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금강인문총서 2
석길암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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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서역국으로 불경을 얻으러 떠났던 삼장법사의 일행을 그렸던 <서유기>를 생각한다. 여기서 서천서역국은 단순히 중앙아시아권을 말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서역을 알면 불교를 알게 되고 불교를 알면 서역을 알게 되는 순환을 따라 서천서역국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였으며 새로운 문화를 향한 우리의 목마름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단순히 무역로로만 알고 있었던 실크로드가 또하나의 종교를 품었다는 사실은 미처 챙기지 못했던 중요한 무엇처럼 내게 다가왔다. 원래는 삼장이라는 말이 인도불교에서 경과 율과 논의 삼장에 능통한 자를 칭했던 말이라 한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번역자, 즉 역경승들을 호칭하였다 하니 법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자들에게 분명 그곳은 또하나의 새로운 세계였음일 것이다. 불교는 그렇게해서 모든 정보와 문화와 이념세계를 안고 동쪽으로 왔다!

수문제에서 시작되어 측천무후 시대에 가장 번성하였던 중국의 불교는 수도인 장안을 발판 삼아 그 위세를 떨쳤다. 수많은 역경승들과 구법자들이 모여들었고 너도나도 듣고 보았던 새로운 정보를 나누었을테니 그 흐름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 대표적인 번역자들로는 누가 있었을까? 지금의 이란지방에 있던 나라 파르티아의 왕자였다는 안세고가 전법의 뜻을 품고 한나라로 와 불전을 번역했다. 이로부터 중국은 한문으로 된 불전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불교 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번째로는 중국에서 태어나 아홉살에 인도로 가서 불경을 배웠다는 구마라집이다. 인도어를 소리나는대로 읽은 것으로 '라집' 또는 '집'이라고 부른다는 그의 경론. 그의 번역을 계기로 중국불교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북인도 출신의 승려 보리류지, 서인도 출신의 전제가 있었다. 중국에서 번역작업을 하였던 서역 출신의 승려들 대부분은 당시 집권자들의 후원을 받았기에 안정된 환경속에서 번역작업을 할 수가 있었다. 경전을 강의하고 해석하는데 뛰어났다는 현장도 있다. 인도의 서역에서 구법하다가 대,소승의 교학을 배웠다는 그는 불상이나 경전류등 많은 것들을 중국으로 들여오기도 했다. <대당서역기>를 당태종에게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말을 들여와 내나라 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장의 '오종불번'을 보면서 그들이 번역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였으며, 변질되어지지 않은 제대로 된 뜻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니 역경승이라는 자들이 대단한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대승불교는 자신들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방법으로 경전을 택했다. 경전의 내용을 나누는 기본적인 방법이 인연분, 정종분, 유통분이라 한다. 인연분은 경전이 설해지게 된 인연을 설명하고, 정종분은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부분이며, 유통분은 경전의 유통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보통은 인연분이나 정종분만으로 충분했지만 대승불교도들은 경전의 내용을 알리고 보증하는 일에 더 큰 공을 들였다 한다. 물론 동아시아의 불교가 받아들인 것도 대승불교였다. 따라서 불교의 흐름이 역경에서 사경으로 변천되어짐을 알 수가 있다. 사경은 경전을 필사한다는 말로 큰 도시의 사원마다 사경소를 설치하여  경전유포에 힘을 썼다. 또한 왕들이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쓰기도 했으니 국가차원에서 사경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초기의 불경사경이 새로운 가르침과 문화를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으니 사경만으로는 전법을 하기에 그다지 능률적이지 못했다. 그런 까닭으로 인쇄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서로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나라의 <무주정광대다라니경>, 일본의 <백만탑다라니>, 중국의 <묘법연화경>도 모두가 불경의 인쇄본이었다. 불교에 의해 인쇄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불교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같은 길을 두사람이 가지 말라고 했다던 부처님의 말씀만으로도 전법의식을 대함에 있어서 얼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해인사의 장경판전만이 알려져 있지만 이름난 사찰에 가보면 대개 경판을 보관하는 별도의 판전을 부속건물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것만 보더라도 사찰이 인쇄문화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쇄혁명이 동양에서보다 서양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읽고나니 뒷맛이 씁쓸했다.

불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통일되지 못해 인도불교에서와 같은 경,율,론 삼장의 정형적 분류는 불가능했다. 저마다 제멋대로 번역했으며 번역어조차도 서로가 달랐다. 더구나 언제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번역을 하였는지조차 확실하게 알 길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문제로 인식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안이었다. 도안은 번역되어진 경전들에 주석을 붙였고 그 유래를 상세하게 밝혀주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중국인들이 불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에 표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니 괄목할 만한 일이다. 위경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항상 반쪽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지만 그 위경조차도 불교의 가르침을 새로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였고 그 가르침을 통해 통치의 의도를 달성하려 했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하니 불교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과시했는가를 알게 된다. 더구나 혼자만의 유아독존적이 아니라 토속신앙등을 함께 아우르며 상생을 도모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 테다. 그랬음에도 출가승려가 지켜야 할 '네가지 규칙'은 왠지 생소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대로 수행을 하는 스님을 많이 봐오지 못했던 까닭은 아닐까?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쉽지않은 규칙을 만들었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의 호의에 의존하라! 다시 말한다면 사회와 끝없이 소통하며 세속사회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들 삶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의 (네가지 규칙)' 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분소의 : 다 닳아서 해진 천조각을 모아서 꿰매어 만든 옷만 입을 수 있다. (이 말은 오래전 입적하신 해인사의 성철스님을 떠오르게 한다) 수하주 : 나무 아래에서만 생활해야 한다. (사찰의 대부분이 산중에 있는 이유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산중을 떠난 사찰내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듯 하다)  걸식 : 탁발해서 얻은 음식물만으로 생활하라.(지금도 탁발은 수행과정의 일부라고 들었다)  진기약 : 소의 오줌으로 만든 약으로 이것만을 약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살짝 이해를 비켜간다. 소를 우상시하였던 인도에서부터 시작된 때문은 아니었을까?)

불상이야기속에서 보게되는 독특한 보살상들이 있다. 낯설지 않은 포대화상의 모습.. 뚱뚱한 몸집에 배는 불룩하지만 그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한..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녔는데 그 속에서 중생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내주었다는 그를 사람들은 미륵보살의 화현으로 여겨 그 모양을 그린 후 존경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베품의 상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장보살이 바로 신라의 왕자 김교각 스님을 말한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옥같은 이 현실속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려진 그를 일본에서는 참회의 대상으로 더 깊이 신앙한다고 한다.  불교를 통한 문화의 전승과 전파과정이 흥미로웠다. 그리스로마신화와 우리신화속의 주인공들이 갖는 일체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로스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떠났던 프쉬케의 이야기와 바리데기 공주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서천서역국으로 떠나는 이야기는 그만큼 오랜시간을 우리 민족의 의식이나 기억속에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불교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다못해 억불숭유 정책을 썼던 조선에서도 불교가 무교와 함께 우리곁에 살아남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으로 인해 불교와 무교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불교와 무교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다른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의 실용화를 테스트하기 위해 첫번째 대상으로 불서를 꼽았다는 것은 우리의 실생활속에서 불교적 언어 생활을 외면하고는 새로운 말과 글의 사용이 불가능 했던 까닭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상생활속에서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말부터 넋두리까지 불교아닌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시껍했네'라는 말이 불교의 '십겁'으로부터 왔으며, '이판사판'이라는 말 또한 공부하는 승려와 잡역에 종사하는 승려를 나누었던 말이라는 것은 몰랐던 사실이다. '찰나'라는 말도 그럴 것이다. 그렇듯 우리의 말길과 뜻길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 불교였다. 사흘이라는 행사기간동안 마지막 셋째날은 송나라나 여진등 타국의 사신도 참여하여 특산물을 바쳤다는 팔관회..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라 불교행사라는 명목을 내세워 고려의 입지를 동아시아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는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전래문화를 사이비니 구닥다리니 하면서 남의 문화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일침이 상당한 아픔을 남기기도 했다.  '전통으로의 복귀', 전통으로의 복귀는 이미 복귀가 아니라 또다른 방식의 나아감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선택을 강요하기 마련이고 가치의 우위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훗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때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다. 그것은 선택의 선악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선택의 길목에 서야 할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준비 작업이기 때문이다. (254쪽)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 글을 다시한번 되새겨본다.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불교라는 이념만을 보게 될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불교길을 따라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배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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