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 이현수 장편소설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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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4일

"어떤 피란민도 미군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으려는 사람은 모두 사살하라. 어린이와 여자들은 재량권을 부여한다."

1950년 7월 25일

'어떤 피란민도 미군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

1950년 7월 25일

"왜 피란민을 항공기로 공격하는가? 피란민 공격금지 지침을 수립할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

1950년 7월 26일

"이 시각부터 피란민들의 미군 방어선 통과를 금지한다. 방어선에 접근할 경우 경고사격 후 총격을 가하라."

1950년 7월 27일

"이 지역에 보이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

1950년 7월 29일

"이제부터 보이는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모두 적으로 간주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 5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남아 있던 문서 중 가장 결정적인 문서 한장이 사라졌다고 한다. 1950년 7월 26일 오후부터 29일 아침까지의 기록... 그 나흘동안의 이야기를 이 책속에서 말하고 있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은 현재까지도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사살되었던 300여명의 원혼을 달래지 못하고 있다.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노근리 쌍굴로 숨었지만 미군의 기관총에 모두 죽어야 했던 그 처절한 죽음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묻고 있음이다. 역사가 안고 있는 또하나의 아픈 이야기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그러나 우리의 기억속에서는 퇴색되어져가는 이야기..

 

그 끔찍한 학살은 어처구니없게도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한장교의 실수로 인하여 벌어졌다. 그야말로 '라이언일병 구하기'쯤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감히 손가락질 할 수도 없다. 속을 헤집어보면 바로 찾아낼 수 있는 지긋지긋한 그놈의 이념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픔을 겪어냈으면서도 지금까지 죽지않고 살아남아 우리의 가슴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처절했던 현장을 책속에서 마주치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책속에 보이는 말들이 서러웠다. 한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단어 하나가 주는 느낌이 너무 아팠다. 귀에 익고 눈에 익은 말이 그렇게 변해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정말 부끄러웠다. 전쟁이 아니라 사변으로 보아 6.25사변이나 6.25동란으로 배웠던 내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남측의 입장에선 자유수호전쟁이었으며, 북측의 입장에선 조국수호전쟁이었다는 말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랬던 것이 언제부터 한국전쟁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던 것일까? 솔직히 나는 알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자유수호를 외쳤던 남측군대가 마을을 지나가면 더 힘겨웠다던 엄마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에게 더 많은 해를 끼친 쪽은 남측이었다고. 남측군대가 보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는 건, 모순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 세상사의 보이지않는 측면이었을까?

 

과연 미국은 한국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을 이용한 지배세력인가? 미국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을 확정한다 는 책속의 말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이제는 묻지 않아도 누구나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고 펄펄 끓는 국' 이라는 책속의 말에 백퍼센트 공감한다. 잘못 먹으면 입천장을 데기 쉽다는 말도 일리있는 말일터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피상적으로 노근리사건을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양파껍질처럼 까면 깔수록 자꾸만 눈물나는 이야기. "우리는 죽었고, 죽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는 그 한마디가 서럽디 서럽게 다가온다.


촘촘하다. 씨줄과 날줄이 견고하게 짜여져 손가락을 대면 튕겨져 나올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현장속에서 나조차도 허덕이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은 책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곁에 머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 좋았다. 피해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순간을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강요하지 않는 담담한 흐름이 새삼스럽다.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강렬하다. 단지 몇 사람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의 한 단면이 이토록이나 절절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각각의 아픔을 안고 그 지난했던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노근리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채로웠다.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아니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는 그 이유가 책속에서 스멀거린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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