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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 인간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 절망할까? 아니면 죽고 싶을만큼 괴로운데,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때 절망할까?
- 사람을 비난하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크게 보면 저 두 가지의 명제로 압축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까?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닌 듯 하다. '왕따'라는 주제는 이미 우리 주변에 만연하다. 심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그것이 모두 교육의 현실이 잘못된 탓인양 말하고는 있지만 뭔지모를 묵직함으로 찾아드는 꺼림칙함도 어느정도는 인정해야만 한다. 무조건적으로 교육때문이라고 탓을 하기에는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켕기는 마음을 숨겨야 하는 탓이다. 지금의 사회적 병폐를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억지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이라는, 그것도 너무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죽음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어린세대에게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情'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우리는 잊고 산다. 어쩌면 잃어버리고 싶어 안달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순을 안고 말이다.
'왕따'를 당하던 중학생의 자살이 몰고 온 파장은 컸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웠을 사람은 누구일까? 남겨진 유서속에 그 네사람의 이름을 쓴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전에 우리에게도 그런 학생이 있었다. 남겨진 유서로 인해 일었던 사회적인 파장도 역시 컸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나이프의 말과 십자가의 말 중에서 너는 어느쪽이냐고...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입는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입힌다. 그렇지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었다는 그 배경은 서로가 다르다. 그래서 그 아픔의 깊이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얼만큼의 깊이로 그 상처의 흔적이 남는가는 중요하다. 나이프의 말처럼 한번 찔리고 마는 아픔이라면 좀 나을까? 평생을 짊어지고가야 할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나을 수도 있을까? 작가가 말하는 건 십자가의 고통이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십자가인양 짊어져야만 했다. '방관'했었다는 이유로.. 절망속에서 죽어갔을 친구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나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사회적인 풍토를 생각하게 한다. 나만 아니라면 괜찮을 나쁜 순간과, 나라면 더 좋겠다는 좋은 순간을 우리는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의 주제가 씁쓸함을 남긴다.
고뇌하고 망설이고 상처를 받으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 20년간의 이야기... 라는 말이 보인다. 그렇게 한 순간에 끝날 줄 알았고, 또 그렇게 한 순간의 일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한 소년의 죽음... 그러나 죽은 이에게 불리워졌던 이름의 주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 네명의 이름은 특정되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의 이름인 것이다. '방관'하고 '외면'했던 우리 모두의 이름인 것이다. 끝내는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아들의 존재를 부여잡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절제된 분노와 무표정함은 절절한 느낌과 함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이 너무나도 아프게 전해져오는 까닭이다. 입속의 칼이라는 말이 있다. 칼과 총을 들이대야만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도 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심한 감정의 흔들임을 겪어야 했다는 게 놀라웠다.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아들을 둔 부모였기에 그랬던 것일까? 나 역시도 무언가 방어할 것을 찾아헤매며 이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거라고 모르는 척 외면하는 일들이 많았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공범자'라는 틀에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만큼은 '피해자'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한 소년의 죽음을 바라보는 두 기자의 각도가 많은 울림을 전한다. 누군가가 내민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주 차갑게 다가서는 진실의 체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묘한 분위기속에 갇혀버려 어쩔 수 없이 나 역시도 '공범자'가 되고 말았던 순간들은 아찔함으로 남겨진다. 문득 묻고 싶어진다. 지금 내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말이 생각나서 하는 말이다. 태어남으로 인해 온전히 내 몫으로 짊어져야 할 십자가 말고도 내가 짊어진 십자가가 또 있는가? 나로 인해 또다른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던 이는 몇이나 될까? 다시 나를 돌아보게 되지만, 돌아보는 순간은 언제나 아프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