크랜스턴)는 집착이 강한 15세 소녀이다. 아빠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엄마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매번 남자가 바뀐다. 제대로 되지 못한 환경은 가정폭력에 노출되고, 떠도는 생활로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다크 뮤직을 하는 가수에게 집착하고, 언젠가 우연히 만나 친절을 베푼 에릭을 사랑한다. 자기의 집착을 이루기 위해 집에서 나오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집착이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다.

  에릭은 고양이들부터 시작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새끼 고양이였다. 그는 고양이들을 끌어안고 쓰다듬고 털 밑의 가냘픈 뼈의 감촉을 느껴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약하디약한 뼈들. 너무 세게 안거나 쓰다듬으면 그대로 분질러질 것 같은 놈들이었다. 처음에는 고양이들을 안고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너무 예뻐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냥 쓰다듬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에릭은 두 팔로 고양이들을 끌어안고 두 손으로 얼굴을 잡은 다음, 그들의 몸이 부드럽게 꺾여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런 방식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 부드러운 느낌.(p.41)

  에릭 풀레는 몸에 학대의 흔적을 남기고 친모와 계부를 살해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부드러움을 갈망하며 세 명의 소녀를 더 죽였다.) 성인이 아니라 정상참작으로 소년원에 수감된다. 곧 있으면 18세이고,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데... 자유롭게 될 때까지 욕구를 감추어야 한다.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된다.

  제이크 프록터는 오리건에서만 26년을 경찰로 근무했고 그 후로는 이곳 뉴잉글랜드에서 20년을 일했다. 그는 온갖 역경과 훈장과 진급을 통해 끝내 경위의 직위를 얻어 냈다. 자신의 본능과 개 같은 부지런함이 가져다준 성공이었지만 그래도 제이크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리건에서의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가 자신의 모든 성공들을 무위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p.67)

  제이크 프록터 경위는 46년의 경찰 근무를 마무리하는 단계이다. 이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의 눈에 연쇄살인이 포착된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년원에 있는 에릭에게 몰입한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그의 눈은 속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추격전을 시작한다.

  살면서 지나친 집착을 한 적은 거의 없다. 대상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오히려 싫증을 잘 내는 편이다. 그래서 이 모양으로 사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은 로라, 에릭, 제이크 세 사람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수기식으로 기록해서 각 인물의 심리 묘사는 뛰어난데, 특히 집착과 갈망, 욕구와 몰입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로라는 친절함에 집착하여 에릭을 찾아 나서고, 에릭은 부드러움을 갈망하며 대상을 찾는다. 제이크는 에릭에게 몰입해서 새로운 범죄를 막아서는데, 얽힌 세 사람의 관계는 광적이다. 아름다운 로라, 친절한 에릭, 투철한 제이크... 이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굶주려 있다.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이 안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