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역습 - 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웬델 베리 지음, 안진이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오만한 지식 사용이라는 소제목이 무섭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건 정보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렇다 할 정보가 너무나도 많이 흘러다닌다. 정체된 정보가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마구 흘러다닌다는 말이다.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인터넷의 그림자에 밟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만들어진 것들이나 만들어낸 것들에 의해 우리조차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빅브라더를 예고했던 책이 있었다. 빅브라더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어디를 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를 다시한번 살펴보라. 틀린 말은 아니다. 일전에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도 인터넷이 우리의 뇌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소제목을 달고 있었다. 디지털 기기에 종속되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책이었다. 또한 종속되기를 희망하며 자신을 놓아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가슴 아픈 질문을 남겨놓기도 했던 내용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섬뜩할 정도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이 또한번 나를 섬뜩하게 한다.

'이 글은 우리 모두 겸손해지자는 호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주쳤던 한 문장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현재 그의 직업은 농부다. 지금까지 40년째 전통적인 농법을 고집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소통보다 대화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중심에서 그 주변으로만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소통보다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백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는 그 소통만을 외쳐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로부터 오는 예견할 수 없는 결과라거나 서로의 말을 통해 오고갈 수 있는 감정의 변화를 참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정해진 원칙에 끼워맞추기를 하거나 끼워넣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일수도 있을 게다.  '정보'라는 말의 참뜻은 저버리고 무작위로 축적된 사실들을 가리킬 때만 쓴다는 글쓴이의 말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어떤 것들에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틀림'과 '다름'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대화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닐까 하는... 글쓴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바쁜 세상에서 조금은 여유롭게 살기,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게 혹은 단순한 것을 복잡한 것으로,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삶을 위하여, 자꾸만 쌓기보다는 오히려 조금씩 내려놓기 등등은 지금의 세상을 거꾸로 살아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짧은 구호다. 유행가도 있다. 전화도 없고 텔레비젼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이토록 바쁜 세상에서, 이토록이나 복잡하거나 혹은 단순한 세상에서 왜 거꾸로 가자고 외치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따라오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자연'이다. 자연주의자만이 자연을 외칠 수 있는 건 아니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며 자신만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만들며 살아가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말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앞에 자신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있는 그대로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순응하며 살아가는 지역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글쓴이의 말을 경청해야만 한다. 자꾸만 소외되어가는 그들의 존재가치를 인정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풍요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꿰어맞추는 퍼즐과도 같은게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이 아닐까?

'돌봄'.. 이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파트 한쪽에 삐죽 심어놓은 나무 한그루가 우리에게 위안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담장 아래에서 이름조차 불리워지지 못하는 키작은 꽃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냥 있던 자리에서 살고 싶다고 소리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그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도 한번 물어봐야 한다. 글쓴이가 말하는 '돌봄'의 대상은 흙이고, 풀이고, 나무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도 파괴되어질 거라는 경고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힘없고 작은 존재의 가치에 대해, 또한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말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가슴 깊숙히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왜곡된 정보를 내세운 채 일방적인 소통만을 외쳐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들어주고', '인정해주는'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뻔한 이야기일거라고 편협된 생각을 하며 펼쳐들었던 책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실재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그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 힘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글쓴이의 애타는 마음을 보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소중하게 다가왔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안하는 것이 더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모두를 위하는 길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비생각

만약 우리가 파괴를 계속하기로 결심한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파괴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순응을 통해 그것을 꼭 필요한 일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193쪽)

문제 : 우리는 타협하지 말아야 할, 아니 타협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타협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 정치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를 자유와 이윤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반대파 정치인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만 파괴하거나 파괴의 정도를 조금씩 줄이는 안에 동의하는 식으로 타협한다. 말하자면 돼지를 너무 사랑해서 한 번에 다 잡아먹지 못하고 세 발 달린 돼지로 남겨놓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타협에는 명확한 논리가 있으며, 그 논리는 매우 치명적이다. 자연의 일부를 파괴하는 경제 운영을 지속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해결책 : 첫째,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장소를 존중하자. 시골을 식민지처럼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자연보호와 훌륭한 노동의 경제적 가치에 다시금 눈을 돌려야 한다. 둘째, '산업을 유치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정부는 하나같이 세금 감면 같은 방법으로 주민의 세금을 쏟아부어 외부의 대기업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지역 생산물의 가치를 높이고, 외부 시장을 찾기 전에 지역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지역과 공동체의 정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규모의 문제에 정직하게 대처하자. 뭐든지 규모가 크면 매력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규모가 클수록 탐욕과 무관심과 위험도 커지기 마련이다. 큰 규모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토지를 구석구석 돌보는 일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부여하자. 토지가 파괴된다거나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파괴될 때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 (- 199쪽~201쪽)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