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1/3이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런 말을 여과지를 통과하지 않고 그대로 듣는다면 정말 끔찍한 말이겠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비추어 말하는 것이라고 위안삼으면서 그 섬뜩함을 달래보기도 한다. 미쳐가고 있다는 말이 갖는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온 정신을 다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니 행복할 수도 있는 일일테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닐까 싶기도 하여 왠지 서글퍼지기도 한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은 자, 과연 누구인가?' 라고 묻고 있는 이 책의 소개글을 보면서 범인은 우리가 아니라 사회라고 떠밀고도 싶어진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미쳐가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인 것을... 일단은  특이하다. 처음부터 문맥을 찾아 헤매느라 정신을 못차렸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이해하려고만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뭔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되는 책..

책속에서 주인공처럼 보여지는 미모의 여인 아구스티나는 어린시절부터 억압되어져 있던 감정의 소용돌이안에 갇힌 채 살아가는 정신병자이다. 가끔씩은 제 정신으로 돌아와 주변사람들에게 잠깐의 행복을 전해주고 가는 그런 안타까움의 존재.. 그런 그녀를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감싸며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꺼내기 위해 노력하는 환상같은 남자 아길라르..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사람에게서 보여지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러면서도 끝없이 서로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거였다. 차갑고 형식적이기만 했던 가족들. 그 틈새속에서도 일종의 모성애와 같았던 자신의 사랑을 어린 동생 비치에게 쏟아부을 수 밖에 없었던 아구스티나.. 단 한번도 거역하지 않은 채 자신이 처해진 상황안에서 사랑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던 어린소녀 아구스티나는 어쩌면 이미 자신만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리저리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책속의 시선을 쫓다보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타인의 시선으로 돌아가버린 듯 느껴진다. 같은 장소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두사람을 보고 있다.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옮긴이의 말을 빌려보자면 내면과 외면의 세계를 동시에 왔다갔다 하는 까닭이라고 하지만 왠지 거북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구스티나의 행적을 자신과 제3자의 시선으로 혹은 제3자의 목소리를 빌려 나에게 들려주고 있으니 조금은 혼동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함을 참으며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샌가 아구스티나라는 여인의 광기에 대한 공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거다.

아구스티나를 향한 아길라르의 마음은 묘하다. 어느날 갑짜기 출장에서 돌아와 전화기에 녹음된 목소리를 듣게 되는 아길라르. 웰링턴 호텔에서 당신 부인을 찾아가시오... 이 뜬금없는 소리에 그 흔한 아내의 부정을 떠올리게 되는 남자. 미친 아내곁에서 자신도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남자. 아내의 과거를 따라가면서 아내의 주변에 대하여 더 많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을 탓하는 남자. 그러면서도 언뜻언뜻 자신이 원하는 작은 행복의 고리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아구스티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리하여 아길라르와 같이 자신을 감싸안아줄 그런 존재를 기다리며 꿈꾸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러면서 나는 똑같은 질문에 부딪히게 되어버렸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은 자, 과연 누구인가?"

색다른 시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를 헤매게 하고 지치게 했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 이 세상속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친 그런 느낌을 전해주었던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형식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버리며 자신의 알몸으로 다가가고 있는, 그야말로 피하지 않고 부딪혀야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의 울림이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띈다. 소설속에서 마약거래나 돈세탁과 같은 상류층의 냄새나는 부에 대해 과감하게 칼을 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조국 콜롬비아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던 정치인의 숨결이 거기에 살아 숨쉰다고 한다. 실제로도 작가는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그 표현들이 모두 조국에 대한 절절한 작가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인간의 숨겨진 내면을 시원하게 파헤쳐버렸던 주제 사라마구의 칭찬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다. 작가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이름을 보면서 오랜동안을 나의 책장에 꽂힌 채 눈 앞에서 서성거렸던 <백년동안의 고독>을 떠올렸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흐름을 따라 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와닿는 그 무엇과 마주치던 순간들, 그 기다림을 내게 알려주었던 작품들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했던 내가 받을 수 있었던 선물로 충분했다. 조금은 거북스러웠지만, 나에게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읽고나니 후련하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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