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조형 빛깔있는책들 - 고미술 20
신영훈 글/사진 / 대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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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다니다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한옥일 것이다. 우리가 전통가옥이라 부르는 집. 기와집도 있고 초가집도 있고 너와집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기와집만 전통가옥이라 부르고 있는 듯 하다. 왜 그럴까?  그뿐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게 되는 게 전통가옥이다. 그건 또 왜 그럴까?  궁금한게 참 많았다. 다가서고 싶었기에 알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던 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찾아보면 한옥에 관한 책은 엄청 많다. 1989년에 태어난 책이니 벌써 서른살이 다 되어간다. 책표지의 사진을 보면서 저 문을 좀 더 활짝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안양루 아래로 펼쳐진 멋진 세상을 더 많이 보고 싶은 까닭이다. 기대감에 부풀어 책장을 넘기니 처음부터 커다랗게 펼쳐지는 양동마을 풍경이 이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렇듯 이 책속에는 가보지 않아도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는 천연색 사진들이 먼저 나를 맞이해 준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어떤 이의 말은 들을수록, 생각할수록 참 멋진 말이다. 그러나 전통가옥과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는 게 그리 쉽진 않다. 일단 용어부터가 어렵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까닭에 두번 세번의 공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머리부터 아파온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몇 권의 책을 보면서 어설프게 알게 된 것은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거였다. 용어를 이해한다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으나 가옥의 앉음새나 그 생김새마다 품고 있는 의미들은 정말 이채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사찰에 가면 그 무엇하나도 그냥 있는 것이 없다는 말처럼 우리의 전통가옥속에서도 그냥 있는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방의 넓이를 정할 때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안정감을 생각했다.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창을 설치할 때도 어떤 문은 미닫이로, 또 어떤 문은 여닫이로, 덧문을 달거나 분합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처마의 길이조차도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졌다는 게 신기했다. 연못 하나도 담장의 무늬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점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더구나 그 집에서 살아갈 집주인의 사상을 담기도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사회이념이나 생활문화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멋진 일이었다.

    

각설하고 이 책은 일단 휴대하기가 편하다.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에 두껍지도 않고 가볍다. 그렇다고 안에 담긴 내용도 가볍다는 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다 담을수는 없었을테지만 그럼에도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는 말이다. 찾아보니 빛깔있는 책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정말 많은 주제들이 보인다. 불교문화, 민속문화, 고미술, 음식문화 등 다양한 주제들이 눈길을 끈다. 소소한 궁금증을 풀기에 그만인 책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내내 내 마음은 이미 민속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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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이현주 글.그림 / 책고래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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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었던 짧은 동화가 생각났다. 담장밑에 심겨진 해바라기의 성장을 그렸던 동화였는데 자꾸만 자꾸만 키가 커져서 마침내는 담장너머의 세상과 만난다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그리고 담장 너머의 또다른 해바라기와 활짝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해바라기 마을의 풍경을 그렸던 그림이 정말 예뻤었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은행나무이다. 열 살때 이곳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키가 작았을 때는 1층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것보다 조금 더 크게 되니 2층 사람, 3층 사람을 보게 된다. 나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마침내는 어떤 풍경을 또 가슴에 품게 될까?  아이들이나 읽을법한 동화책을 왜 보는 거냐고 묻는 사람, 간혹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동화가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채 어른이 되어버리는 우리네의 허전함을 채워주기에는 동화만 한 것도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동화의 특성상 등장하는 모든 것은 의인화되어진다. 그러므로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사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나무의 이야기, 꽃이나 바람의 이야기이지만 한번 더 들여다보면 바로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1층, 2층, 3층... 라갈수록 나이를 먹는 나무. 그리고 키가 크는 나무. 열일곱 살이 되자 3층까지 올라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되어 4층 창문으로 보게 된 혼자남은 할머니의 쓸쓸함,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 아파트의 꼭대기층에 다다르게 되지만 무슨 일인지 아파트 꼭대기 층에는 텅 빈 방만 있어 나무는 외로워진다. 그리고 생각하지. 나는 얼만큼이나 자랄까?


나무처럼... 책 제목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속으로는 이 은행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의 그런 마음을 자꾸만 뒤로 감추게 하는지... 무엇이 우리에게 내면의 소리를 듣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 게 행복한 일일까?  어느 날 아침, 가지를 아파트 지붕 위로 쭉 뻗어 아파트 너머의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는 은행나무처럼 그렇게 마음을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한편의 동화가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준다. 아주 가까운 곳에 다른 나무가 자라면 나무들은 서로를 향한 가지를 키우지 않는다. 그게 힘들면 연리지나 연리목이 되어버린다.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행복할까?  그렇게 살수는 없다고해도 서로를 향한 관심과 배려가 공허한 우리 마음의 처방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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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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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하! 무슨 책 제목이 저러냐?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본다면 나도 저런 말 한 적 있다. 그래서인지 책속에 보이는 인간 알레르기라는 말에 기시감조차 느껴진다. 물건도 아니고, 먹는 것도 아닌데?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이란 책표지의 말을 보면서 그렇지, 인간 관계라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싶었다는 말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 왠지 인간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는 것 같아....  몇 번의 상처를 가슴에 품은 후부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만남을 갖기 시작한 것이. 튕겨져 나오는 내 마음과 다시 만난다는 게 나를 왠지 모를 초라함에 젖어들게 했었다. 이런 경험을 나만?

 

주는 것 없이 싫은 사람도 있고, 받는 것 없이 좋은 사람도 있다는 걸 경험해 본 사람 많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목차를 훓는다. "나는 인간 알레르기일까?", "왜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가?", "나는 왜 너를 싫어하게 됐을까?", "아무래도 싫은데 어쩌라고!", "나는 나를 조종할 수 있다"... 총 5장에 걸친 부제들이 순간순간 나의 시선에 꽂힌다.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문장들... 사실 이 책, 그다지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렇고 그런 심리상태를 또 말하고 있을거야... 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수많은 사례를 만나게 되는데 그 사례들이 주는 느낌이 이채로웠다. 흔한 이야기처럼 들리는데도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사회속에서는 정신적인 치료를 요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거침없이 변해가는 사회를 보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수많은 병폐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산재한다. 마치 누군가가 밟기만을 기다리는 지뢰처럼.

 

지나치게 결백하거나 무정한 성격도 인간 알레르기의 특징이라는 말이 보인다. 다정함을 잃어버린 작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다정함이라 함은 한마디로 말해 관심과 배려다. 이해와 용서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현재 그 모든 조건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가고 있는 상태다.  인간이 언제부터 타인을 거부하고 배제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性善說을 주장했던 맹자와 性惡說을 주장했던 순자를 말하고 있는 부분이 흥미롭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왜 예와 의가 필요한 것이냐고 맹자를 비판했다는 것인데, 나도 사실은 性惡說을 믿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렇기때문에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그토록이나 많은 법규와 규범이 필요하지 않았을테니까.

 

세상에 태어나 이름석자 큼직하게 남기고 간 사람들조차 인간 알레르기였다는 말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까?  니체와 바그너, 서머싯 몸, 쇼펜하우어, 나쓰메 소세키, 생텍쥐페리...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결국 그 사람이 살아야 했던 환경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과 함께 지냈는지가 중요하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 어린시절부터 인간 알레르기의 조짐은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인데 돌고 돌아서 사랑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랑받은 자와 사랑받지 못한 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에는 자기 회복 장치가 있다고 하니.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법정스님께서 남기고 가신 말씀, 버리고 살기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진 않겠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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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덕의 눈물 -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시공 청소년 문학
정해왕 지음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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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덕이가 누구야?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옛날에 이런 유머가 있었다. 허수아비의 아들이름이 뭔줄 알아? 그거야 당연히 허수지!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어찌되었든 옛날 유머에서 보듯이 뺑덕과 엮인 뺑덕어미를 생각하면 된다. 뺑덕어미가 어디에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뭐 할말은 없다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효녀 심청의 새엄마가 뺑덕어미였다. 그런데 이 책, 뭔가 좀 수상하다. 심청이가 나오는 책인데 제목이 '뺑덕의 눈물' 이라고?  뺑덕어미도 아니고 뺑덕이라는 말은 다분히 유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인물, 뺑덕. 그러나 원래의 심정전속에는 뺑덕이라는 인물은 없다. 그럼에도 뺑덕이 주인공인 이 책... 살펴보니 책표지에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이란 말이 보인다. 그렇군!.. 고전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건 내게 작은 설레임을 주기에 충분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작금의 현실에 맞게 고전을 비틀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놀부와 흥부를 바라보는 눈이 그렇다. 그저 마음씨 착한 흥부라고만 배워왔던 모습이 지금의 세상에서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처럼. 그악스럽게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 그렇게 착하기만해서야 어떻게 살아갈 수있느냐는 관점으로 바라봤을 터다. 그런데 그런 비틀린 시선도 나름 재미있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이 아주 엉뚱한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원래의 심청전을 따라가고 있지만 의외의 인물인 뺑덕이를 내세워 좀 더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만들어냈을 뿐이다. 의외로 재미있다.

 

우리의 역사속에는 효녀나 효자, 열녀나 열부 이야기가 많다. 살점을 도려내거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나누거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 혹은 집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하는...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의 속을 살펴보면 아픔이 있다. 대게는 희생양인 경우가 더 많다. 만들어낸 이야기도 많다는 말이다. 사회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 그런 희생을 필요로 했다는 말이다. 모순되게도 엄청나게 변해버린 작금의 시절에 와서조차 그런 희생을 알게 모르게 강요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규범이라는 게 필요악인 까닭일 것이다. 책속에 등장하는 심청의 속내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 몇이나 있을까 싶다. 힘겨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심청이라고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조여오는 강제적인 사회규범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병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보 뺑덕이 되어야 했던 조병덕의 삶에도 사회의 부조리함은 여지없이 담겨있다. 그런 병덕이 심청이 사는 마을로 들어오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청이를 향한 사랑앓이를 하게 된다. 그 사랑이 인당수로 뛰어든 심청을 구하게 되고, 둘 만의 모험은 시작된다. 어찌보면 참 황당하게 느껴질수도 있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잘 읽혔다. 이야기의 흐름도 껄끄럽지 않다. 몰입도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러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심청외전'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거기에 판소리 심청전의 탄생까지 아우르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다. 이루어지지 못한 뺑덕과 청이의 사랑이 가슴 아플 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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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시대 - 세상이 수상해지면 출몰하는 오래된 미디어
마츠다 미사 지음, 이수형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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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없는 말이 천리간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 많은 집 장맛이 쓰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 등 소문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고 산다는 말도 있고, 세 혀가 사람 잡는다는 무서운 말도 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 항상 말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살면서 정말로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말은 무섭다. 진실이 담겨지지 않은 채 떠도는 말은 더 무섭다. 그렇게나 조심하라고 강조하는 삶을 살아가는데도 소문은 끝도없이 만들어지고 끝도없이 퍼져나간다.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그 발없는 말의 흐름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너무 심하다 싶은 경우에는 그 말의 진원지를 케내기 위해 뒤를 밟기도 하지만 결국엔 꼬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이 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입이 아니라 손가락 끝에 모든 게 달린 세상이다. 너무도 쉽게 말이 만들어지고 너무도 허망하게 말은 퍼져나간다. 그 진위여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왜 그런 걸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관계의 형성' 때문이란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그런 마음이 밑도 끝도없는 허황한 말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마음을 나누기보다 말을 나누며 살아가려 애쓰는 것일까? 마음을 잃어버린 세상이 서글플 뿐이다.

 

이건 너한테만 하는 말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면서 이런 말 한번쯤은 누구나 해 보았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이 정말 나한테만 하는 말일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언컨데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즉, 너한테 하는 이 말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도 했으니 너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줘, 라는 속성을 숨기고 있다고해도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란 말이다. 우리는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책속의 말을 살펴보면 더더욱 서글퍼진다. 내용이 뭐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심리, 세상을 살아가는 불안감을 누군가에게 드러내놓고 싶다는 심리, 누군가와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 해서 그사람과의 관계가 더 끈끈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밑바닥 심리, 바로 그런 심리들이 떠도는 소문을 붙잡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랬던 사람들의 관계는 더욱 더 돈독해졌을까? 그렇게 돈독해졌다면 어째서 모두가 외로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과연 믿을 수 있는 말은 몇 퍼센트나 될까?  온갖 말의 유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속살은 숨겨두고 목소리를 높여 요란하게 겉포장만을 보여주려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또 얼마나 진실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뒤돌아보게 된다. 책의 끝부분에 '애매함에 대한 내성' 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정보의 농도를 판단하는 정보를 함께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정보의 애매함에 대해 내성을 갖고 입을 다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일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문'이 필요하다고 한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맺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또한 그 소문의 통로가 변함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도 바뀔 것이기 때문에... 목차에서 보이는 소문에 대한 정의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세상이 수상해지면 등장을 하고,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며, 문화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새로운 소통수단으로서의 소문...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작금의 세상을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경쟁의 시대라고 해서 마음을 나누지 말라는 법은 없을테니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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