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6
오스카 와일드 지음, 하윤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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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바꿔 말하면 내면의 세계와 현실속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쪽을 더 우선으로 생각할까? 아마도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는 보이는 세계에 더 많은 관심과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보이는 세계일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하는 이정표보다는 보이는 세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우리 주위에 더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기에, 아니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내면의 세계일 것이다. 일부러 보려고 노력한다면 볼 수는 있는 것일까? 내면의 세계, 내 영혼의 삶.. 풍족한 영혼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현실속에서 보여지는 것에만 치우쳐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쾌락 - 어쩌면 인류가 지향하고 싶어하는 가장 최고의 행복은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쾌락의 얼굴은 앞뒤로 두개인 듯 하다.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행복을 맞이하려고 문을 열어주었더니 불행이라는 쌍둥이 동생도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과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모양이다. 무서운 사실은 이 쾌락으로 인도하는 존재가 분명 악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다. 겉으로는 선한척 하며 다가오지만 결국은 악으로 인도하는 존재.. 누구에게나 유혹은 다가오고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동기나 계기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유혹 - 살면서 유혹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유혹이라는 것은 늘 우리 가까이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듯 하다. 우리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유혹은 유난히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도리언 그레이에게도 그렇게 다가온 유혹.. 너무도 생생하게 실물처럼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그가 무심결에 흘렸던 한마디가 치명적인 운명의 고리를 엮어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나르키소스가 떠올랐다. 예언자의 말처럼 정말로 그가 자신의 운명을 몰랐다면 오래 살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여 끝내는 자살을 해야 했던 나르키소스의 운명속에는 수많은 여인들의 아픔이 잉태되어 있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 그 빛나는  젊음의 순간만이 내게는 영원히 머물고 늙어가는 세월 모두는 저 초상화속의 자신에게 주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기도는 악마와의 거래였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자신의 운명을 도리언 그레이는 알았다. 그리고 그 거래에 흡족했다. 

비밀 -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비밀 한가지쯤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 비밀이 어떤 형태이며 얼마만한 크기인가 하는 것만이 다를 뿐인데 그것조차도 철저하게 주관적인 개념일 뿐이다. 어느 순간 사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초상화 앞에서 경악하던 도리언 그레이가 영혼과 맞바꾼  젊음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운명을 인정해야만 했던 그 아픔도 잠시, 그의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 갔다. 그 비밀을 간직하게 만들어준 동기는 물론 쾌락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대변되는 쾌락의 의미는 참으로 짧게 다가왔다. 그러나 깊었다. 한사람을 내세워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대들의 모든 쾌락을 알고 싶어했다던 그 이야기는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비밀이 커텐으로 가리워져 거미줄 쳐진 다락방에 갇혀진 그 순간부터 그가 모른 척 했던 것은 영혼의 파멸이었다. 

타락 -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타락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많은 사교클럽을 왕래했고, 귀족들과 수많은 교제를 했지만 정작 자신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그의 삶. 그가 가까이했거나 그를 가까이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망가져가는 현실속에서도 악마는 내내 그를 몰아댔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너의 책임은 아니라고.. 너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거라고.. 너의 그 아름다운 젊음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시선 따위는 무시해버려도 되는 거라고.. 끝내는 마약의 소굴까지 찾아들어가는 도리언 그레이에게 변해가는 자신의 초상화는 마음 한켠의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사악하고 추하게 일그러지며 변해가는 자신의 초상화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라고 믿을 수 없었기에 어쩌면 그는 더더욱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용서 그리고 인정 -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어지는 순간 그에게 찾아온 자신을 향한 환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 결국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화가 바질마져 원망해야 했던 그의 절망. 그 초상화만 그리지 않았어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거라고 절규하며 변해버린 초상화 앞에서 화가를 죽여야만 했던 도리언 그레이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죄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다던 누군가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우리는 왜 그다지도 삶의 유혹에는 약한지.. 우리는 왜 그다지도 수많은 변명거리를 찾아내야만 하는지.. 아름다운 외모와 부와 젊음 모두를 갖춘 도리언 그레이에게 젊음의 유한성을 말하며 다가왔던 헨리는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유독 그만이 도리언 그레이의 곁에서 흔들림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 세상과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던 헨리 경을 세상사람들 모두는 사악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랬다. 도리언 그레이의 멘토를 자처하고 나섰던 그의 존재는 사악함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도리언 그레이를 사악함으로 이끌던 헨리 경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단순히 말 몇마디만으로도 도리언 그레이를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듣기에 달콤한 말로, 때로는 자기만의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말 한마디를 툭 던져줌으로써 그는 도리언 그레이를 움직였던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서글픈 사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도리언 그레이에게서 느껴지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숭배했던, 그리하여 삶에 대한 열정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젊음을 그림속에 담아 주었던 화가 바질은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내면의 선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끝내는 화가를 찔렀던 칼로 자신의 초상화를 찢어버리며 삶을 마감하는 도리언 그레이가 생각해보면 결국 승리자다. 자신의 운명을 인정했으니.. 죽는 순간만큼은 진정한 자신의 영혼을 찾을 수 있었으니.. 단지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하나의 행동이었다해도 말이다.

"우리 모두 자기 안에 천국과 지옥이 함께 들어 있지요"(-229쪽)  사실 영혼이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내걸며 악마와 거래를 했던 이야기는 이 책만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도 몇개는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섬뜩했다. 내 안에 천국과 지옥이 함께 한다던 도리언 그레이의 말처럼 우리는 아마도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쉽게 천국같은 지옥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소개글에서 살짝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애적인 면을 들춰내고 있었지만 내게는 왠지 그것이 동성애적인 모습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그만큼 강한 느낌을 남겨주었던 때문일까? 도리언 그레이는 나일수도 있고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일수도 있다. 순수함을 숭배했던 화가 바질 홀워드는 선함이었고,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던 헨리 워튼경은 악함이었을 뿐이다. 내 곁에 항상 머무는 두 친구의 모습이 왠지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비생각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던 현실의 삶이 밤의 비현실적인 그림자를 뚫고 되돌아온다. 우리는 지난밤 떠나왔던 지점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틀에 박힌 습관으로 가득 차 있는 똑같은 지루한 순환속에서 에너지를 계속 써야한다는 당위성이 끔찍한 느낌으로 우리를 덮칠 것이다. 때로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한줄기 강렬한 갈망이 우리를 덮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쾌락을 안겨주는 세상, 모든 사물이 새로운 형태와 색채를 띠고 변화된 모습으로 다른 비밀을 간직하는 세상, 과거는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고 설령 살아남더라도 의무감이나 후회를 의식하지 못하는 형태로, 심지어는 씁쓸함이 배어 있는 기쁨의 기억조차 갖지 않고 고통이 안겨준 쾌락의 기억조차 간직하지 않은 형태로 남아 있는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갈망이 우리를 덮친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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