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신화일까? 진정 신화일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이순신의 이야기. 들어도 들어도 가슴을 먹먹하게 할 우리의 영웅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얼만큼이나 알고 있는것일까? 그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제외하고서... 글자가 모여서 한권의 책이 되고 그 책을 읽음으로써 나에게 전이되어져오는 어떤 느낌에 전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작가에게 요즘 흠뻑 빠져들고 있던 탓에  김 훈이라는 이름이 주는 유혹에 강한 끌림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의 문자들이 전해주는 여운이 너무 길었던 까닭이다. 역시 그랬다. 책장을 넘기고 한 자 한 자 나의 눈속에 담아갈 때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을것만 같았다. 때로는 긴장감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때로는 분노로, 그리고 때로는 눈물로 그의 문장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조그만 주먹을 펼 때에야 내가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걸 인식할 뿐이었다. 그만큼 흡인력이 느껴졌다는 말일게다.

난중일기를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주변사람들을 실명으로 적었다던 그 난중일기속의 인물들. 그들이 있어 이순신이 있었을 것이기에 그 이름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김 훈의 글은 <남한산성>에서도 그랬듯이 내가 책속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책속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더 아픈 것일게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일게다. 그래서 더 많은 분노를 느끼게 되었을게다. 이 책 <칼의 노래>를 읽다보면 어느새 나는 이순신이 되어 있다. 임금의 교서를 받고, 그래도 임금이라고 머리 조아리며 (마음과는 다른) 장계를 올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주리가 틀리는 모진 형벌을 받고.... 어여삐 보이는 백성들을 내치지 못하고 그들을 군선위로 끌어 올리는 아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두려움에 떠는 부하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단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호통칠 수 있었던 장군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백성에게, 그리고 부하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 게다. 그리하여 그가 의정부의 형틀앞으로 끌려갔을 때 아무런 힘없는 백성들이, 부하들이 임금의 문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그를 살려 사직을 보존하소서...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 (-196쪽)  적이 있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적이 있었기에 그의 몸이 고문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임금은 나를 살릴수도, 죽일수도 없었던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을 때 그는 알았다. 내 몸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임금은 그의 이름 석자를 앞세워 그의 뒤에 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는 그 이름을 두려워했다. 형식적인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그를 의정부의 형틀에 묶이게 했던 권율마저도 끝내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었다. 무슨 방책이 없겠느냐고...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던 이순신의 마음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말쟁이들의 싸움속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모진 고문에서 벗어난 그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어쩔 수 없이 거칠었다. 그가 머물며 상대해야 할 바다와도 같았을 것이다. 임금의 칼로써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한가닥 소망이 내게는 붉은 노을처럼 보였다. 붉게 타오르다 사그러드는 ...

..... 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 이() 올림 (-66쪽)

조선 역사를 많이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는 것들속에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이해하기 힘겨운 존재들 중 으뜸가는 이가 있다면 선조와 인조다. 가장 치욕드러운 과정을 겪어냈으면서도 가장 치욕스럽게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던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들이 원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내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했던가? 그랬기에, 어쩌면 정말 그랬기에 이 순신이라는 이름이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소설로서만 읽혀지기를 바랄 뿐이라던 글쓴이의 바램과는 달리 내게는 이 소설이 단지 소설로서만 읽혀지지가 않았음이다. 장군이 아닌 한 사람으로써, 한 남자로써 겪어야 했을 수많은 감정의 기류들이 너무도 아픈 까닭이다.

그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 (-212쪽)  어디 그 때 한번 뿐이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무서운 것들이 어디 그것뿐이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판치던 그시절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말()이 살아 말()처럼 뛰어다니던 시절. 그 시절을 가엾어했고 또 무서워했던 이가 어디 이순신뿐이랴.  직접 눈으로 보려하지 않았고 제 발로 찾아나서 진위를 가려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말()의 유희들. 누구의 말이 더 찬란하게 빛났는가에 따라 순간적으로 서열이 뒤바뀌던 그 시절. 간혹 그  말()의 유희를 즐길대로 즐기면서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긴 했으나 그런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는 묻지 말자. 굳이 묻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으니... 지금의 말쟁이들 또한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저만 먼저 살아야겠다고 아우성인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환하게 보고 있으니... - 전하, 신들을 죽여주소서.- 툭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습관처럼 내뱉던 그들을 앞에 두었다면 -그래, 내 너희를 죽여 이 나라의 사직을 바로잡고자 하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나였다면 그러고 싶었다는 말이다. 진정 그랬으면 싶었다는 말이다.

답답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신화의 끝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도 나는 그 이순신의 탈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그냥 그의 아픔을 잠시 더 느껴보고 싶었다. 사실과 소설이 어울어진 이야기 하나를 떨쳐내기가 이리도 어려운가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두어번 아산 현충사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지난 겨울이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를 한참 공사중이었다.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무엇을 찾아냈을까? 현시대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옛시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면서 나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생각했다. 존재의 의미는 모두 버리고서 오롯이 덩치만 부풀린 채 어딘가에서 실려와 내려놓아진... 그 생뚱맞은 자리... 왠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잠시 머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그 날의 느낌이 그 곳 현충사에서는 되살아나지 않기를 빌었다. 쉽게 털어내지 못할 것 같은 이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찾아가 보리라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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